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첫째,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이 특히 자신의 피조물 중 하나이자 자신의 형상을 반영한 인간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이 세상의 질서를 만드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라는 개념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롭고 창조적이며 사랑 넘치는 현존과 능력이 인간을 통해 이 세상에 반영되게 혹은 ‘형상화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의 프로젝트에 하나님의 청지기로 참여시키셨다. 그리고 반항과 타락 이후 하나님은, 예수님의 사역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인간을 준비시킨 다음 그 프로젝트를 되살리는 일을 돕게 하실 거라는 사실을 복음의 메시지에 처음부터 집어넣으셨다.
두 번째 사실은 최종적 나라와 그것을 기다리는 현재의 상태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일은 물론 하나님이 하시는 최고의 행위인 새 창조이며, 첫 창조를 제외하고는 예수님의 부활이 그 새 창조의 유일한 원형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으실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실 것이다. 우리가 그 위대한 일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최고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복음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그리고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고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힘을 얻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현재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은 바로 그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다시 한 번 고린도전서 15:58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한다. 즉 우리가 주 안에서 하는 일은 헛되지 않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의 일부가 될 일을 우리는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랑과 감사와 친절의 행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즐거워하면서 만들어 낸 모든 미술 혹은 음악 작품, 심한 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가 글을 읽거나 걸을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 보낸 모든 시간, 인간들을 위한 그리고 인간이 아닌 피조물들을 위한 돌봄과 양육, 위안과 지지의 모든 행위, 그리고 물론 모든 기도와, 성령의 인도를 받은 모든 가르침과,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고, 타락보다는 거룩을 수용하고 구현하며, 예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존경받게 하는 이 모든 행동들이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통해 언젠가 하나님이 만드실 새로운 창조에 포함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교 논리다. 하나님이 자신의 놀라운 세상을 다시 창조하시는 일은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 때 신비롭게도 지속되는데, 그 의미는 우리가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하고 있는 일이 낭비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서 내내 지속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세상에서 더 향상될 것이다.
정의와 기쁨과 온 세상을 위한 희망이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부활절 아침 예수님이 그 무덤에서 걸어 나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음을 나는 안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의 추종자들을 부르셔서 그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살라고, 그리하여 지금 여기에서 새 창조의 사람들이 되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징표와 상징들을 나타내라고 하신다는 것을 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은사는, 우리가 현 세대 안에서 하나님의 회복된 창조를 나타내는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징표들을 보여 주라는 부름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회복의 노동과 징표를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영지주의가 늘 그러는 것처럼 죄와 죽음의 세력과 공모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지는 말자.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라. 즉 하나님의 전적인 새 창조라는 놀라운 희망에 지금 참여하라는 그 부르심 말이다. 하나님의 최종적 나라는 건축가 자신이 직접 부여하는 변화와 회복의 새로운 선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삶에서 우리가 하는 일과, 하나님이 모든 것을 모으셔서 변화시키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궁극적인 미래의 삶 사이에 있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보여 주기에는 충분하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하는 일은 ‘헛되지 않다.’ 그것이 바로 모든 정의와 자비의 행위, 모든 생태학 프로그램, 하나님의 지혜로운 청지기의 이미지를 창조계에 반영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에 필요한 위임 통치령이다. 새 창조에서는 동산을 돌보라는, 옛 인간이 받은 위임 통치령이 극적으로 재확인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창조의 선함을 재확인하는 것이며, 성령의 은사는 우리를 원래의 온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서 그 위임 통치령을 성취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하는 일은 그 일이 원래 속해 있던 궁극적 계획으로부터 온전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것을 교회의 사명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실’ 그 때의 궁극적 상태,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그 때의 상태를 미리 보여 주기 위해서 현재 일해야 한다.
