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부활절을 어떻게 축하할 것인가?
부활절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대한 열광적인 기쁨을 표출하는 날이어야 한다.
부활절은 진짜 예수님이 진짜 무덤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진짜 새 창조를 시작하는 사건이다.
8일 내내 축일로 보내야 한다. 아침 기도 시간 이후에, 심지어는 이전에도 샴페인을 나누어 주고 할렐루야와 여러 찬송가와 대단한 성가들을 불러야 한다.
부활절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축제다. 그날은 우리에게 최고의 날이다. 우리는 깃발을 내걸어야 한다. 특히 사순절이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하는 시기라면, 부활절은 무엇인가를 취하는 시기가 되어야 한다. 다시 한 번 아침 식사에 샴페인을 내와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거룩은 단순히 부정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때로는 정원에서 잡초를 뽑아야 하고, 때로는 병꽃풀을 파내기 위해 꽤 힘들여 삽질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순절이다. 그러나 다 파내고 그냥 말끔한 땅만 있는 상태로 정원을 되돌려 놓는 것을 우리는 원하지 않을 것이다. 부활절은 새로운 씨앗을 심고 모종도 옮겨 심고도 해야 하는 때다. 만약에 갈보리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진정한 인간으로서 번창하기 위해 우리 삶에서 죽어야 하는 것들을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면, 부활절은 우리 삶에 꽃을 피우고, 온갖 향기와 색채로 정원을 채우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들(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 모두)을 심고, 물을 주고, 모양을 다듬는 것을 의미한다. 승천 때까지 40일간의 부활절 기간은 새로운 임무나 모험, 또는 무언가 유익하고 풍성하고 적극적이고 자기를 내어 주는 그런 일을 시작함으로써 사순절과 균형을 이루는 시기여야 한다.
일단 시작해 보면,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희망, 새로운 모험의 맛을 볼 수 있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삶에 부활절의 기운을 가져올 수도 있다.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잠에서 깨어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부활절의 핵심이다.
공간-시간-물질: 구속된 창조계
교회의 옛날 형식을 맹목적으로 고수해서도 안 되고, 마찬가지로 맹목적으로 모든 전통을 저버리고 끊임없는 혁신만을 주장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앞에 놓인 희망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하고, 우리의 도약대인 예수님의 부활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하며, 그것에 맞게 이 세상에서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일을 재정리해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구속하기 시작하신 창조 질서는, 하늘과 땅이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도록 계획되었다. 그렇게 함께함으로써, 하나님이 처음에 창조에 대해서 말씀하신 ‘심히 좋은’ 상태가 폐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향상된다.
우리는 시간-공간-물질이라는 세 영역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현재의 창조가 향상되는 것, 하나님의 더 큰 목적에 포섭되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세 가지가 결코 버려지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생각해야 한다.
공간의 회복과 변화에 대한 논의는, 최근에 다른 무엇보다도 켈트 전통에서 말하는 ‘얇은 막의 공간’(thin place)을 새롭게 이해하게 해주었다. 얇은 막의 공간이란 하늘과 땅 사이의 막이 너무 얇아서 거의 다 들여다 보이는 특정 공간을 말한다. 이것은 사실 훨씬 더 광범위한 ‘공간 신학’의 한 가지 양상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이 거룩한 산 혹은 저 거룩한 산으로 예배를 국한시키지 않고, 하나님이 곳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불러서 자신을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게 하신다고 선언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고치신다는 신학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고치실 것이라는 신학은 예배와 기도를 위한 공간을 따로 가짐으로써 예견되어야 한다. 교회 건물 그리고 시인 엘리엇의 표현을 빌면 “기도가 유효했던” 다른 장소들은 이 세상으로부터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교두보를 의미한다. 그것은 온 세상이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그날에 대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공간 일부를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래된 교회 건물과 같은 것들이 오늘과 내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손쉽게 선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이원론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데, ‘선교’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원론에 봉사할 뿐이다. 아니면 손쉬운 이윤을 얻으려고 그러는 것이다.)
우리는 지리와 영토의 문제를 완전히 무시하기 전에, 전체 창조계를 회복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관점에서 올바른 공간과 장소의 신학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더 깊이 그리고 더 오래 성찰해 보아야 한다.
