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연옥
첫째, 부활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이것이 바로, 죽으면 모든 순간이 현재인 영원으로 넘어가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가톨릭과 개신교, 동구와 서구의 모든 주류 정통 신학자들의 공식적인 관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특히 구속받은 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나타내는 말로 ‘천국’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비록 중세와 그 이후의 경건주의에 의해 그 용법이 크게 대중화되기는 했지만 본의를 심각하게 오도하는 것이며 기독교적 희망에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궁극적인 목적지는 죽음 이후의 ‘천국행’이 아니라 육체가 부활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요점은 단순히 우리 자신의 행복한 미래가 아니라-비록 그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반영함으로써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부활은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이다.
둘째, 신약성경에는 천국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범주적인 구분이 있다고 가정할 만한 근거가 없다. 초기의 기독교 저작들을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인’이며 거기에는 혼란에 빠지고 죄에 빠진 고린도 교인들도 포함된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금, 은, 보석으로 집을 짓는 그리스도인 일꾼들과 나무, 풀, 짚으로 집을 짓는 그리스도인 일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한쪽 부류의 사람들은 곧바로 ‘천국’으로 가고 다른 한쪽 부류의 사람들은 연옥으로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두 부류 모두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목적지는 같다. 그러나 첫 번째 부류는 영광스럽게 도달할 것이고, 두 번째 부류는 간신히 도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기초하고 있는 강령에 진실하다면 살아 있건 떠나 있건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인’으로 여겨야 하며, 모든 죽은 그리스도인을 그렇게 여기고 대우해야 한다고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따라서 나는 연옥이 어떤 장소, 시간 혹은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후대에 서구에서 도입한 것이었고, 그것의 소위 신학적인 근거들도 이제는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뛰어난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자신에 의해 의문시되고 있다. 개혁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육체의 죽음 자체가 죄된 인간의 파괴다. 죽음은 그 자체로 죄의 상태인 모든 것을 없애 버린다. 이것은 마술이 아니라 건실한 신학이다. 죽음을 통과하고 나면 더 이상 정화할 것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바울은 이 본문과 또 다른 본문에서 사실 연옥의 기능을 해야 하는 것은 현재의 삶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사후의 어떤 상태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고난이 우리가 영광스런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계곡이다. 연옥의 신화는 현재를 미래에 투사한 풍유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면, 우리가 그분의 몸에 속한 세례받은 구성원이라면, 우리는 바로 지금, 생명의 출입문을 형성하는 고난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낙원
이제 나는 네 번째로 다음의 관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즉 우리를 떠나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같은 상태, 즉 복된 안식의 상태에 있다는 관점이다. 그 상태를 때로는 ‘잠’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의식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잠’은 사람의 참 존재는 지속되는 반면 우리의 육체는 ‘죽었다’는 의미에서 ‘잠들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는 분명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하게 되는 최종적 운명의 상태가 아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운명은 육체의 부활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상태는 죽은 자들이 육체가 부활하게 될 그 날을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의 의식적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식적 현존 안에 굳건하게 붙들려 있는 상태다.
이 세상을 떠나 있는 성인들과 아직 이곳에 있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함께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게 된다.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이다. 우리가 성만찬을 가질 때 그들은 천사와 천사장들과 더불어 우리와 함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을 위해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개혁가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불법화하려고 애를 쓴 이유는 그러한 행위가 연옥이라는 개념과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최대한 빨리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인식에서 벗어나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연옥이라는 개념을 배제시키고 나면 우리가 죽은 자를 위해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들과 함께 기도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연옥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원기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기쁨과 평화로 가득하기를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사랑은 기도로 이어진다. 그들이 죽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붙들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현재 ‘천국’ 혹은 (원한다면) ‘낙원’에 있는 사람들이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암시를 신약성경이나 초기의 기독교 교부들에게서 발견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대신해서 아버지께 중보하도록 ‘성인들’에게 기도해야 한다는 암시도 발견할 수가 없다.
초기 기독교 저술들에서 죽은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그러한 종류의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식의 암시는 전혀 볼 수가 없으며, 현재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함으로써 그러한 일을 하도록 격려해야 한다는 식의 암시 역시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와 성령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느 때든지 직접 하나님 앞에 기꺼이 나아갈 수 있다.
천국/낙원에 있는 교회는 승리한 교회면서 동시에 기대하는 교회다.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기억하는 적절한 시기 그리고 기독교의 진정한 희망을 나타내면서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시기는 한편으로는 부활절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성인의 날이다.
새 창조 안에 있는 궁극적 부활에 대한 희망을 붙잡고, 그 외에 ‘죽음 이후’의 질문들에 대한 우리의 모든 사고와 논의를 그 관점에 따라서 재정리하는 것이다.
