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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톰 라이트

14. 사명을 위한 교회의 재구성(1)_성경적 근거 / 3부 희망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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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오늘과 내일의 교회가 예수님의 성취와 그분의 부활을 실행하고 그럼으로써 모든 것의 최종적 회복을 예견하는 이와 같은 사명에 참여하려면 교회 자체도 이 사명을 위해 새롭게 되고, 새로운 자원을 얻고, 새롭게 조정되어야 한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스라엘의 대변자로 죽으신 예수님의 정당성을 하나님이 입증해 주셨다는 사실일 것이다.
부활은 하나님 나라가 정말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신 임마누엘로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받으셨다.
이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하시며, 그 권세에 기초해서 제자들에게 그것을 실현시키라고, 다시 말해서 그 권위의 대리인으로 일하라고 명령하신다.
부활은 이 세상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위에 주님이신 예수님의 주권에 기초해 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명을 의미한다.
부활이 예수님의 육체라는 물리적인 실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면, 그 뒤에 반드시 따라올 수밖에 없는 다른 사건들에 대한 함의를 지니게 된다.
예수님이 이제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 즉위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의 나라가 세워졌다. 그리고 그 나라는 그분의 추종자들이 모든 민족에게 주님께 순종하며 충성하라고 요청하고, 세례를 통해 사람들에게 표시를 줌으로써 실현되어야 한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신 임마누엘이 이제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이시며, 이 옛 세대의 끝날까지, 부활과 함께 시작된 새 세대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완성하는 그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고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 전체가 새로운 방식으로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활은 과거의 모든 약속들이 드디어 실현된 지점이다. 흔들리지 않는 다윗 왕국에 대한 약속, 이스라엘이 겪은 가장 고통스런 유배로부터 귀환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 그리고 그 약속 이면에는 마태, 누가 그리고 요한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약속, 즉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
누가는 예수님이 정말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고대 성경도 반드시 예수님에게서 절정을 이루는 이야기로 읽혀야 하고, 그 절정 이후에는 이스라엘에서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추종자들에게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온 세상에서 제대로 열매를 맺게 되는 이야기로 읽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라는 새로운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희망이었다. 그 희망은 아주 일찍부터 성경 안에 짜여 들어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드디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 일을 하시면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이 그 복을 이스라엘과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의 신학을 여는 핵심적 열쇠 중 하나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면 성경은 그분 안에서 자신의 목적을 이룬 것이고, 시편 기자와 선지자들이 고대하던 순간이 온 것이다. 이 땅의 민족들이 자신의 보물을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 즉 이스라엘의 메시아 앞에 충성과 순종으로 가지고 나아오는 그때가 온 것이다.
누가에게 있어서 부활의 요점은, 이스라엘의 긴 이야기, 즉 위대한 성경의 내러티브가 그 목표이자 절정에 달했고, 이제는 그 이야기가 의도한 대로 온 세계를 향한 사명을 낳아야 하는데, 그 사명이란 우상 숭배를 버리고 죄의 용서를 받으라고 모든 민족에게 요청하는 것이다. 누가는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형상을 입은 진정한 하나님을 보게 되기 때문이며, 실재를 보게 되기 때문이며(모든 우상은 그 실재의 서투른 모방일 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진정한 죄의 용서를 발견하기 때문이며, 이전의 모든 희생 제사는 그저 예수님에 대한 표본과 그림자였을 뿐임을 보게 되기 때문이라고 암시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고대 성경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세계적인 선교가 시작된 것이다.
새 날과 새 사명이다. 이제는 부활절이 새 창조를 시작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창조한 그 말씀이 이제는 모든 것을 다시 창조하는 말씀이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자 새로운 주간의 첫째 날로, 하나님이 이제 온 세상에서 성취하실 일의 원형이 드러난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아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다스릴 임무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비나 눈처럼 임하여 새 창조를 이룬다는 위대한 그림을 제시한 이사야의 약속처럼 예수님은 가시와 엉겅퀴를 뿌리 뽑고 전나무와 화석류를 심으러 오셨다.
부활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셨던 그 일을 이제는 제자들이 온 세상을 위해서 해야 한다는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는 사건이다.
그 사명은 그 일에 필요한 도구와 함께 주어진다.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이 세상에서 그분의 대리인이 되려면 성령이 필요하며, 따라서 그 성령이 주어진다. 부활절과 오순절은 함께 가는 것이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에게 사명을 주고, 오순절은 그들에게 그 사명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준다.
우리가 부름 받은 일은, 그리고 부활을 통해 우리가 준비된 일은 우리 자신이 주체로서 참여하는 그러나 자기를 추구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기를 주는 주체로서 참여하는 이다. 다시 말해 사랑의 한 형태로서의 앎이다.
