본문 바로가기

기독교 서적

5장. 키프로스와 갈라디아 / 2부 왕의 사자 갈라디아로, 그리고 갈라디아에서... 그들은 ‘하나님나라’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고 종국에는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완전히 이루어질 그 나라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이루어질 온 피조 세계의 회복이었다. 그때가 오면 하나님 백성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이 새로운 세계를 경영하는 데 참여하게 된다. 초기 예수 따름이들은 하나님나라가 분명 아직-미래라는 차원을 강하게 갖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단지 미래에 이루어질 실체만은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하나님나라는 예수의 삶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다. 이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생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 시대 유대 역사를 잠시만 훑어봐도, 누군가 이미 메시아가 왔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그저 우리가 .. 더보기
4장. 안디옥 / 1부 시작 다소에서 안디옥으로... 바나바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어로 분명 ‘충성’을 가리키는 한 단어가 바울이 좋아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인 피스티스pistis다. 이 말은 보통 ‘믿음’으로 번역하지만, 종종 ‘신실함’, ‘신뢰할 수 있음’이라는 의미도 지니며, 당연히 ‘충성’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피스티스라는 말은—믿는 사실은 물론이요 믿은 것 또는 믿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인—‘믿음belief’이란 의미의 ‘믿음faith’을 뜻할 수 있는데, 이 조그만 한 단어로 이미 아주 충분한 의미를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러나 피스티스는 어떤 진정한 믿음에 함께 따르는 개인의 헌신을 가리킬 수도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예수가 이제 온 세상의 정당한 주권자이신 ‘주’이시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피스.. 더보기
3장. 아라비아와 다소 / 1부 시작 다소로 돌아가다 1세기에 ‘아라비아’는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말이었다. 즉 그곳은 성지 남쪽이자 이집트 동쪽에 있는 시내 반도의 시내산이다. 시내산은 하나님이 불 가운데 내려오셔서 모세에게 토라를 주신 곳이었다. 그곳은 계시를 주신 곳이요, 율법을 주신 곳이며, 일찍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세우셨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엄숙히 비준한 곳이기도 했다. 아라비아의 위대한 산 시내산은 그런 의미에서 시작의 장소였다. 그곳은 이후 세대들이 구원을 베풀어 주시고 까다로운 요구를 제시하는 이상한 하나님과 자기 뜻대로 목을 뻣뻣이 세우던 하나님 백성의 풍파 잦은 혼인 관계, 그 길고 파란만장한 관계의 출발점으로서 되돌아보던 곳이었다. 시내는 만사가 완전히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엘리야가 들어간 .. 더보기
2장 다메섹/ 1부 시작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사울—사도 바울—은 그것을 동일한 내러티브이지만,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그러나 그 정당함을 증명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 내러티브로 보았다. 문제가 된 내러티브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었다. ‘소망’과 ‘낙관론’은 같은 것이 아니다. 낙관론자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이 잘 돌아간다고 느낀다. 그들은 만사가 좋아진다고 본다. 모든 일이 잘 풀려 간다! 그러나 소망은, 적어도 유대교 그리고 초기 기독교가 살았던 세상을 생각하면, 그런 낙관론과 완전히 다르다. 세상이 어두워 보일 때 소망은 질기고 무거운 선택일 수 있으며 실제로 종종 그랬다. 소망은 세상사의 본질이 어떠하거나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간다는 느낌에 매이지 않고 믿음에, 한 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바탕.. 더보기
1장 열심/ 1부 시작 충실(충성)loyalty 열심 다소에서 예루살렘까지... 기도의 리듬이다.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누, 아도나이 에하드!” 곧 “들으라, 이스라엘아. 주님은 우리 하나님, 주님은 한 분이시니!” 새로운 출애굽, 두 번째 출애굽 유대인은 안식일을 지키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 하나님의 때와 사람의 때가 마침내 하나가 될 날을 매주 기대하기를 기뻐했다. “우리 페루심perushim, 우리 바리새인” 이 노래는 “그때에 비느하스가 개입했으니… 그것이 그의 의로 여겨졌다”고 말한다. ‘의’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체다카tsedaqah는 어떤 관계, 곧 헌신과 언약에 바탕을 둔 관계를 가리킨다. “하나님이 그것(열심에서 나온 비느하스의 행동)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은 이 행동이 하나님과 비느하스 집안의 .. 더보기