성경적 종말론에 대한 올바른 비전은, 교회의 사명에 대한 신선하면서도 논쟁적인 비전을 발생시킬 수 있으며 또한 발생시켜야만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창조는 구속되어야 한다. 즉 공간이 구속되어야 하고, 시간이 구속되어야 하고, 물질이 구속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시간-공간-물질의 창조계를 보고 “심히 좋다”고 하셨고, 비록 현재의 타락과 부패로부터 이 세상을 구속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변화를 의미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창조의 구속이라는 의미가, 하나님이 시간-공간-물질에 대해서 “그래, 애썼어. 그런대로 좋았지만 이젠 상태가 나빠진 게 분명하니까 그냥 포기하고 대신에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 없는 세계로 가자”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정말로 자신이 창조하신 시간-공간-물질의 세계를 거절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속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부딪히게 된다. 그 구속, 그 치유 그리고 그 변화를 지금 우리가 축하한다면,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최종적 의도를 제대로 예견한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겠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지적하겠다. 현재의 세계가 존재하는 한 창조주 대신에 창조물을 예배할 우상 숭배의 위험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시간-공간-물질이 우상을 만들어 내는 원료이기 때문에 일부 경건한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예배에 사용되는 모든 물건, 예배 때에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 모든 ‘거룩한 장소’는 곧바로 의심했다.
정당한 반응이다. 우상 숭배라는 것이 실제로 있고 우리는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정말이지 연민 없이 없애버려야 한다. 그러나 우상 숭배는 언제나 선한 것의 왜곡이다. 욕구와, 욕구를 부추기는 것을 숭배하는 탐심은, 선한 창조물을 제대로 즐기라고 하나님이 주신 본능을 왜곡한 것이다. 따라서 우상 숭배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시간-공간-물질을 그것 자체로 악하거나 위험한 것으로 여기고 거절하는 이원론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창조질서를 예배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제대로 즐기고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시간-공간-물질 안에서 살고, 그것을 즐기고 사용하는 일은 언제나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준으로 측정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시간-공간-물질을 공유하셨고, 모든 우상 숭배와 죄를 심판하는 죽음을 거치셨다. 또한 부활을 통해 시간-공간-물질이 그분의 몸 안에서 회복되었고, 그럼으로써 모든 것의 궁극적 회복이 예견되었다. 우상 숭배의 위험과 그것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앞으로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내용의 기본 규정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이행하고 그럼으로써 최종적인 새 창조를 예견하며 준비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정의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첫 번째 주요 범주는 정의다. 나는 이 단어를,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뜻하는 약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 하나님의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보다도 (십자가에서 악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승리에 이어) 그분의 부활 안에서 영광스럽게 성취되었고, 이제는 이 세상에서 이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현재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이미 현재에 침입한 것이고, 현재의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기독교의 사역이 부채 면제와 생태학적 책임에 대한 캠페인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 다음 구절들에서 하나님이 하실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즉 하나님이 노예생활을 하는 자기 백성의 외침을 들었고, 그들을 구출해서 약속하신 땅으로 데려가기 위해 내려오실 것이라는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예수님과 바리새인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살았던 1세기 사회에서 부활의 교리는 혁명적인 교리였다. 그 교리는 새로운 출애굽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결심을 보여 주었다. 유배로부터의 참 귀환, 억압과 노예생활로부터의 위대한 해방, 이스라엘이 갈망하던 그 해방을 이야기했다.
세상은 이미 뒤집어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활절의 요지다. 그것은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무언가 다른 일을 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미래, 세상을 바로잡는 미래를 나사렛 예수를 통해 현재로 가져오셨고, 그 미래가 현재에 더 많이 관련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바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곧 이어서 빵과 용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지구촌에서 정의의 문제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는 부분이다.
초기 그리스도인의 보편적 신앙은,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자 이 세상의 참 주님으로 이미 증명되셨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것이 바로 기독교 이야기의 전체 요점 중 하나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기를 기도한다면, 이 세상의 불의에 만족하며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두 번째의 관점처럼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바로잡는 일은 실제로 최후의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새 창조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행위 없이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첫 번째 관점의 오만과 승리주의를 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임무 중 하나라는 첫 번째 관점에 동의해야 하며, 따라서 노력하는 것조차도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두 번째 관점의 패배주의는 거절해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믿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미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다고 믿어야 하며, 인간이 보기에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고 믿어야 한다.