부활을 통해 사람은 새로운 앎을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식론, 새로운 말문 트기, 모든 인간의 앎과 말. 모든 인간의 희망과 사랑이 죽고 난 이후, 일곱째 날의 안식이라는 침묵 이후, 새롭게 태어난 그 말씀이 인간에게 주어진다.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용서, 새로운 풍성함, 이전보다 더 폭 넓고 더 위험한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도전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이 땅에서의 위험하고 어려운 임무로 소환한다.
어부에서 양치기가 되는 베드로의 변화는 그가 자신의 죄를 직면하고 용서를 받아들이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질문을 던지심으로 베드로가 했던 세 번의 부인을 상기시키고는, 그에게 변화된 새로운 삶의 임무를 주시며 용서를 베푸신다.
자신의 반항, 부인, 그리고 죄의 뿌리를 건드리면서 사랑과 용서를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고기잡이 대신에 양을 치러 보냄을 받을 수도 있다. 귀 있는 자는 듣기를 바란다.
제자들은 이스라엘이 나라로 회복된다는 것은, 일종의 민족적 우월성이 입증되는 어쩌면 이스라엘의 적들이 군사적으로 패배하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염두에 두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나라를 위해 오랫동안 미루어 오신 계획이 성취되는 것이었다. 이제 그분이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시편 기자와 선지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메시아는 이 세상의 참 주님이시다.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이것이 바로 그 뒤에 나오는 승천 이야기의 진정한 메시지다. 모든 로마인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늘로 올라간 자는 신성한 황제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분의 사자들과 밀사들은 그분이 이미 주님으로 즉위하신 모든 영토로 가서 그분의 즉위 사실과 지혜롭고 정의로운 통치에 대한 기쁜 소식을 알릴 것이다. “너희가…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따라서 당연히 사도행전 전체의 내용은 바로 그 명령을 따른 것의 기록이다.
그들은 가서 유대인 메시아 예수가 이 세상의 참 주님이시라는 것을 이 세상에 알리고, 이 세상이 믿음의 순종으로 나오도록 그들을 촉구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 세상의 나라들은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 메시아에게 속하였다고 선포된 것이다.
이러한 선언의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이다. 예수님이 이제 왕으로 즉위하셨다는 의미를 지니는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전체 요점은 이스라엘과 이 세상이 위대한 전환점을 돌았고,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이’ 부활절에 실제로 시작되었다고 그들이 선언했다는 것이다. 부활절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 오랫동안 기다려 온 새로운 세대, 죽은 자의 부활의 시작이었다.
단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이 한 사람을 이 세상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여 자신을 드러내시고 이 세상을 향한 계획을 나타내셨으며, 그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그 사실을 보증하셨기 때문에, 이제 이교의 신학과 철학의 모든 추론과 의문들은 다른 기반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 하는 일이다. 부활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며, 그 새로운 세상에서는 유대교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구원과 심판 아래 모든 것이 새롭게 조명된다.
그분의 주되심은 결국 믿음을 통해 실행되는 것이고, 믿음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바울

예수님의 부활을 이미 예수님이 주님으로서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창조의 시작으로 본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고 그 세상에서는 죄의 용서가 단지 사적인 경험이 아니라 우주적인 사실이라는 것이다. 죄는 죽음의 근본적 원인이다. 만약 죽음이 패배당했다면, 죄의 문제도 해결되었다는 의미가 될 수밖에 없다.
부활에 대한 유대인의 기대-마지막 때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부활하는 것-가 두 단계로 나누어졌다. 전조가 되는 사건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나머지가 따르는 것이다. 메시아가 보편적 부활의 시작으로써 먼저 부활하셨고, 그가 마지막에 나타나실 때 그에게 속한 자들이 부활할 것이다(23절). 그 때에, 그리고 그 때에만이 메시아는 갈보리와 부활절에서 거둔 승리를 완벽하게 이행한 것이 된다. 그때가 바로 성경의 약속이 성취되어 모든 적들, 죽음을 포함한 모든 적들이 그분의 발 아래 놓이게 되는 때다(고전 15:22-26절).
비록 우리가 그 통치의 결과를 아직은 다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통치하고 계신 것이다. 바로 부활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주된 의미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이 사건을 통해서 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약이 회복되고, 죄가 용서받고, 죽음 자체가 없어질, 오래 전에 약속된 그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부활은 유대교의 메시아가 전 세계적인 통치를 시작하는 결정적인 출발점이며, 그 통치 안에서 죄는 이미 용서가 되었고 종국적인 새 세상-정의롭고 생명의 부패가 없는 세상-에 대한 약속이 보증된다.
우리는 과거의 악함에 대한 온당한 회개가 과거와 현재에 이룬 교회의 특별한 성취들을 비하하는 쪽으로 잘못 가게 해서는 안 된다.
