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신약성경이 자주 언급하는 내용은, 예수님이 있는 곳에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곳에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다.
그 부활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부활의 함의와 효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느껴져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놀라운) 미래의 희망을 제대로 이해하면, 놀랍게도 그것은 모든 기독교적 사명의 기초인 현재의 희망에 대한 비전으로 직접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동시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을 들은 것은 그가 현재에 하고 있는 일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질병과 죽음에서 ‘구하는’ 것을 보았고, 그가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그 메시지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고, 그 메시지는 현재를 넘어서 궁극적인 미래에까지 이어지는 메시지였다. 그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의 요점은, 자신이 장기적으로 미래에 대해 약속하신 것을 현재에 실제로 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미래에 대해 약속하신 것과 그 당시에 하고 계셨던 일은, 육체 없이 영원히 살라고 영혼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현재 세상의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 내어 그들이 현재에서부터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인 창조계의 회복을 누리게 하고, 그럼으로써 그들도 이와 같은 더 큰 프로젝트의 동료이자 동역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전 15:58)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미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어떻게 현재의 일을 계속하는 것과 연관이 되는가? 그것은 꽤 간단하다. 바울이 그 편지에서 계속 주장한 것처럼, 부활의 요점은 죽는다고 해서 현재의 육체적 삶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죽은 육체를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시키실 것이다. 현재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 육체를 위해 위대한 미래를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사실이 고린도전서 6장에서처럼 윤리에 적용된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부름 받은 다양한 소명에도 당연히 적용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그러한 일들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우리가 부를 만한 일들이다. 현재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미래에서도 지속될 것이다.
새 창조에 대한 약속이, 그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사명에 대한 문제다. 일단 부활의 문제를 정리하고 나면 우리는 선교의 문제도 정리할 수 있고 정리해야만 한다. 우리가 ‘선교 중심의 교회’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희망 중심의 선교다.
‘구원’의 의미
‘구원’은 ‘구출’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으로 무엇으로부터 구출되는 것인가? 당연히 ‘죽음’으로부터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죽고 난 후 우리의 몸은 썩어 없어지고 우리의 영혼이 (혹은 썩어 없어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는 부분에 대해서 어떤 다른 명칭을 쓰건 간에 그것이) 다른 곳에서 계속 존재하게 된다면, 이것은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구출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었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가-이 세상, 우리가 아는 인생, 우리의 영광스럽고도 놀라운 육체와 뇌와 혈관 등이-정말로 선하다면,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새로운 창조라는 놀라운 행위를 통해 그 선함을 다시 긍정하길 원하신다면, ‘구원’을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탈출로 이해하는 관점은 단순히 약간의 변경과 수정을 가하기만 하면 되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틀린 관점이다. 그것은 죽음과 공모하는 것이며 죽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선한 인간 피조물을 파괴하는 것을 묵인하는 일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부분만큼은 악하고 불결한 이 육체로부터 그리고 시간-공간-물질의 이 슬프고 어두운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비기독교적이고 비유대교적인 생각이다.)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가 그러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종파건 ‘성경적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상태이며, 대중적인 가르침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전례, 공공 기도, 찬송가와 온갖 종류의 설교에 의해 강화된다.
우리가 ‘구원’을, 신약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그 새롭고도 영광스런 물리적 구체성을 지닌 실재-내가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이라고 부른 것-에 우리가 동참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부활시키시겠다는 약속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지금 여기에서 하는 교회의 주된 일은 그 관점에 따라서 다시 생각되어야만 한다.
새로운 육체를 입고 사는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이 중요하다면, 현재에 육체를 가지고 사는 ‘죽음 이전의 삶’은 흥미롭지만 궁극적으로는 상관 없는 현재의 관심사나 또는 육체를 벗어난 복된 최후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지나가야만 하는 ‘눈물과 영혼 생성의 계곡’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미래 목적이 뚫고 들어온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시간-공간-물질의 삶으로 여겨져야 하며, 이제는 그 미래의 목적이 교회의 사명을 통해서 계속해서 삶으로 예견되어야 한다. ‘죽음 이후의 삶’은 궁극적인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 뿐만 아니라 ‘죽음 이전의 삶’도 심각하게 방해하는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단지 죽음과 공모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죽음과 협력함으로써 힘을 얻는 온갖 권력들과도 공모하는 것이다.