성경을 밀쳐놓으면 이교적 제국과 공모하게 될 뿐이며,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억압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부인하는 격이 된다.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부활을 부인하고 로마를 지지했던 것이다.
나는 부활절에 대한 정통적 입장을 변호하면서,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정말로 공격하는 것은 부활절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보기에 부활절을 변호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보여 주는 도피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정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교훈을 배우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가 주는 비극적 교훈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과 거기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약속은 변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며 그 프로그램에 힘을 제공해 준다.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성령의 새로운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순종하여 현재의 삶에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를 가져와야 마땅하며, 비록 우리가 그 때가 오기 전에는 결코 완전하고 온전해지지 않을 것이지만 앞으로 올 삶을 예견하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6장의 교훈이다. 로마서 8장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시게 될 때까지는 이 세상이 완벽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우리 모두가 동의하지만, 궁극적인 그 때를 예견하며 전 세계적인 공동체로서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는 도전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고 우리에게 그렇게 할 힘을 준다. 그와 같은 희망이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로 인한 놀라움을 가라앉히고, 기도와 지혜로 우리의 임무를 해 나가자.
아름다움
창조와 새 창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심미적인 인식, 심지어는 창조성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고 회복할 수 있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아름다움은, 거의 영성과 정의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 자신이 창조하는 자가 될 수 있는 이유, 적어도 생명을 낳는 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을 낳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 물론 대개는 자녀를 출산함으로써 그 일을 하지만 다른 수많은 방법을 통해서도 새로운 생명을 낳을 수 있는 그 능력은 창세기 1-2장에서 인류가 받은 명령의 핵심이다.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인공적 가공물의 생산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축하하는 것은 창조계의 청지기가 되라는 부르심의 한 부분이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은 것이 청지기 사명의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진짜 예술은 그것 자체가 창조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이며, 창조계의 아름다움은 또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함의한다.
창조계는 선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은 아니다. 창조계는 아름답지만 현재의 그 아름다움은 일시적이다. 창조계는 고통 가운데 있지만, 그 고통은 하나님의 마음 중심에 받아들여져 새로운 탄생을 위한 고통의 한 부분이 된다. 예술은 창조계의 아름다움에 반응하며, 그것을 표현하고, 모방하고, 강조하고자 노력하는데, 그러한 아름다움은 창조계 자체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창조계에 약속된 것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당위적 모습, 혹은 현재적 모습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갖추어질 앞으로의 모습을 묘사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이 새 창조의 패러다임으로서, 새 창조의 첫 번째 예이자 원동력으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그 못 자국이 단지 예수님의 손과 발에 남아 있는 가시적인 흔적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표시였다. 예술이 이 세상의 상처와 부활의 약속 모두를 다룰 수 있게 되고 동시에 그 두 가지 모두를 표현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법을 배우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비전, 새로운 임무를 향해 가는 길에 서게 될 것이다.
십자가 발치에서 그리고 빈 무덤 앞에서 하는 묵상과 기도로 시작되는 상상력, 부활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운 창조계를 심판하시면서 동시에 다시 긍정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분별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최상의 예술은 단지 존재하는 방식에만 사람의 이목을 끄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게 될 방식에도 사람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 땅에 충만하게 될 그 때의 모습 말이다. 이것은 여전히 놀라운 희망이며, 이러한 희망과 놀라움 모두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들일 것이다.
전도
새로운 세상의 징조들을 현재에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정의와 아름다움과 그 외의 수많은 방식들을 통해(여기에서는 그것을 다 다룰 자리가 없고, 당연히 정의와 아름다움은 각각 더 자세히 다룰 필요가 있다) 새 창조에 참여하는 일의 핵심에는 모든 아이, 여자 그리고 남자를 개인적으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복음이 있다.
하나님은 기법과 영리함이 아니라 기도와 신실함의 결과로 일하신다.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주님이시라는 강력한 선언, 악의 세력은 패배당했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강력한 선언에 있다. 이 세상의 존재 방식에 대한 사실로서 제시되는 이러한 선언은 다른 모든 것의 토대다.
