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이 세상을 최종적으로 바로잡으실 창조주 하나님의 심판이 정말로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성경에서는 특히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좋은 일이며 축하하고 기다리고 갈망할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심판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쁨에 차서 외치게 하고, 들판의 나무들로 하여금 손뼉을 치게 하는 일이다. 체계적인 불의, 억압, 폭력, 오만 그리고 압제의 세계에서는, 악한 자가 확실하게 자기 분수를 알게 되고, 가난하고 약한 자가 자신들의 합당한 몫을 받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무엇보다도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반항하는 세계, 착취와 사악함이 가득한 세계 앞에서 선하신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 되실 수밖에 없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그들의 신앙이, 그분이 최후의 심판관으로 오실 것이라는 신앙을 형성한 결정적 요소였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이 임명하신 사람을 통해서 이 세상을 심판할 날을 정하셨는데, 그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킴으로써 그 사실을 보증하셨다고 진술한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이 메시아 예수를 통해 모든 사람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거의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언급하고 있다(롬 2:16).
행위에 따른 미래의 심판이라는 그림은 사실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하는 바울 신학의 기초다. 믿음에 의한 칭의의 요점은 하나님이 갑자기 좋은 태도나 도덕성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 의한 칭의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게 될 미래의 판결을 예견하면서 현재에 일어나는 일이다. 복음을 믿으면 그 사람은 자신의 부모가 누구이건 간에 이미 하나님의 가족이며,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죄를 용서받았고, 미래에는 바울이 말한 대로 “이제 결코 정죄함이 없는”(롬 8:1) 상태가 된다고 하나님은 미리 선언하셨다.
바울에게는 현재 시점의 믿음에 의한 칭의와 미래 시점의 행위에 따른 심판 사이에 아무런 충돌이 없었다. 그 두 가지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의존해 있다.
모든 미래의 심판이 기본적으로 나쁜 소식이 아니라 좋은 소식으로 강조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이 좋은 소식인 이유는 우선 하나님의 정의로 이 세상을 휩쓰실 분이, 무자비하고 오만하고 복수심에 찬 폭군이 아니라 슬픔을 아셨던 비탄에 젖은 예수님,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이 세상이 받을 심판을 대신 받으셨던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또한 이 세상을 자기들 마음대로 갈라놓은 체제와 통치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독특한 자리에 놓이시며, 신약성경도 그 점을 곳곳에서 지적한다. 예수님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우상숭배와 환락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진영으로 갔던 것과 같은 모습의 심판자로 오신다. 시스티나 성당의 그림은 명백한 사악함뿐만 아니라 무책임하고 무심한 삶도 책망을 받게 될 그날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신약성경과 그 이후의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심판이 특정 상황하에서 예견되고 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성만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모든 이의 구세주이실 뿐 아니라 심판자이신 그분을 지금 여기에서 대면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16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연히 성령의 사역도 마찬가지다.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죄에 대해, 의와 심판에 대해 이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예수님은 선언하셨다. 다시 말해서 최후의 심판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현재의 세상에서 예견된다는 뜻이다.
재림과 심판
첫째, 예수님의 나타남 혹은 오심은 문자주의적 근본주의자들과 ‘우주적 그리스도’의 개념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답변을 제공한다. 예수님은 교회와 다르고 이 세상과도 다르다. 성령에 의해 교회와 세상 모두에 현존하시지만 그것과 동격은 아니시다. 예수님은 현재 이 세상과 맞서고 계시며, 나중에는 직접 나타나서 맞서실 것이다. 그분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빌 2:6-8), 바로 그분 앞에 모든 무릎이 꿇게 될 것이다(빌 2:10-11). 바울이 강조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전자의 일을 하셨기 때문에 후자의 일도 일어나는 것이다. 그분이 나타나신다는 것은, 현재의 세계를 거절하는 이원론도 아니고 마치 우주인처럼 이 세상으로 그분이 그냥 들어오시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포함한 현 세상의 변화이며, 그것을 통해 드디어 이 세상이 바로잡히고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다. 죽음과 부패 자체가 극복될 것이고 하나님은 만유 가운데 계실 것이다.
두 번째로, 이것은 기독교 세계관에 올바른 형태와 균형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유대교의 세계관처럼, 그러나 스토아주의, 플라톤주의, 힌두교와 불교의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그리스도인들은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의 끝에 가서 그 종결이 없다는 것은-같은 일이 계속 반복해서 일어나거나 혹은 카르마의 작용이 길게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있는, 끝도 없이 돌고 도는 원의 상태로 남게 된다는 것은-사도들과 수많은 유대교 선조들이 들려준 이야기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교회로 축소되거나 이 세상으로 축소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주권적 주되심을 편리하게 자신을 위한 변명으로 삼는 승리주의를 부인할 수 있다. 또한 최고와 최선의 기독교 단체, 조직, 지도자 그리고 추종자들도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고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희망이 꺾여-언제나 그렇게 희망은 꺾일 것이다-절망하지 않을 수 있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과 나타남 사이에 살고 있기 때문에, 즉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지만 아직은 그분의 최종적 오심과 현존을 기다리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겸손하면서 동시에 제대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12)
세 번째, 이러한 이유로 승천과 ‘파루시아’ 사이에서 교회는 자기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가동력의 에너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또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절망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기는 한다. 우리가 승천하신 주님께 순종하면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현재에 하는 모든 일은 그분이 나타나실 때에 향상될 것이고 변화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바울이 고린도전서 3:10-17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당연히 심판의 어조도 가지고 있다. 그 ‘날’에는 각각의 건축자가 무슨 일을 했는지 다 드러날 것이다.
특히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현재 통치하신다는 사실과 마지막 때에 나타나셔서 심판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인해 우리는 명쾌한 이해력과 현실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오늘날의 정치적 담론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이 이미 주님이시고 이 세상의 심판관으로 다시 나타나실 것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이 세상에서 살고 생각하라는 부름을 받았고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다(이것은 다소 완화시켜서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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