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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톰 라이트

10. 우리 몸의 구속 / 2부 하나님의 미래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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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기는 말

하나님의 백성은 새로운 형태의 육체적 존재, 즉 현재 우리의 육체적 삶의 완성과 구속을 약속받았다는 것이다.
(일종의 ‘연옥’이나 ‘계속되는 여정’이라는 중간 단계가 있건 없건) 사람이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거나 ‘지옥으로 간다’는 단일 단계의 사후 운명을 말하는 전통적인 그림은 기독교적 희망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축소시킨다
‘천국’에 대해 모호하게 이야기하면서 부활의 언어를 거기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대신에, 우리는 부활에 대해 성경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하며 천국에 대한 우리의 언어를 그 내용에 맞게 재구성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게 되면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도피주의나 정적주의적 경건의 기초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그러한 경건은 오히려 ‘천국’에 대한, 전통주의적이고 오해를 유발하는 언어에서 비롯된다), 현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발하고 창조적인 기독교의 탁월한 기초를 발견하게 된다.

부활: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예수님이 현재 우리의 낮은 몸을 그분과 같은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실 것이고, 모든 것을 복종시키시는 그분의 권능으로 그 일을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 짤막한 진술은 이 주제에 대한 바울의 사상을 잘 요약해서 보여 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미래에 가질 몸의 모델일 뿐만 아니라 그 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골로새서 3:1-4에서 바울은 우리의 생명이신 메시아가 나타날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서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언젠가 그분께로 가서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서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가지고 있는 이 새로운 생명이 온전하게 육체로 현실화되어 눈에 보이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종종 무시되지만 가장 명확하고 강력한 본문은 로마서 8:9-11이다. 하나님의 성령, 메시아 예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 메시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죽을 육체에도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은 육체가 없는 영혼에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육체가 없다는 의미에서의 ‘영적인 몸’에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 죽을 몸’에 생명을 주신다.

요한 1서는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그분의 참 모습을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과 같이 된다고 선언한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육체의 영광과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상상할 수 없지만 우리 자신의 부활체의 모델이 될 것이다. 요한복음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혼란스러운 부분이겠지만 그 안에는 미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매우 명확한 진술들이 들어 있다. 예수님은 유대교 안에 널리 퍼져 있던 부활에 대한 기대를 재차 확인하시면서 그것이 일어날 때가 이미 왔다고 말씀하신다.
고대 헬라어에서 ‘거할 곳’이라는 뜻의 ‘모나이’(monai)는 최종적인 안식처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게 되는 긴 여정에서 일시적으로 멈추는 장소를 뜻하는 단어로 대개 사용되었다.
‘낙원’은 오랫동안 잘못 해석되어 온 단어인데, 그것은 최종적 종착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다른 유대교 저작에서처럼 죽은 자들이 새로운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원기를 회복하게 되는 복된 동산, 쉼과 평온의 공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부활 이전에 있게 될 상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으로 인해 미래의 희망이 현재 가운데로 들어왔다. 최종적으로 다시 깨어날 그 마지막 때가 오기 전에 믿음을 가지고 죽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단번에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은 (고대의 이교도들처럼) 그것을 믿지 않았건 혹은 (많은 고대의 유대인들처럼) 그것을 지지했건 간에 언제나 그 단어의 의미 그대로 사용되었다. 즉 그것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쓰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 직후에 어떤 상태로 들어가든지 그 이후에 오는 새로운 육체적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쓰는 말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늘’은 하나님에 대해 공손하게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하늘의 보화’란 그저 ‘하나님의 현존의 풍성함’을 의미한다(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해서 부요한’ 사람 혹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또 다른 본문에서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차적인 의미에서 파생된 ‘하늘’은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저장되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원래 그 목적이 머물러야 하는 장소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늘에 가야만 그 목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은 그 목적이 땅에서 실현되는 날이 올 때까지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장소다.
하나님이 미래에 주실 유산, 부패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와 그 세계에서 살 새로운 육체는 이미 안전하게 보관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하늘로 가서 새로운 육체를 입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러니까 내가 앞에서 이야기한 회복된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태어나기 위해 하늘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저작에서는 ‘영혼’이라는 단어가 지금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프시케’(psychē)라는 단어는 고대 세계에서 매우 흔한 단어였으며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후대의 기독교나 불교에서 자주 사용되기는 했지만, 신약성경은 그 단어를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우리의 특정 부분’을 일컫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프시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네페쉬’(nephesh)처럼, 육체가 없는 인간의 내적 부분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격’ 혹은 ‘인성’이라고 부를 법한 것을 일컫는 단어였다. 베드로전서 1장의 요점은 이 ‘인격’, 즉 ‘참 자기’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언젠가는 그 구원을 온전히 육체적인 형태로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구원의 희망을 예수님의 부활에 굳건하게 뿌리박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고 말한다.