잠들어 있는 도시 위로 거대한 교회의 종이 울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듣건 듣지 않건 누군가가 무언가에 날짜를 매길 때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표방하는 것이다.
교회의 시간, 즉 교회사의 긴 이야기와 그동안에 누적된 교회의 ‘전통’은 교회가 어떠한 종말론적 기초와 선교 중심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교회의 이야기는, 어리석음과 실패와 명백한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조에게는 ‘현재’였던 그 시간에 하나님의 미래가 어떻게 이미 시작되었는지를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러한 이야기에는 실수도 들어 있고 그 문화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생활양식도 들어 있지만 새 창조의 모습들도 가득 담겨 있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과거’의 유산이다.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하나님의 미래의 어떤 부분들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전통을 단지 ‘전통’이라는 이유로 내버린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더니티에 항복하는 것이다. 또 나무는 더러운 흙 밑에 묻혀 있으면 안 되고 뿌리부터 열매까지 분명하게 다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무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일종의 극단적 개신교주의에 항복하는 것이다.
아주 초기부터 교회는 한 주간의 첫째 날, 즉 부활절 날이 현재 세계에서 하나의 징표가 되었고, 오는 세대의 삶이 이미 침입한 현재의 시간적 질서가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부활절이 시작된 때부터 부활절을 기념하기 위해 지킨 일요일은-사실 생각해 보면 꽤 놀라운 현상이다-단지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가 남긴 유산이 아니라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시간을 회복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있음을 계속해서 보여 주는 표시이며, 그 날을 지킴으로써 그 표시가 매주 기쁘게 갱신되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을 우리의 월요일과 같이 한 주간의 첫 째 날로 삼았던 사회에 살았지만 그 첫 날의 상징성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부활절을 축하한 후 하나님이 모든 것을 회복하실 그 날을 예견하기 위해 마지막 창조의 제8일, 즉 새로운 주간의 시작을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나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우리가 창조의 선함을 부인하는 플라톤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예수님의 육체적 성육신과 부활을 반드시 되찾아야 하고, 창조계 자체가 죽음과 부패에서 해방되어 회복될 것이라는 (그리하여 아마도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 나오는 C. S. 루이스의 뛰어난 상상적 세계에서처럼 현재보다 더 견고하고 더 실재적인 창조계가 될 것이라는) 약속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 바로 이와 같은 사고의 틀 안에서 세례와 성만찬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성례전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성례전이 악용된다고 해서 그것의 올바른 용도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일부로서, 예수님이 이미 부활을 통해 동참하고 있는 그 창조의 일부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 의식은 (악수든, 입맞춤이든, 계약서를 찢는 행위든 간에) 암호화된 행동이 가진 매우 강력한 방식으로, 우상 숭배와 죄를 패배시킨 예수님의 죽음과 창조계를 회복시킬 그분의 재림을 동시에 보여 준다(고전 11:26). 우리는 그러한 실재를 기반으로 살아간다. 비록 그것이 어떤 종류의 실재인지 개념화하기가 힘들 수 있지만 말이다. 부활절과 최종적 회복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의식을 통해 회복된다는 것을 앎으로써 긴장을 풀고 성례전이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그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 세계를 주장하여 그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그 주되심을 선언하고, 그 능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사명에도 구조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현재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 거절의 대상이 아니라 구속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과 최종적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때 사이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치유하시는 것을 축하한다는 의미다. 하늘과 땅이 다시 한 번 교차하면서 하나님은 공간을 회복하시고, 해와 주와 날이 회복의 언어를 말하면서 시간을 구속하시고, 생명의 회복을 가리키는 성례전을 통해서 물질 자체를 구속하신다. 세례는 그 생명을 씻어 주고 성만찬을 그 생명을 먹여 준다.
부활과 선교
교회의 선교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실현해 내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상을 자신의 영광으로 채우고, 옛 하늘과 땅을 새 것으로 바꾸고, 자신의 백성을 죽음 가운데서 살려내어 회복된 세상을 다스리게 하실 그때를 예견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을 통해서 분명해졌기를 바란다.
‘영혼 구원’과 ‘이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서로 분리된 것은 성경이나 복음의 결과가 아니라 서구 세계 안에서 성경과 복음이 문화적으로 속박된 결과다.
