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 서적/바울 평전-톰 라이트

4장. 안디옥 / 1부 시작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다소에서 안디옥으로...

바나바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어로 분명 ‘충성’을 가리키는 한 단어가 바울이 좋아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인 피스티스pistis다. 이 말은 보통 ‘믿음’으로 번역하지만, 종종 ‘신실함’, ‘신뢰할 수 있음’이라는 의미도 지니며, 당연히 ‘충성’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피스티스라는 말은—믿는 사실은 물론이요 믿은 것 또는 믿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인—‘믿음belief’이란 의미의 ‘믿음faith’을 뜻할 수 있는데, 이 조그만 한 단어로 이미 아주 충분한 의미를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러나 피스티스는 어떤 진정한 믿음에 함께 따르는 개인의 헌신을 가리킬 수도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예수가 이제 온 세상의 정당한 주권자이신 ‘주’이시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피스티스는 ‘성실’이나 ‘충성’을 의미한다.

belief
명사

1 신념, 확신
I admire his passionate belief in what he is doing.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신념이 나는 존경스럽다.

2 (옳다고 믿고 있는) 생각, 믿음
She acted in the belief that she was doing good.
그녀는 자기가 좋은 일을 한다고 믿고 행동했다.

3 (특히 종교적으로) 믿는 사항[믿음] (→disbelief, unbelief)
religious/political beliefs
종교적/정치적 믿음[종교적/정치적으로 믿는 내용들]

faith
명사

1 (남의 능력·지식·약속에 대한) 믿음[신뢰]
I have great faith in you—I know you’ll do well.
난 널 단단히 믿어. 네가 잘 하리란 걸 난 알아.

2 신앙(심)
to lose your faith
신앙심을 잃다

3 (특정) 종교[신앙]
the Christian faith
기독교 신앙

바울은 이 피스티스, 곧 예수가 하나님께 보이신 이 깊디깊은 신뢰와 충성이 어떤 이가 진실로 이 새 공동체의 지체인지 아닌지를 보여 주는 아주 긴요한 표지이자 실체라고 본다.

이 가족 정체의 초점은 예수였다. 예수가 이 가족 공동체가 영위하는 삶의 방식을 형성했다. 이 가족의 독특한 표지가 예수를 향한 믿음에서 우러나온 충성이었다.

안디옥에 있던 공동체와 같은 공동체가 여러 문화가 충돌하던 세계에서 살아가는 예수 따름이 그룹으로서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면, 그 공동체 지체들은 두 가지를 함께 잡아야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그들은 유대 전통과 성경에 뿌리를 든든히 내려야 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메시아 곧 이스라엘의 성경을 완성하신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숙고해야 했을 것이다. 이런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성경 이야기 및 예수와 관련된 사건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 그것이 지닌 의미를 서로 다른 여러 각도에서 곱씹어 봐야만 비로소 그 정체와 그 완전성과 그 신경을 보존할 수 있었으리라.

누가는 이 시기에 처음으로 안디옥에서 예수 따름이들이 크리스티아노이Christianoi 곧 ‘메시아 백성’이라 불렸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그 공동체 자체처럼, 그리고 다소의 사울 자신처럼 유대의 뿌리를 깊이 간직하면서도 기이하며 새로운 범위와 힘을 갖고 있었다.

안디옥은 민족을 초월한 새로운 종류의 공동생활을 이뤄 보려는 진정한 노력이 처음으로 이뤄진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안디옥은 바로 이런 행동의 연장선에서 예수 따름이들이 자신을 지역을 초월하여 다른 지역 공동체를 돌볼 책임을 지는 공동체로 생각하는 본보기를 처음으로 보여 준 곳이었다.

예수 따름이들은 이렇게 처음부터 자신들이 모든 ‘가난한 자’에게 특별한 의무를 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예루살렘 공동체에 초점을 맞췄다.

사람이 예수를 부활하신 주로 믿으면 그 사건 자체가 영(성령)이 복음을 통해 역사하심을 나타내는 표지요, 영이 믿음을 그 첫 열매로 삼는 ‘선한 일’을 시작하시면 영이 그 일을 마치시리라는 것도 믿을 수 있다는 그의 견해다.

그러나 바울은, 제자가 나태하거나, 여유를 부리거나, 제자 자신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노력도 전혀 하지 않은 채 영이 그 모든 일을 하시게 수수방관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음을 안다.

코이노니아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보통 ‘사귐’으로 번역하지만, 바울의 세계에서는 다른 여러 의미 가운데 동업同業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었으며, 이런 동업 관계는 가족과 가족의 유대 관계와 겹칠 때가 자주 있었을 것이다.

‘자유’의 문제였다. ‘자유’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 단어요 유월절 단어였으며, 사울 같은 유대인이 바라고 기도했던 아주 많은 것을 표현한 슬로건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종류의 ‘자유’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새로운 ‘유월절’로 말미암아 탄생했다. 그 자유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가 누릴 수 있는 자유였으며 새 세계, 새 가족, 메시아의 뒤를 따르며 영의 인도를 받는 새 삶에 함께 참여하는 지체가 될 자유였다.

초기 예수 따름이들은 이미 그들 자신을 이 세 사람(야고보,요한, 베드로)이 ‘기둥’ 역할을 하는 또 다른 성전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들은 새 하늘과 땅의 사회였다. 그들은 옛 성전과 나란히 살고 예배했지만, 옛 성전을 더 이상 필요 없는 곳으로 만들었다. 스데반이 했던 말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자유였다. 새로운 성전이 세워졌다. 이전과 그 종류가 다른 새로운 정결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