고린도서에서 말하는 부활

고린도후서 5장에서 바울은 우리를 기다리는 새로운 ‘천막’ 혹은 ‘장막’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영역(즉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집, 새로운 처소, 새로운 육체가 있는데 우리를 위해 준비된 그것을 현재의 몸 위에 덧입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생명에 의해 삼켜져 버린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여기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이 일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 유대교의 창조 신학은 바울이 확립한 새로운 창조 신학의 모판이 되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사고를 하게끔 하고 있었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울이 우리에게 상상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현재 육체가 마치 육체 없는 혼령과 대비되는 것 같이 새로운 형태의 육체성을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육체는 우리의 현재 육체가 육체 없는 영혼보다 더 실질적이고 더 확실하게 만져지는 대상인 것처럼 지금보다 더 실질적이고, 더 견고하고, 더 육체적일 것이다. 만약 바울이 옳다면 현재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미래의 자신과 비교할 때 단순히 그림자일 뿐이다. 그 미래의 자신은 하나님이 하늘의 창고에 보관 중이신 그 육체가 이미 다 재단된 상태로 꺼내어져 현재의 몸 위에 (혹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을 그 부분에) 입혀지게 될 때 갖게 되는 모습일 것이다.

 그의 요점은 우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반드시 서야만 하고(고후 5:10), 그러려면 우리에게 반드시 육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요한과 마찬가지로 다니엘 12장 그리고 그 외에 비슷한 다른 유대교 본문들과 궤도를 같이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 역시 결국에는 의로운 자의 부활뿐만 아니라 (육체를 입은 상태로 심판받기 위해서) 악한 자의 부활까지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고릳도전서 15장에서 대조되는 것은 부패하기 쉽고 썩게 될, 죽을 수밖에 없는 현재의 육체와, 부패하지 않고 썩지 않는, 다시는 죽지 않는 미래의 육체다.
‘프시키코스’(psychikos)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가 뜻하는 ‘육체적’이라는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이 단어는 바울 시대의 헬라어 ‘프시케’에서 파생되었는데, ‘프시케’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뜻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깊은 그 이면의 요점은 이러한 종류의 형용사, 즉 ‘-ikos’로 끝나는 헬라어 형용사는 사물이 만들어지는 원료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힘 혹은 에너지를 묘사한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통상적인 인간의 ‘프시케’(지금 여기에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으로서, 우리가 현재의 생애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지만 궁극적으로는 질병, 사고, 부패 그리고 죽음 앞에서 무력한 힘)가 동력이 되는 현재의 육체와 하나님의 ‘프뉴마’(pneuma), 새로운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숨결,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는 힘이 동력이 되는 미래의 육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세기 중반부터 논쟁거리가 되었던 후반절에서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라고 선언한다. 여기에서의 의미는 육체성이 폐지된다는 것이 아니다. ‘혈과 육’은 부패하는 것, 변화무쌍한 것,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을 일컫는 전문적인 용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대조가 되는 것은 우리가 육체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육체적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의 대조가 아니라 부패할 육체성과 부패하지 않을 육체성 사이의 대조다.
“우리의 존재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가 하나님의 종국적 미래에서 영광스럽게 재확인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확고하게 동요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주님의 일에 충성해야 해.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우리의 노동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야”라고 말하게 한다.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에는, 현재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일이 종국적으로 미래에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식으로 그렇게 될지는 지금 우리로서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부활: 후대의 논쟁들

창조의 교리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정의와 최후의 심판에 대한 교리다. 유대교에서처럼 부활은 창조와 심판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중 하나를 버리면 어떠한 이유에서건 나머지 두 개도 곧 버리게 된다.


부활을 다시 생각하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왜, 언제 그리고 어떻게

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인가? 요한에 의하면 그리고 아마도 바울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바울의 경우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적용되는 특별한 의미의 부활이 있다.
부활은 어디에서 일어날 것인가? 그때가 되면 새 하늘과 결합해 있을 새 땅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 책 2부 전체의 구조와 논증에서 내가 후렴구처럼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세상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진부함을 무릅쓰고 제안한 것과는 달리) 인구 과밀의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므로 그분의 새로운 세상은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런 세상일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랑과 아름다움이 버려지지 않고 취해져 변화된 세상일 것이다.
부활한 육체는 정확하게 어떤 모습일까? C.S 루이스는 우리의 현재 육체보다 더 견고하고, 더 실재적이고, 더 실질적인 육체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 육체는 “영광의 중한 것”(the weight of glory)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적절하다는 것을 우리가 보고 느끼고 알게 될 그러한 육체일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상처가 고통과 죽음의 근원으로서가 아니라 그분의 승리의 표시로서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부활한 육체도 하나님의 특정한 부르심에 대한 자신의 충성의 표시를 적절하게 지니게 될 것이고, 그 표시에는 분명 우리가 고통받은 흔적도 같이 있을 것이라는 점뿐이다.

특히 이 새로운 육체는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넘어선 육체가 될 것이다. (특정 순간과 사건을 어떻게든 넘어갔다는) 일시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더 이상 질병과 사고와 부패와 죽음 자체에 복속되어 있지 않다는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그럴 것이다. 어떤 파괴적인 세력도 새로운 육체에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 예수님의 부활한 육체가 지니고 있었던 특이함을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일 수 있다. 제자들은 그러한 첫 부활체, 즉 유일하게 부패하지 않는 육체를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육체일 것이나 필멸성에 복속되지 않는 육체일 것이다. 그런 ‘불멸의 육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너무도 이상한 것이어서, 바울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야기했던 것이 정말 그것인지를 전혀 생각해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맞다.