희망을 넘어, 동정을 넘어
‘지옥’으로 번역되는 신약성경의 가장 일반적인 단어는 ‘게헨나’(Gehenna)다. 게헨나는 단지 관념이 아니라 실재하는 장소였는데, 옛 예루살렘 성의 남서쪽 모퉁이 바깥에 있는 쓰레기 더미였다. 오늘날까지도 그곳에는 ‘게힌놈’(Ge Hinnom)이라는 이름의 계곡이 있다.
여기에서 요점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게헨나에 대한 경고를 하실 때, 그들이 현세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다음 세상에서 불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하나님 나라의 경우처럼 지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지 다른 곳에서가 아니다. 동시대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메시지는 엄중한 것이었고,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정치적’이었다. 로마에 대한 무장 반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다는 가망 없고 반항적인 꿈을 버리지 않는 한, 로마의 거대한 세력은 크고, 욕심 많고, 무자비한 제국들이 자신들이 탐내는 자원을 가진, 혹은 자신들이 지키고 싶은 전략적인 위치에 있는 (특히 중동의) 작은 나라들에게 늘 해 오던 일을 계속 자행할 것이다. 로마는 예루살렘 자체를 끔찍하고 악취 나는 쓰레기 더미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예수님이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염두에 두셨던 가장 중요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비유는, 말 그대로 비유지 내세에 대한 실제적인 묘사가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비유들은 ‘아브라함의 품’과 같은 평범한 고대 유대교의 이미지를 사용하며,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세에서의 정의와 자비를 주장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데 무엇보다도 관심이 있으셨다.
심판-선하고 지지해야 하고 정당성을 입증받아야 하는 것은 이런 것이고, 악하고 정죄받아야 하는 것은 저런 것이라는 주권적 선언-은 혼돈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다. 악과 결탁하게 될까봐 ‘관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은 사실 많이 있다.
그러나 심판은 필요하다. 우리가 어리석게도 별로 잘못된 것이 없다고 결론 내리거나 신성모독적으로 하나님은 별 상관을 하지 않으신다고 결론 내리지 않으려면, 심판은 꼭 필요하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의 유명한 문구로 표현하자면, ‘포용’이 있으려면 먼저 ‘배제’가 있어야만 한다. 악이 규명되고 해결되어야만 화합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악하게 행동한 자들이 이 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화합도 포용도 있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결국에는 이 세상을 바로잡으실 것이다. 이 교리는 부활의 교리처럼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선하시다는 믿음에 의해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그 바로잡는 행위에는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물을 왜곡시키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일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손상시키는 모든 것이 제거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는 철조망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철조망에 의존해서 산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에는 자리가 없을 것이다.
‘철조망’은 무엇이든 끔찍한 일로 분류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나타낸다. 대량학살, 핵폭탄, 아동 성매매, 제국의 교만, 인간의 상품화, 인종의 우상화 등.
첫째, 그것은 전부 하나님이 아닌 것을 마치 하나님인 양 숭배하는 최초의 잘못인 우상 숭배에서 비롯된다. 둘째, 그러한 행동은 모두 첫 번째 원인에 따른 결과적 잘못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다. 결과적 잘못이란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인간 이하의 행동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다 반영하지 못하는, 온전히 자유롭고 참된 인간성이라는 ‘표적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신약성경은 그것을 일반적으로 ‘하마르티아’(hamartia), 즉 ‘죄’라는 말로 표현한다. (여기에서 보면 ‘죄’란 임의적인 규칙을 어기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 규칙이 여러 종류의 비인간적인 태도를 간략하게 묘사해서 보여 준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셋째, 이 우상 숭배와 비인간화가 개인 및 집단의 삶과 태도에 너무도 만연해서 그러한 삶으로부터 돌아서는 특별한 길이 있지 않은 한 그 길을 계속 가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비인간화될 가능성이 충분하며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최후의 심판 교리를 새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방식의 핵심이다. 한편으로는 신약성경을, 다른 한편으로는 신문을 읽으면서 나는 궁극적인 정죄, 최종적인 상실, C. S. 루이스의 표현을 빌자면, 하나님이 결국에는 “네 뜻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실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히로시마, 아우슈비츠, 유아 살해 그리고 수백만의 사람들을 빚의 노예로 만드는 무책임한 탐욕 앞에서 언제까지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고 노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류는 더 이상의 현실을 감당하기가 힘들며, 서구 자유주의에서 나온 값싸고 즐거운 만인구원설은 현실을 상당 부분 부인해 온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것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성을 바치고 그것을 예배하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서서히 반영하지 않게 된다. 인간 삶의 제 1법칙 중 하나는 자신이 예배하는 그 대상을 닮아 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예배하는 그 대상을 반영하게 된다. 그러한 반영은 그 대상 자체에게 뿐만 아니라 주변 세상으로까지 확대된다. 돈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자기 자신을 돈의 관점에서 정의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인간으로가 아니라 채권자, 채무자, 동업자 혹은 고객으로 대하게 된다. 성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 관점에서(성적 기호, 성적 관습, 성적 과거) 자신을 정의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실재적·잠재적 성적 대상으로 대하게 된다. 권력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 관점에서 자신을 정의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공모자, 경쟁자 혹은 볼모로 대하게 된다. 그밖에도 다른 우상 숭배의 형태들은 서로 수많은 방식으로 결합되며,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 그리고 그것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킨다. 