교회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사안들에 대해서 일을 하고 있다면, 만약에 교회가 지구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으로 이 세상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그리고 그 창조가 부패로부터 구출되었음을 음악과 미술을 통해서 활기차게 축하하고 있고, 거기에 덧붙여서 교회의 내적 삶이 그 새 창조의 징조를 모든 면에서 보여 주면서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 선언은 상당히 그럴듯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새 창조의 신학 안에 복음이 뿌리를 내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때 사람들은 자기 안에 불길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그 선언이 사실임을 깨닫게 되고, 자신들의 믿음을 발견하게 되고, 온갖 것들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과 느낌이 변하는 것을 보게 되며, 예수님의 현존이 실재가 되고, 성경을 읽는 일이 흥분되고, 예배와 교제를 아무리 해도 충분하지가 않다고 느끼게 된다. 이러한 순간, 혹은 이러한 과정(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순식간에 일어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을 일컫는 다양한 단어들이 있다. 가던 길의 반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돌아선다는 의미의 회심,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는 중생, 예수님의 이름과 성격을 부여받은 가족에 참여한다는 의미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다’ 등의 말들이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러한 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라고 말한다(롬 6장, 골 2-3장). 혹은 과거의 삶을 뒤로 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징표이자 의미로서 세례의 물을 통과하는 것이라고, 혹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려온 새 창조의 큰 그림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은 ‘새 창조’의 살아 있는 작은 부분이라고.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이미 시작된 새 창조 그리고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자신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고 그 새로운 세상에서 함께 살도록 우리를 일으키실 때 완성될 새 창조의 한 부분이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첫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선한 세상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부패와 각 개인의 모든 부패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는 것이다. 때로 회심자들은 자기 자신과 이전에 자기 자신을 붙들고 있던 삶의 습관과 방식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기 위해서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닌 것들(예를 들어 술과 같은 것)을 분명하게 거절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새 창조’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땅은 잊어버리고 하늘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문제를 피할 수 있다.
둘째, 전도를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주되심 그리고 그에 따른 새 창조의 선언이라는 관점에서 보게 되면, 새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혹은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이 회심의 가장 핵심적 사건이고 그 관계만이 중요한 것이라는 함의를 처음부터 피할 수 있다. (현재의 대중적인 기독교 음악들은 이 점을 지나치게 자주 언급하는 듯하다. 마치 예수님이 나의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의 주된 요소인 것처럼 말이다.) 전도와 그에 따른 모든 회심을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새로운 회심자들이 처음부터 자신이 하나님 나라 프로젝트의 일부임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프로젝트는 ‘나와 나의 구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전 세계적인 목적을 수용하는, 다시 말해 그 목적에 의해 수용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회심’과 함께 그 전체 프로젝트에 기여할 당신의 소명도 찾게 될 것이다.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이러한 소명이 드러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그것이 회심의 순간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세 번째로, 전도와 회심을 새 창조의 맥락에 놓게 되면, 예수님의 주권적 주되심 그리고 예수님의 구속적 주되심의 관점에서 메시지를 들은 회심자는 결코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한 태도가-인간의 번성과 하나님의 영광을 감소시키는 것은 거절하고 그것들을 강화시키는 것은 수용하는 태도가-단지 선택의 문제라거나, 다소 이상한 규칙과 규정들을 이해하는 차원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말 그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지, ‘예수님’라고 적혀 있는 칸에 표시를 하고는 마치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처럼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갈보리에서의 승리와 부활절의 승리에서 비롯되는 예수님의 주되심과 새 창조의 메시지를 전하게 되면, 예수님이 주님이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의미가 예수님에 의해 자신의 인생 전체가 교정되도록 허락한다는 의미임을 처음부터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허락한다는 것은 그 일이 때로 고통스럽겠지만, 그것이 권위 없고 꽉 막힌 인간 존재로 가는 길이 아니라 현재의 진정한 인간적 삶 그리고 미래에 완전하고 영광스럽게 부활할 인간적 삶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기독교 윤리를 기독교적 희망의 한 표현으로 이해하면 기독교 윤리가 오히려 더 온전해질 것이다.