‘불멸의 육체’를 믿는 이러한 신앙과 ‘불멸의 영혼’을 믿는 신앙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플라톤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은 불멸의 요소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고 믿었고, 그것은 보통 ‘영혼’이라고 일컬어졌다. (앞에서 C. S. 루이스를 칭찬하기는 했지만 그도 이 함정에 빠진 듯하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불멸성’은 본질적으로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성질이며, 그것을 은혜로운 선물로써 자신의 백성과 나누시는 것이다.
왜 우리에게 새로운 육체가 주어지는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의하면, 새로운 육체의 목적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지혜롭게 다스리는 것이라고 한다. 이제 빈둥거리며 하프나 켜고 있는 이미지는 잊어버리라. 거기에서는 분명 할 일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 일을 기쁘게 할 것이다. 우리가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기술과 재능,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소명과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에 우리가 포기한 관심사와 좋아하는 일들까지도 더 향상되고 고귀하게 바뀌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다시 주어질 것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다스리는 것’을 몇 차례 약속하고 있고, 이것은 결코 빈말일 수가 없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미래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 우주 전체의 회복이라면 할 일은 많을 것이고 완전히 새로운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육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선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미래에 주실 축복을 보상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본문들이 있고, 특히 예수님 자신이 하신 말씀에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것은 앞에서 던진 “왜 우리에게 새로운 육체가 주어지는가”라는 질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답변일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이 점을 불편하게 여긴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배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발상 자체가 불쾌한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나오는 보상의 이미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산의 문제가 아니다. 임금을 받기 위해 힘든 일을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 보다는 친구 사이나 부부 사이에 상대방과 함께하는 것을 더 온전히 즐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훨씬 더 비슷하다. 필드에 나가서 제대로 된 방향으로 공을 치기 위해 골프를 연습하는 것과 더 비슷하다. 독일어나 헬라어로 글을 쓴 위대한 시인과 철학자들의 글을 읽기 위해 그 언어를 배우는 것과 더 비슷하다. ‘보상’은 임의로 등 한 번 두드려주는 것 외에는 우리가 한 일과 별 상관이 없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활동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언제나 노동과 직접 연관된 혹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라는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풍성함이 있다. 나머지 생애 동안 호메로스를 읽고 즐길 수 있다는 보상은, 헬라어를 배우는 고투에 대한 일대일의 ‘보상’이란 의미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부활은 현재 우리가 복음을 위해 열심히 하는 일이 낭비되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 그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미래에 그 일은 완성될 것이며, 성취될 것이다.
바울은 만약 그리스도가 첫 열매라면 그분께 속한 사람들은 “그분이 오실 때에”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 사건은 분명히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계시록은 그 당시의 많은 유대교 문헌들처럼, 죽은 자들이 인내하면서-때로는 잘 인내하지 못하면서-자신들이 드디어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중간 상태는 사실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가 지속적으로 보여 주는 부활 신앙의 특징이다.
새 창조가 몇 가지 중요한 의미에서 현재의 창조와 연속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때가 이미 왔다고는 더더욱 생각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부활한 육체가 그분의 십자가형 이전에 이미 살아서 활동하고 계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새로운 세상은 단순히 이전 세상의 대체가 아니라 변형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 세상의 변형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그 변형의 핵심적 특징도 아직 일어났을 수가 없다. 시간은 중요하다. 그것은 최초의 선한 창조의 일부였다. 물론 시간 자체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변화되겠지만 우리는 ‘영원’이라는 말이 어느 옛 노래가 표현한 것처럼 “더 이상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문구가 미래에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는 세대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영원이란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공간, 시간, 물질, 그리고 감각이라는 옛 영토에서 잡초를 제거하고 땅을 일군 후 새로운 작물을 얻기 위해 씨를 뿌려야 한다. 우리는 그 옛 영토에 싫증이 났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프트웨어를 다시 운용할 수 있는 새로운 하드웨어를 주실 때까지 우리의 소프트웨어를 하나님의 하드웨어에 다운로드 해 놓으실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육체를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처럼 그 육체는 이전의 육체와 어느 정도 연속성을 가질 수 있다. 혹 사람의 재가 (리옹의 순교자들의 경우처럼) 빠르게 흐르는 강물에 뿌려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창조하실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고 계시다.

초기 기독교 저술에서는 ‘어떻게’라는 질문이 제기될 때마다 대답은 늘 같았다. 혼돈의 물 위를 운행하시던 성령, 예수님의 성령이라고 알려질 정도로 풍성하게 예수님 안에 거하셨던 성령, 앞으로 올 것의 첫 열매로서, 첫 할부금으로서, 보증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안에 이미 현존하시는 이 성령은 단순히 미래에 있을 삶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최종적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다. 심지어 현재에도 그렇다. 초기 기독교의 신경은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이, 성령”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정확하게 신약성경과 일치하는 신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