시간-공간-물질은 실재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실재의 지역 사회가 형성되며, 어려운 결정들이 내려지고, 학교와 병원이 복음의 ‘지금, 이미’를 증언할 때 경찰과 감옥은 ‘아직’을 증언하는 곳이다. 또한 국회와 시의회에서부터 동네 순찰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더 큰 지역 사회의 이익을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곳이다. 그 지역 사회에 무정부 상태가 오면 언제나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 혹은 사회적으로도) 힘을 행사하는 자가 이기게 될 것이고, 약하고 힘없는 자들은 언제나 보호가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정치적·사회적 구조도 창조주의 구속 계획 속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부활 메시지에 의해 회복된 교회는 바로 그 시간-공간-물질 안에서 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그곳을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주되심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 이루어지는 자리로 앞장서서 만들어 나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 세상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이 세상으로 들어가는 교두보로서 신성한 공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교회라면, 지성소에서 예배를 드리고는 곧바로 시의회의 의원실로 가서 도시 계획의 문제에 대해서, 건축물의 조화미와 인간미에 대해서, 녹지에 대해서, 도로의 교통 체계에 대해서 그리고 (특히 모든 면에서 도움이 필요한 시골 지역들의) 환경 문제와 창의적이고 건강한 농업 기법과 자원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논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내가 주장한 것처럼, 온 세상이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땅인 것이 사실이라면, 그 땅이 못쓰게 되어 버렸고 손상되어 있는 한 우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교회가 해야 하는 선교의 ‘추가적’ 부분이 아니라 핵심적 부분이다.
예수님이 모든 시간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교회는, 편지나 서류에 날짜를 쓸 때마다 그냥 조용히 축하하지 않을 것이고, 일요일을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축하하는 날로 지키기 위해서 가능한 노동을 쉬려고만 (그리고 칠일 내내 일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기만) 하지 않을 것이며, 예배와 노동의 적절한 리듬으로 자신의 삶을 정돈할 방법만을 찾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교회는 사무실과 가게의 노동 리듬에, 지역 의회에, 국가 공휴일에, 그리고 모든 공공 생활에, 지혜와 신선한 인간적 질서를 가져오려고 노력할 것이다.
시간을 하나님의 좋은 선물로 회복하는 것은 교회가 해야 하는 선교의 ‘추가적’ 부분이 아니라 핵심적 부분이다.
그리고 물론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이 물질의 세계를 다시 한 번 붙드시고 자신의 인격과 현존으로 그것을 변화시키셨으며, 언젠가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그 세계를 자신의 지식과 영광으로 채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시는 하나님을 성례전 안에서 그리고 성례전을 통해서만 축하하려하지 않고, 세례와 성만찬에 이어서 하나님의 치유하시고 변화시키시는 현존을 실재 생활의 물리적인 문제들 속에서 실현하려 할 것이다.
교회가 시간-공간-물질의 관점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이와 같은 방식이 내가 앞에서 사용한 정의와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범주에 꼭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전도와도 직접 연관이 된다. 교회가, 예수님 안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서 더 나아가 변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실재 세상을 바꾸는 일들을 하게 된다면, 또한 예수님의 식탁에서 밥을 먹는 자들이 가난과 기아를 없애는 일에도 앞장서는 자들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면, 성령이 자신을 통해 일하시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상처받고 망가지고 수치를 당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더 많은 사랑과 인내를 발휘한다고 인정받게 된다면 사람들은 ‘종교에는 관심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할지라도 자신이 참여하고 싶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면,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게 전파되고 그 말씀이 알아서 제 할 일을 할 것이다. 선교는 교회 전체의 일이고, 언제나 해야 하는 일이다. 모두가 서로에게서 지지와 격려를 받아야 한다. 모두가 예배의 삶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로부터 자양분을 받아야 한다. 또한 그 교회는 예수님의 친구들이 이 세상에서 자신이 받은 사명을 따르다가 다시 예배드리러 돌아올 때 자신의 자양분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활동의 상당 부분은,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 그리고 그들이 종종 아주 잘하고 있는 일과 자연스럽게 중복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상하고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모든 이원론과는 반대로)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주시고, 이 세상에 자신의 증인들을 남겨 두신 것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말이다.
기독교적 희망의 근본적인 왜곡은 현재의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악이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정적주의에 있다.