‘구원’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고 보니 신약성경에는 이 ‘구원’이 먼 미래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단서와 암시와 명백한 주장이 많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 올 것을 현재에 충실하게 예견하며 지금 이곳에서 그 구원을 누릴 수 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아직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누릴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궁극적 ‘구원’이란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리고 예수님과 사도들이 사람들을 고치거나 난파된 배에서 구출되거나 할 때의 요점은, 그것이 바로 궁극적인 ‘구원’, 즉 시간-공간-물질의 치유적 변화를 올바로 예견하는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미래의 구출은 현재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의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가 구원받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이 사실을 납득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구원이 정말 그러한 것이라면 인간 존재에게만 국한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이 믿음에 이르는 단회적인 사건으로서 과거에 ‘구원’을 받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에 대한 응답과 치유와 구출의 행위를 통해 현재에 구원을 받고, 최종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으로서 미래에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그 목적은 언제나 그가 구원을 받지 않았을 때보다 더 온전한 의미에서 진정한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진정한 인간에게는 창세기 1장에서처럼 창조계를 돌보는 임무가 주어진다. 하나님의 세상에 질서를 가져오고, 공동체를 세우고 유지시키는 임무가 주어진다.
구원의 진정한 용도는 구원받았고, 구원받고 있고, 언젠가는 온전히 구원받을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구원을 받았으며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위해서 구원받은 것임을 깨달을 때에만 발휘가 된다.
요점은 이렇다. 하나님이 이생에서 성령을 통해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하시고, 제자도, 기도, 거룩, 희망 그리고 사랑 가운데서 예수님을 따르도록 이끄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우주 전체를 위해 하고자 하시는 일의 징표가 되고 그것을 미리 맛보게 하는 자들이 되게 하려는 의도-이것은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그 궁극적 ‘구원’의 징표이자 맛보기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현재와 미래에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수단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만의 구속이 아니라, 부패와 타락에서 자신이 해방되는 것만이 아니라, 창조계 전체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러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바울이 주장했던 바다. 다시 말해서 창조계는 그렇게 구속받은 인간이 드러나기를 기다리는데, 그 인간의 청지기직을 통해서 창조계가 드디어 원래의 지혜로운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즉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합한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미 ‘구원’받았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에, 이러한 청지기의 일은 궁극적인 미래로 연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일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구원’의 온전한 의미는 (1) 단지 ‘영혼’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에 대한 것이며, (2) 미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것이며, (3)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와 ‘천국’은 같은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천국’의 통치, 즉 천국에 사는 분의 통치)를 의미한다. 예수님에 의하면 이 통치가 현재 세계인 이 ‘땅’에 침입했고, 또 침입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의 은사가 의미하는 모든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이 땅으로부터 데려가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약속받은 대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이 땅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할” 때를 예견하며 우리를 이 땅에 변화를 가져오는 대리인으로 삼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자신의 아름답고 강력한 창조계가 반항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그것을 바로잡기 원하셨고, 계속되는 타락과 임박한 무질서에서 구출해 내 질서를 회복시키고 풍성함의 상태로 되돌려 놓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즉 하나님은 창조계 전체에 대한 자신의 지혜로운 주권을 다시 세우기를 원하셨다. 그러려면 치유와 구출의 위대한 행위가 필요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로부터 구출해 내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을 이방인으로부터 구출해 내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빛이 되게 하려고 이스라엘을 구출하셨고, 마찬가지로 인간이 창조계를 구출해 내는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게 하려고 인간을 구출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내적 역동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바로 창조계를 다스리는 청지기로 인간을 만드시고 이 세상의 빛이 되라고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길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와 일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와 일치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영혼을 육체가 없는 ‘천국’으로 잡아채 가는 것은 요점 자체를 망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침내 온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이다. 창조의 내적 역동 (즉 인간이 그것을 다스린다는 규칙)이 실수였다고 선언하거나, 혹은 언약의 내적 역동 (즉 이스라엘이 민족들을 구원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는 규칙)이 실패했다고 선언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두 가지 모두를 성취하심으로써 왕이 되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인들에게 쓴 바울의 편지가 말하고자 하는 대략적인 요지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목적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의미가 자신의 추종자들을 준비시켜서 데리고 갈 ‘천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부름 받을 성령이 인도하시는 일을 통해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악의 문제는 오직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도 임할 수가 있다.
이것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이야기이며, 그 나라의 시작과 함께 악의 세력은 결정적으로 패배당하고, 새로운 창조가 마침내 시작된다는 이야기다.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그 새로운 세상을 실현시키라는 임명을 받고 그것을 시행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대속’, ‘구속’ 그리고 ‘구원’은 그 도중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일에 참여하려면 그들 자신이 먼저 이 세상을 노예로 삼고 있는 세력으로부터 구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들도 구출하는 자가 될 수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돕고 싶다면 반드시 십자가의 길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만약 예수님의 구속적 죽음의 덕을 보고 싶다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프로젝트에 참여해야만 한다. 네 개의 복음서를 통해 다채롭게 이야기가 전해지기는 했지만 예수님은 단 한 분이시며, 복음도 하나다.
따라서 천국의 통치, 하나님의 통치는 이 세상에서 실현되어야 하며, 그 결과 현재와 미래 모두에서 구원이 일어나야 한다. 그 구원은 인간을 위한 구원이면서 동시에 구원받은 인간을 통한 더 큰 세상의 구원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받은 사명의 굳건한 기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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