나는 인간이 그러한 길로 계속해서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복음, 진정한 빛의 모든 여광, 돌아서서 다른 길로 가라고 하는 모든 암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 모든 이정표들을 계속 거부한 나머지, 죽은 후에는 자기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결국 한때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존재, 신의 형상을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은 피조물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선한 세상, 아직은 완전히 꺼지지 않은 깜빡이는 불꽃처럼 선함이 남아 있는 세상에서 그들이 지니고 살았던 몸은, 죽음과 동시에 희망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동정받을 가능성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전원에 포로 수용소가 있는 것이 아니며, 기쁨의 궁전에 고문실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어떠한 의미 있는 방식으로도 자신의 창조주를 반영하지 못하는, 인간이 아닌 상태로 계속 존재하는 그 피조물들은 더 이상 비정한 범죄자에게 간혹 느끼는 자연스런 연민조차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지옥에 갔다 왔다고 믿지만, 그 말은 어둠의 끝에 서서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격이지, 앞으로 지옥에 올 사람들을 위한 여행 안내서를 쓴 것이 아니다.
나오는 말: 인간의 목적과 새 창조
바울은 로마서에서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최종적 판결이 있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나 뒤로 가면서 그의 강조점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 그들을 불순종의 감옥에 가두셨다는 사실로 옮겨 간다.14) 물론 그 분문과 비슷한 다른 본문들을 보면 ‘개별적인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이 ‘모든’이라고 말할 때는 자신의 청취자들이 예상하는 것을 넘어서까지 언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은 자명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사람들까지도 다 받아들인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바울은 자신의 굳고 원한에 찬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었음을 알기에, 살아 있는 자들 중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처럼 변화되지 못할 사람이 원칙적으로는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요한계시록 21-22장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를 보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개들, 간음하는 자들…거짓을 말하고 거짓을 만들어 내는 자들-은 ‘밖에’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내부인과 외부인으로 나누어지는, 깔끔하게 정리된 두 개의 범주를 그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생수의 강이 도시 바깥으로 흘러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강의 양쪽 둑으로는 생명의 나무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다.” 이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표현이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궁극적 미래에 대한 우리의 모든 논의는 이것을 위한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우리를 비인간화시키고 하나님의 세상을 손상시키는 우상을 숭배하고 섬긴 사람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에 의심을 드리우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언제나 놀라움으로 가득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신약성경이 그것의 뿌리가 되는 구약성경과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바는 온 세상, 우주 전체를 위한 하나님의 구출과 재창조의 목적에 대한 것이다. 개별 인간의 운명은 그러한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단순히 우리는 더 큰 그림의 일부일 뿐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현재에 우리가 ‘구원’받는 이유 중 하나가 그 큰 그림과 목적 안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바울은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충격적인 용어를 쓰면서 그러한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러한 이해와 함께 우리가 얻는 깨달음은, 기쁨이든 재난이든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 자신의 ‘운명’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아마도 이 문제 전체를 잘못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땅한 질문은 “하나님의 새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여야 하고, 그 다음에 “우리 인간들은 그러한 창조의 회복에 어떻게 기여할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의 새로운 세상에서 시작하실 새로운 프로젝트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여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다른 틀 안에서 제시될 것이다. 당신은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강력한 치유와 변화의 사랑을 이 세상에 반영하면서,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발견하고 싶은가? 아니면 당신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예배하고, 이 세상 안에 있는 세력으로부터 권력이나 쾌락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부패하게 될 인간성을 부추기고, 그저 자기 자신의 비인간화와 이 세상의 지속적 부패에나 기여하고 싶은가?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이 밝혀 준 바에 의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그럼으로써 모든 것의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그 과정의 일부로서 이스라엘도 구원하실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통해서 자신의 창조계를 구속하시고 회복하실 것인지, 그리고 모든 것의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그 과정의 일부로서 인간들도 구원하실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기독교 서적 >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톰 라이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건설 / 3부 희망의 실천 (0) | 2021.02.03 |
---|---|
12. 구원을 다시 생각하다 -하늘, 땅 그리고 하나님 나라 / 3부 희망의 실천 (1) | 2021.02.02 |
10. 우리 몸의 구속 / 2부 하나님의 미래 계획 (0) | 2021.01.27 |
9. 심판하러 오시는 하나님 / 2부 하나님의 미래 계획 (0) | 2021.01.25 |
8. 그분이 나타나실 때 / 2부 하나님의 미래 계획 (0) | 2021.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