교회는, 타협하지 않으면서 협력하고 이원론에 빠지지 않으면서 대립할 줄 아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바깥 세상에서 이미 좋은 일들이 행해지고 있고 우리는 거기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지만, 복음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도록 요청받을 수도 있는 지점을 늘 경계해야 한다. 바깥 세상에서는 나쁜 일들도 일어나고 있고 우리는 언제나 그것에 반대해야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위대함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한 발 물러서는 단순한 이원론자들이 되어버리는 지점 또한 늘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21세기라고 하는 실재 세상에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다.
나는 ‘선교 중심의 교회’가 희망이 중심이 되는 선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진정한 기독교의 희망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고, 타락과 부패와 죽음을 극복하시고, 온 우주를 자신의 사랑과 은혜와 권능과 영광으로 채우시는 것에 대한 희망이라고 말했다. 나는 또한 이와 같은 선교의 일을 정말 효과적으로 하려면, 하나님이 시간-공간-물질을 회복하시는 것에 교회의 삶이 진정으로 그리고 기쁘게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복음에 나타난 우리의 희망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고, 창조의 회복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의 목표인 동시에 부활을 통해 이미 이루어진 성취임을 깨닫고, 그러한 궁극적인 목표의 예견으로써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미 성취하신 일의 이행으로써 정의와 아름다움과 전도의 일을 하고, 공간-시간-물질을 회복하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정한 사명으로 가는 길이고 그 사명에 의해서 또 그 사명을 위해서 교회를 형성하는 길이다.
물론 이 말은, 이 사명을 위해 더 큰 세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삶에서도 똑같은 것을 살아내고, 모방하고, 경험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적인 사명을 수행하지 않는 사적인 경건성은 궁극적으로 정당화될 수가 없다. 이것은 자신이 삶에서 받는 도전-즉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주되심 그리고 성령의 능력의 도전-을 피하기 위해서 사회적·문화적 혹은 정치적 영역에서의 활동을 연막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복음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다른 것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기독교 영성의 기본 훈련, 즉 교회가 정의, 아름다움 그리고 전도라는 이 시간-공간-물질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자양분을 얻는 훈련들이, 이 놀라운 희망-예수님의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고 온전하게 다 이루어진 하나님의 새 창조를 예견하는 희망-의 맥락에서 볼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부활과 영성
새로운 탄생과 세례
예수님의 부활은 이 새로운 탄생과 그에 따른 결과를 가져오는 직접적인 도구다. 부활절에 일어난 일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 이 세상에 새로운 실재가 시작되었다. 거룩하게 우리 자신의 부활을 소망하며 사는 새로운 종류의 삶이 내면과 외면 모두에서 시작되었다.
성례전 신학.
예수님의 부활은 우주적 역사와 실재에 새로운 상태를 가져왔다. 하나님의 미래가 현재로 들어왔고, (간혹 꿈을 꿀 때 우리가 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밖에서 지켜 보면서도 동시에 그 사건 안에 들어가 있는 경우처럼) 성례전은 단순히 새 창조의 실재를 보여 주는 징표가 아니라 새 창조의 일부가 되었다. 따라서 세례의 사건-그 행위, 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동작, 새 옷-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가족의 구성원이 되는 것(모든 탄생은 구성원이 되는 자격을 준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이정표가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그 구성원이 되는 길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구성원이라는 자신의 특권을 믿고, 주제넘게 행동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물속에 담그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행위에는, 실제로 옛 창조에 대해서는 죽고 새 창조에 대해서는 살아나는 과정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해서 탄생한, 아직은 구속받지 않은 세상에서의 새로운 삶에는 모든 위험한 특권과 책임이 함께 따라온다.
세례는 예수님 자신이 확립하신, 하늘과 땅이 교차하는 지점, 새 창조와 부활의 생명이 옛 창조 안에 나타나는 지점 중 하나다. 세례와 부활절을 연결시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올바른 기독교적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세례는 모든 진지한 기독교적 삶,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모든 행위의 근본이 되는 사건이어야 한다.