들어가는 글 ‘구원받은 영혼’이 이 세상에서 건짐 받아 저 먼 ‘천국’으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자체가 온 우주의 갱신이라는 위대한 행위를 통해 하나가 되고 이 온 우주의 갱신 안에서 인간의 몸도 다시 새롭게 되어 새 세계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었다. (바울은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라고 말한 뒤, 곧바로 예수가 하늘에서 오시지만, 우리를 거기로 다시 데려가시지 않고 현재 존재하는 세계와 우리를 함께 변형시키시리라고 말한다.) ‘부활’하리라는 이 소망, 새롭게 다시 지어진 창조 안에서 새 몸을 갖게 되리라는 이 소망은 단순히 마지막에 맞이할 ‘운명’, 미래를 내다보는 소망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지막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만물을 변화시킨다. 바울 자신이 이야기하는 ‘역사’가 공간과 시간과 물질로 .. 더보기
15. 지금 여기, 예수와 함께 다스리다 / Part 3 예수, 온 세상의 왕이 되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일하시고 예수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 고대의 스토아학파는 하나님과 세상을 어느 정도 같은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세상의 내적 작용은 곧 신의 내적 작용이었다. 반면 고대의 에피쿠로스학파는 신들이 세상을 작동시킨 뒤에는 세상을 자동으로 돌아가게 두었으며, 따라서 신들이 끼어들어 교통정리를 하고 이상한 ‘개입’이나 ‘기적’을 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믿었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가 성공한 이유는 바로 실재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그 두 가지 ‘자연스러운’ 입장으로 쉽게 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세상은 서로 섞여 있거나 아니면 거대한 간극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있거나 둘 중 하나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범신론자 아니면 이원론자가 된다. 하지만.. 더보기
7장. 칸트와 그의 계승자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재를 계몽주의의 전제에 맞추려고 시도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자율적인 추론을 위한 포괄적인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사람. "현상"과 "실재"에 관한 칸트의 구별. 현상과 실재 초월적 방법 전제적 방법 선험적 종합 판단 경험을 조직화하는 정신 칸트는 자연이 아닌 인간이 참된 지식을 구성하는, 종합적이그 선험적인 진리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칸트의 조립라인 초월적 감성은 원자료에 영향을 미쳐 그것을 감각적 인식에 적합하게 만듬. 초월적 분석은 시간과 공간의 질서가 부여된 대상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 통각의 초월적 통합은 경험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경혐의 "조건"이다. 초월적 변증 1. 오류 추리 2. 이율배반 3. 이상 칸트의 .. 더보기
14. 새로운 통치, 가슴 벅찬 약속 그리고 희망을 맛보다 / Part 2 톰 라이트, 1세기 예수를 만나 배우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늘 만들려고 의도하셨던 새로운 세상의 시작으로서 살아나셨다. 새로운 세상예수께서 부활절 아침에 다시 살아나셨을 때,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늘 만들려고 의도하셨던 새로운 세상의 시작으로서 살아나셨다. 기독교의 발생과 형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사렛 예수가 아주 철저히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아주 철저히 그리고 엄연히 몸으로 다시 살아나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그분의 무덤은 비어 있었다. 그 이야기들의 주인공은 ‘땅’과 ‘하늘’이 똑같이 편하신 분으로 보인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은 ‘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성경의 ‘하늘’과 ‘땅’은 서로 겹쳐져 있고 맞물려 있다. ‘하늘’과 ‘땅’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 밀어내고 갈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늘.. 더보기
13. 십자가 죽음, 우주의 초석이 되다 / Part 2 톰 라이트, 1세기 예수를 만나 배우다 종의 사명과 왕의 사명이 그분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하나로 녹아들었다. 마치 질문이 질문인 까닭은 바로 범주의 붕괴, 한계의 초월, 세계관의 확장을 요구하는 뭔가가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당대 사람들뿐 아니라 현대의 우리까지 일깨워 주는 것 같다. 예수가 기존의 어떤 범주들에도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더없이 융통성이 많았는데도 예수는 거기에 들어맞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예수는 사람들이 메시아에게 기대할 만한 일들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과 행적의 대부분은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메시아다운 것이었다. 분명히 그분은 다른 메시지를 가져온 한낱 랍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분은 교사로서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셨으며, 지금이 바로 성경의 궁극적 실현의 순간이라 믿고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