나오는 말
따라서 교회의 사명은 반드시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대로 미래의 희망을 반영해야 하고 그것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 개의 영역, 즉 정의, 아름다움 그리고 전도의 영역을 하나님이 온 세상을 궁극적으로 바로잡으실 것을 예견한다는 관점에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서로 긴밀하게 들어맞을 뿐 아니라 사실 그것들 모두가 더 큰 전체, 즉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좋은 소식과 함께 오는 희망과 새로운 생명의 메시지의 일부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일상의 삶에서 희망의 일을 할 수 있는 근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회의 임무 중 하나는, 그 같은 부당함의 의식을 이해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 줄 뿐만 아니라 준비가 되면 그것을 기도로도 표현하도록 돕는 것이다.(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면 시편의 많은 기도들이 갑자기 절실하게 와 닿는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 다음 교회의 임무는 지역 공동체 전체와 함께하는 일들이다. 즉 더 나은 집과 학교와 지역 사회 시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도록 격려하고, 지역 정부와 시의회를 대상으로 캠페인을 벌이고 그들을 설득해서 함께 일하는 등 모든 차원에서 희망을 키우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의 논증 중 하나는, 그러한 일들이 복음의 놀라운 희망, 즉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일들은 이 희망의 직접적인 결과다. 즉 ‘죽음 이전의 삶’에 대한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위험에 처한 지역 사회에 새 창조의 메시지를 전하면 그것은 놀라운 희망으로 다가온다. 현재 세상의 아름다움이 존속되면서도 초월하여 아직은 오지 않은 세상의 아름다움으로 변화될 것이고, 현재의 고통이 치유되는 것도 반드시 그 아름다움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는 놀라운 희망이다. 과거에 교회가 했던 역할 중 하나는 그리고 다시 한 번 교회가 해야만 하는 역할은, 마을 술집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일에서부터 지역 초등학교에서 연극을 하는 일까지, 화가와 사진가의 워크숍에서부터 정물화 수업까지, 교향악단의 연주회에서부터(포로 수용소에서도 연주회를 했으니 우리는 얼마나 더 창의적일 수 있겠는가?) 버려진 나무에 조각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에서 아름다움의 삶과 아름다움의 의미를 양성하고 지키는 것이다. 교회는 새 창조에 대한 희망을 믿는 가족이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성이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온 지역 사회로 뻗어나가기 위한 거점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아름다움처럼 언제나 놀라움으로 다가오는 희망을 가리켜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전도는 교회가 정의의 일(지역 사회 안에서 잘못을 바로잡는 일)과 아름다움의 일(창조의 영광과 앞으로 드러날 영광을 강조하는 일)에 자신을 바친다면 가장 잘 이루어질 것이며, 그러한 전도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너희가 보여 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새로운 세상이 있는데 그 세상은 이미 시작되었고, 치유와 용서와 새로운 시작과 신선한 에너지로 작동하는 세상이라고?” 교회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을 따를 때, 또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써 새로운 생명, 새로운 방식의 삶, 그리고 삶을 위한 새로운 열정을 얻게 될 때 비로소 그러한 세상이 임하게 된다고 교회는 대답할 것이다.
희망이 가장 부족한 곳은 산업화로 인한 황무지나 아름다움을 빼앗긴 황폐한 풍경이 아니라 돈과 고급 문화가 넘쳐나고 믿음, 소망, 사랑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이 너무도 풍족한 곳이라고 사람들은 지적한다. 그러한 곳에도 그리고 그곳에 사는 슬픈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는 머나먼 나라에서 오는 기쁜 소식, 놀라운 희망의 소식이다.
이것은 교회가 어느 장소에서건 어느 세대에서건 그렇게 살고, 말하고, 현실화하라고 부름 받은 기쁜 소식-정의와 아름다움의 기쁜 소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기쁜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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