성만찬
성만찬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미래의 영역이 분명하게 작용한다. 떡을 떼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게 되고, 그분을 기억하며 그 떡을 뗀다. 그 순간 우리는 최후의 만찬 식탁에 둘러앉은 제자들이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춘다면 절반의 진실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만찬에 대한 이해를 진척시키려면 우리는 그것을 단지 하나님의 과거가 (혹은 예수님의 과거가) 우리의 현재로 확장된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가 우리의 현재로 들어온 것으로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단지 오래 전에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현존을 축하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변화된 새 세상인 새 창조 안으로 앞서서 들어가신 분으로서 그리고 그 새 창조의 원형으로서 살아계신다. 떡과 포도주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다. 성만찬 때 우리는 약속의 땅에서 딴 열매를 맛보는 광야의 이스라엘과 같다. 미래가 현재로 들어와 우리를 만나는 것이다.
창조계가 자신의 구속을 기다리며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옛 창조의 일부가 이미 변화되었고 부패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이제는 죽음이 건드릴 수 없는 생명을 가진,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육체다. 예수님이 앞서서 하나님의 새 창조 안으로 들어가셨고, 예수님 자신이 마련해 주신 렌즈-즉 그분이 배신당하던 날 밤에 함께 하셨던 식사-를 통해서 그분의 죽음을 돌아볼 때 우리는 창조의 상징인 떡과 포도주를 통해서 그분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상징은 그리스도 이야기 안에, 새 창조의 사건 안에 취합되어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과 그 세상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는 구원의 사건을 전달하는 운반체가 된다.
이와 같은 틀 안에서 우리는 하늘과 땅이 새롭게 만들어질 때의 만찬, 즉 어린 양의 결혼식 만찬을 예견하는 사건으로서 성만찬을 가장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몇몇 전례들이 이것을 표현하려고 했지만 슬프게도 단순히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후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요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성만찬은 하나님의 미래, 강림의 미래가 우리의 현재 시간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이다. 모든 성만찬은 작은 부활절일 뿐만 아니라 작은 성탄절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에 대한 약속은 우리에게 성만찬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무엇보다도 종말론적인 틀을 제공해 준다. 현재를 사는 우리를 지탱시켜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오는 희망을 박탈하지 말자.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현재의 세상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적 삶에 동력을 주는 토대를 부인하는 것이다.
기도
기도에는 우리가 저 너머를 향해 열려 있다고 말해 주는 무언가가 있다.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능력을, 우리 자신의 인격을 능가하는 어떤 인격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기도가 그렇다. 적어도 그것이 기도의 출발점이다.
주기도문
성경
구약과 신약은 모두 창조와 새 창조의 이야기다. 그 틀 안에서 그것은 또한 언약과 새 언약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 그리고 새 창조의 백성으로서 성경을 읽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성경을 획일적이고 균일한 규칙이나 교리의 목록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그 이야기에 동참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발견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떻게 끝나도록 되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사도행전의 끝과 계시록의 마지막 장면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살고 있다. 성경을 이해하고 싶고, 성경이 우리를 통해서 일하는 것을 보고 싶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전체적인 이야기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의 능력이 자신의 뜻을 펼치도록 허용해야 한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새 창조의 관점에서 읽을 때 비로소 최상의 뜻을 드러낸다.
성경은 성경을 읽는 교회와 그룹과 개인들 안에 새 창조의 일이 일어나게 하려고 쓰인 것이다. 즉 성경 안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들 안에, 성경에 의해 자신들의 삶을 형성해 가는 사람들 안에 새 창조의 일이 이루어지게 하려고 쓰인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창조와 새 창조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성경에 영감을 준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하여 인간의 삶과 공동체에 새 창조를 이루는 도구다.
성경의 전체 내러티브는 새 창조, 즉 부활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으로 끝을 맺고, 계시록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결말을 맺는다고 놀랄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야기해 온 것이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이것이 바로 ‘다른 복음’이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깊은 차원의 이유다. 초대교회가 권력 유지와 통제를 위해 재미있고 전복적인 내용들을 배제시킨 것이 아니다. 그 책들은 더 이상 새 창조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 대신 사적이고 분리된 영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오늘날 서구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이 ‘다른 복음’을 갑자기 열렬하게 환영하는 현상은 진정한 기독교의 재발견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회피하려는 절박한 시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새 창조는 비록 궁극적으로는 훨씬 더 흥분되는 것이지만 영지주의적 도피주의보다 훨씬 더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선포한 결과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게 되는 것처럼 그리고 그분의 구원하시는 주권에 의해 그들의 삶이 변화되는 것처럼 창조와 새 창조의 이야기, 언약과 새 언약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단지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그 내러티브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는 그들을 그 안으로 초대하고, 그들을 그 안으로 끌어들이며, 그들이 그 이야기의 일원임을 확신시켜 주고, 그 내러티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들을 준비시킨다.
