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우주적 구속에 대한 큰 그림을 대략적으로 제시했다. 하나님은 이 세계 전체를 구속하실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며 옛 세상의 부패와 타락의 콘크리트를 뚫고 올라오는 새싹이다. 마지막 구속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에너지의 폭발로 하늘과 땅이 드디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이 될 것이다. 부활절은 바로 그 원형이자 근원이다. 그 큰 그림을 앞 장에서 살펴본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와 합친다면 어떤 그림이 나오겠는가? 당연히 현재 예수님의 부재에 반대되는 예수님의 직접적 현존이 될 것이다.
현재에 우리가 아는 현존-말씀과 성례전 안에서, 성령에 의해서, 기도를 통해서, 가난한 자들의 얼굴 안에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현존-은 물론 그 미래의 현존과 연관되어 있지만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재로서는 성령과 말씀, 성례전과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부재중인 예수님이 우리에게 현존하신다. 그러나 언젠가는 예수님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우선은 그분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고, 그 다음은 그분이 심판관으로서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오심, 나타남, 드러남, 왕의 현존
첫 번째로 분명히 해야할 것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는 자신의 재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첫째, 예수님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재림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인용하고 있는 다니엘 7장의 맥락에서 고난 이후 자신의 정당성이 입증될 것을 이야기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오다’는 내려오는 움직임이 아니라 위로 올라가는 움직임이다. 맥락 속에서 볼 때 이 핵심 본문은 비록 예수님은 죽겠지만 그 이후에 오는 사건들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이 입증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 사건들이 무엇인지는, 문제가 되고 있는 본문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직 숨겨져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 사건이 진정성을 지니리라고 생각할 만한 좋은 이유가 된다. 거기에는 분명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명을 반대하는 체제였던 성전의 파괴가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이 언어는 중요하게도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일어난 이상한 일들-예수님의 ‘승천’, 예수님의 영화, 이 땅으로가 아니라 하늘로, 즉 아버지께로 가는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장 덜 부적절한 방식으로, 초대교회가 사용했던 바로 그 언어다.
둘째, 잠시 떠나면서 종이나 하인에게 주인이 없는 동안 주인의 돈을 가지고 장사하도록 하는 왕 혹은 주인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는, 원래 예수님의 종국적인 재림 때까지 해야 할 임무들을 교회에 맡기고 떠나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비록 꽤 일찍부터 그런 식으로 읽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 이야기들은 1세기의 유대교 세계에 속한 이야기이고,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즉시 알아 ‘들었을’ 것이다. 즉 유배 시대에 이스라엘과 성전을 떠나셨다가 드디어 유배 후기의 선지자들이 말한 것처럼 다시 이스라엘로, 시온으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이야기로 말이다. 원래의 배경에서 보면 그 이야기들의 요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가 정말로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성전으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인간 안으로 그리고 그 인간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라 초림에 대한 것이다. 비록 비밀스럽게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심판과 구원을 실행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신 예수님의 그 행위는 야훼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바로 그 일이라고 예수님 자신이 믿었음을 보여 주는 이야기들이다.
신약성경 그 어디에도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오실 때, 자기 주인의 돈을 손수건에 잘 싸놓았다는 이유로 그 악한 종이 심판받은 것처럼 예수님의 종들 중에도 심판받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없다.
부활, 승천 그리고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통해 나타나는 예수님의 정당성은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또 다른 사건을 여전히 요구한다. ‘재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님의 정당성이 입증되고,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난 후에 교회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었고 그렇게 가르쳤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님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라고 천사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비록 사도행전이 이 믿음을 자주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 책의 내용 전체가 그 규정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것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예수님이 오실 그 날을 대비해서 제자들은 온 세상에 예수님의 주되심을 알리는 것이다.
헬라어 ‘파루시아’(parousia)다. 이 단어는 보통 ‘오다’로 번역되는데, 그 문자적인 의미는 ‘현존’, 즉 ‘부재’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현존’이다.
첫 번째 의미는 신 혹은 신성의 신비로운 현존이었다. 특히 그 신의 능력이 치유로 나타날 때의 현존을 의미했다. 그때 사람들은 갑자기 초자연적이고 강력한 ‘현존’을 인식하게 되고, 그것을 일컫는 자명한 단어는 ‘파루시아’였다.
두 번째 의미는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속국을 방문한다는 의미인데, 특히 왕이나 황제가 식민지나 지방을 방문할 때 쓰인다. 그러한 방문을 일컫는 단어는 ‘왕의 현존’(royal presence)인데 헬라어로 ‘파루시아’다. 두 가지 의미의 배경 모두 구름타고 날아다니는 사람에 대한 언급은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하게 보게 된다. 또한 시공간의 우주가 곧 붕괴되거나 파괴될 것이라고 하는 암시도 전혀 없다.
미래에 대한 모든 기독교적 언어는 안개를 가리키는 일련의 이정표 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한다. 이정표는 그 길 끝에서 우리가 보게 될 것의 사진을 미리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 이정표들은 분명 진실을 말해 주고 있는데, 미래에 대한 특정한 종류의 진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공중에서’ 주를 ‘만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의 요점은, 대중적인 휴거 신학과는 달리 구원받은 신자들이 땅으로부터 떨어진 공중 어딘가에서 그냥 머문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의 요점은 돌아오시는 주님을 만나러 나갔다가 그분의 땅으로, 즉 자신들이 처음 출발했던 그 장소로 왕이신 주님을 호위해 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직접 현존하실 것이고, 죽은 자가 부활할 것이고,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변화될 것이다.
예수님은 현재 하늘에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도 보았듯이 하늘은 하나님의 공간으로서 우리 세계의 공간에 속한 어떤 장소가 아니라 비록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공간이다. 여기에서의 약속은 예수님이 단지 현재 세계 질서 안에 다시 나타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가 될 그때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이고, 우리가 그분 앞에 그리고 우리 서로에게 자신의 참 정체성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 그분은 ‘현존’하실 것이다.
그분이 현재 그분이 계신 그곳에서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지금 계신 곳은 우리가 속한 시공간의 세계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 우리가 ‘하늘’이라고 부르는 세계다. 이 세계는 우리의 세계-‘땅’-와는 다르지만 수많은 방식으로 서로 교차되어 있으며 특히 그리스도인 자신의 내적 삶에서 교차된다. 언젠가는 이 두 개의 세계가 완전하게 통합되어 서로를 온전히 다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바울과 요한이 이야기하는 그런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부활절이 예시하는 이 세상의 위대한 회복과 함께 예수님 자신이 직접 나타나셔서 이 세상 전체와 신자들에게 일어날 변화의 대행자이시자 모범이 되실 그때가 언젠가는 올 것이고, 정말로 그때는 아무 때일 수도 있다. 신약성경에 그토록 분명하게 표현된 이와 같은 기대와 희망은 2세기와 그 이후의 세기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다. 초대교회의 주류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건이 그 세대 안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걱정하지 않았다.
그분이 오실 때 그는 특별한 역할을 하실 터인데, 바로 심판관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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