부활이란 우리 각자가 부름 받은 인격적이고 친밀한 삶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은 세례와 거룩에 대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신선한 명령이 우리와 직접 연결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부활의 사람들이 되기로 헌신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메시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했다. 우리는 메시아의 죽음과 연합했는데, 그 결과 우리의 옛 정체성, 옛 자아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죄는 더 이상 우리에게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며, 우리를 공식적으로 지배할 권한이 없어지게 된다. 만약 메시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가 메시아 안에 있고 세례를 통해서 그분의 백성이 되었다면 우리 역시 그분 안에서 부활했다는 의미가 된다(8-10절).
그것이 현재의 경험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그리고 메시아이신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자기 자신을 여겨야 한다”(consider yourself).
예수님의 부활에서 시작된 혁명적인 새로운 세상, 즉 죄와 죽은 자 가운데서 승리하신 예수님이 주님으로 통치하는 세상은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최전선의 전진기지로 삼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온 세상의 회복, 그 중간 단계에서 인간의 회복이 있다. 바로 여러분과 나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순종의 삶을 통해 회복되는 것이다!
바울은 세례가 부활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과 짝을 이룬다고 본다. 왜냐하면 세례의 기본적인 고백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이며, 이 고백의 근거가 되는 신앙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복음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19) 이어서 그는 메시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의 함의를 이끌어내기 시작한다. 즉 그 말은 유대교의 율법과 규칙이 더 이상 그들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뜻이다(골 2:16-23).
바울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면-다시 말해서 우리가 세례와 믿음을 통해서 부활한 사람이라면, 부활절에 시작된 새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그 능력에 힘입어 살고 있다면-부활하신 예수님의 삶에 현재 동참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네가 세례를 받았으므로 하나님이 네게 죄에 대해서 죽고 부활의 삶을 살라고 도전하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늘과 땅은 서로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 둘은 하나님의 단일한 창조 실재의, 서로 맞물려 있는 한 쌍의 영역이다. 하늘을 잘 알아야만 땅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하늘만큼이나 땅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하나님을 정말로 알고 그분의 생명에 동참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의 요점은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갖고 계신, 변화된 육체의 요점은 그분이 하늘과 땅 모두에 편안하게 거하시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실재와 우리 사이를 분리해 주는 얇은 막을 통해서 그 두 영역을 적절하게 오가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승천의 핵심적 의미 중 하나다.
부활과 승천에서 축하되는 성육신의 핵심적 성취 중 하나는 하늘과 땅이 이제는 떨어질 수 없이 결속되고 우리도 당연한 권리로써 두 영역 모두의 시민이 된다는 것이다.
땅은 하늘로부터 자신의 중요한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늘의 영역에 주의를 집중시키면 온갖 종류의 긍정적이고 실제적인 결과들이 따라올 것이다. 골로새서 3:11에서 바울은 그 첫 결과 중 하나가 문화적·인종적 영역을 초월하는 교회의 연합이라고 본다.
하늘의 삶이 관통하는 실재적인 현재의 물리적 실재다. 부활절 이후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지려면, 부활절이 우리의 삶과 태도와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익숙해지려면 이제 모두에게 공개된 우주론에 익숙해져야 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하늘과 땅은 서로를 위해 존재하며, 특정 지점에서 그들은 서로 교차하고 맞물린다. 예수님이 그 교차점의 궁극적 지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와 같은 교차점이 되어야 한다. 성령, 성례전 그리고 성경은 하늘과 땅 모두에 속한 예수님의 이중적 삶을 이미 현재에서부터 우리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이제는 일어날 때라는 것이다! 하늘이 아닌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사는 것은 마치 잠을 자는 것과 같다. 사실 잠은 은유에 불과하고, 정확히 말하자면 죽은 것과 같다. 거짓말, 도둑질, 성적 부도덕, 나쁜 성질 등(바울은 이 모든 것을 짧은 본문에 다 담아내고 있다21))은 그것을 범하는 사람에게나 그들의 행동 때문에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나 전부 죽음의 형태를 띄게 된다. 그것은 죽음의 잠을 자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다. 그런데 이제는 일어날 때라고 그는 말한다. 일어나서 진짜 세상, 예수님이 주님이신 세상, 세례를 통해서 들어올 수 있는 세상,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신경의 고백이 의미하는 그 세상을 맞이하라.
부활절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고, 이제는 우리가 거기에 참여하도록 초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활이 육체의 부활이었고 현재도 그렇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재의 세상을 변화시키고 고칠 수 있는 부활절의 능력은 이 세상의 주요 문제에 복음을 적용하는 거시적인 차원과-구 소련의 공산주의 문제와 인종분리 정책이 그러한 거시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우리 일상의 자잘한 부분 모두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거룩은 착해지려고 애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절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세상,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공개적으로 들어간 그 새로운 세상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역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영역, 물리적 실재의 영역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나 자신’이라고 부르는 피조물이다. 개인의 거룩과 이 세상의 거룩은 함께 가는 것이다. 한 가지에 눈 뜬 사람은 분명 다른 한 가지에도 눈 뜨라는 부름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