거룩
미래에 사실로 나타날 것은 반드시 현재에도 사실로 나타나기 시작해야 한다.
이 세대를 따르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미 시작된 종말론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 신자의 도덕적 삶 안으로 들어올 때의 모습이다. 그것은 변화의 문제였고, 우선 마음부터 변화되어야 했다.
부활이-예수님의 부활과 우리 자신의 부활이-기독교적 행동의 궁극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부활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생명이 이 세상 안으로 온전히 뚫고 들어온 사건이었다. ‘기독교 윤리’는 바로 그 새 창조를 축하하고 구현하는 생활양식이다. 기독교적 거룩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 안에서 완벽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들어가는 세상,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서 양식을 얻는 세상 말이다.
부활하신 주님께 진실하려면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악기를 다시 조율해야 하고 동료 음악가들 곁에서 다시 연습해야 한다.
사랑
현재의 우리 삶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가 앞으로 가지게 될 모습과 비교할 때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모습을 부분적으로만 가지고 있을 뿐이며, 마찬가지로 그러해서는 안 되는 모습도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미래에 완전하게 될 사람으로서 현재를 살아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완전함의 징표, 그 미래의 온전함의 징표, 한 실재에서 다른 실재로 넘어가는 다리가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이 시는 어조나 내용 모두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말없이 고동치는 심장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현재의 세계 질서 안에서 새로운 세계 질서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미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현재로 들어 왔고, 모든 사람에게 그 미래의 백성이 되라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백성이 되라고, 하나님의 미래의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 현재에 다시 만들어지는 백성이 되라고 요청하고 있다. 우리의 현재 경험은(심지어 우리의 현재 기독교적 경험도)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그 노래 전체를 들어 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것이 어떤 곡인지를 알고 있고 언젠가는 예수님과 함께 그 곡에 맞춰 노래를 부를 것임을 알고 있다. 온갖 불완전함을 안고 있는 우리의 현재 경험은, 언젠가는 우리가 잠에서 깨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결국 부활의 요점이 아니던가.
사랑은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예수님이 사용하신 언어이며, 그분과 대화하려면 우리도 그 언어를 배워야 한다. 사랑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며,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그 맛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계가 노래하도록 하나님이 쓰신 음악이며, 우리는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 때를 대비해서 지금 그것을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 그것은 부활의 삶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당장 그분과 함께 그리고 그분을 위해 그 삶을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희망이 주는 놀라움의 핵심이 바로 사랑이다. 부활이 우리를 촉구하는 대로 진정한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역으로, 이러한 사랑의 규칙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희망하는 방법을 더 깊이 배우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용서하라는 복음서의 명령-물론 이것은 또한 내가 앞에서 이야기한, 빚을 감면해 주라는 명령이기도 하다-이면에 깔려 있는 메시지다.
용서는 삶의 방식이며, 하나님의 삶의 방식이고,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만약 용서에 마음을 닫는다면 용서받음에 마음을 닫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어떤 기능을 차단하는 것인데, 그 기능이 하필이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게 해주는 바로 그 기능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참 기쁨과 참 슬픔을 경험할 수 있는 바로 그 기능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인내한다.
하나님의 제안과 요구는 두려운 것도 아니고 위협적인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온유한 사랑은 우리가 굴러 들어간 감옥, 용서의 제안과 요구 모두를 거절하는 사랑 없는 감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치 겁에 질린 새처럼 하나님의 요구가 우리를 완전히 부서뜨릴까 두려워하며 움츠린다. 그러나 우리가 결국 굴복하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석으로 밀어붙이셔서 결국 우리를 그 손으로 붙드시고 나면, 하나님은 무한히 온유하시며,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를 감옥에서 해방시키시는 것,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그러한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임을 알고 깜짝 놀랄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빛 가운데로 자유롭게 날아다니게 되면 어떻게 그와 똑같은 자유와 용서의 온유한 선물을 주변 사람들에게 제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기도로, 용서와 빚의 감면으로, 사랑으로 나타나는 부활의 진리다. 그것은 끊임없이 놀라운 일이며, 끊임없이 희망으로 가득 찬 일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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