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
신약성경을 보면 나사렛 예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은 그의 승천을 믿는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시편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님은 그 하늘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
승천을 부활에 흡수시키거나 부활을 승천에 흡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활과 승천은 (물론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초대교회의 사상 안에서 서로 매우 다른 역할을 한다.
기본적으로 성경적 우주론에서 하늘과 땅은 공간이나 물질의 동일 연속체 안에 있는 두 개의 다른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속한 서로 다른 두 개의 영역이다. 그리고 하늘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하늘은 땅과 접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존재는 동시에 땅의 그 어느 곳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승천이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지구상의 특정 지점으로 여행하지 않아도 그분을 만날 수 있고 그분께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 하늘은 말하자면 땅의 통제실이다. 그곳은 최고 경영자의 사무실이며 지시가 내려지는 곳이다. 마태복음 끝에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어느 궁극적 미래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도 그리고 하늘뿐만 아니라 땅도 ‘지휘하고’ 계시다. 마치 다국적 기업을 대표하는 전령사처럼, 새로운 최고 경영자가 책임을 맡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방법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와 서로 일치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으로부터 힘을 받은 교회가, 연약한 상태로, 고난받으며, 찬양하며, 기도하며, 오해받으며, 오판받으며, 정당성을 입증받으며, 축하하며 이 세상으로 나아갈 때 임할 것이다. 바울이 어느 편지에서 말하듯이 언제나 몸에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고서 예수님의 생명 또한 나타나게 할 때 비로소 임할 것이다.
승천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대답은 교회가 확장되어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교회와 어느 정도 일치하게 된다면, 다시 말해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주님으로서 그 백성 위에 계시면서 하늘에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 가운데 계시는 존재로 예수님에 대한 논의가 축소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최악의 승리주의로 가는 길을 트는 것이다. 20세기 영국의 자유주의가 바로 이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합리주의와 타협하고, 승천이란 ‘사실’ 예수님이 어느 곳에서든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그리고 자신을 이 세상의 종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대신에 교회는 자신의 구조와 위계, 자신의 관습과 기벽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을 효과적으로 제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승리주의의 다른 측면은 절망이다. 교회가 곧 예수님이라는 공식에 모든 것을 건다면, 바울이 같은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깨진 질그릇이라는 것이 밝혀질 때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만약 교회가 자신의 구조, 지도력, 전례, 건물 혹은 다른 그 어떤 것을 자신의 주님과 동일시한다면-승천을 무시하거나 승천은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 해버리면 그러한 동일시가 일어난다-어떻게 되겠는가? 한편으로는 셰익스피어가 “직위의 오만”이라고 부른 일이 일어날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그것이 효과가 없음을 깨달으면서 중세 후기의 절망이 나타날 것이다(1950년대와 1960년대의 어설픈 합리주의에 푹 빠졌던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현상을 자주 본다). 교회는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은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굳건하게 붙잡을 때에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승천의 진리를 굳건굳건하게 붙잡을 때에만,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참으로 함께하시는 분이 동시에 이상하게 부재하시고, 이상하게 우리와는 다른 존재이고, 이상하게 우리와는 대조되는 주님, 즉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붙잡지 말라고 말씀하신 그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굳건하게 붙잡을 때에만 우리는 텅 빈 승리주의로부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얄팍한 절망으로부터 구출될 것이다.
역으로 예수님이 우리보다 앞서서 하나님의 공간,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셔서 이미 합당한 주로서 이 반란의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오른 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붙잡고 축하할 때에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승천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현재에도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서 하시는 일을 붙잡고 축하할 때에만 우리는 세계 역사에 대한 잘못된 관점으로부터 구출될 것이고, 현재에 이루어야 하는 정의의 임무를 맡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 대신에 다른 중보자들, 특히 다른 여성 중보자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시도들로부터도 구출될 것이다. 승천을 제대로 이해하면 교회, 성례전,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관점이 다시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 특히 예수님에 대한 진실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하려면 삼위일체의 교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란 예수님이 하나님 그리고 성령과 여전히 동일시되면서도 (지상에서의 삶이 이후에 그냥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님과 구분되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 가까이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기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와는 별개로 존재하신다는 점에서) 성령과도 구분되는, 예수님만이 가진 인간성을 이해하고 축하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오만에 종지부를 찍는다.
승천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며,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씨름을 포기하고(아울러 우리가 그 일에 지속적으로 실패하는 데 따르는 불가피한 절망도 그만두고), 피조물로서-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이지만 여전히 피조물인-우리의 지위를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승천은 진정한 인간으로 남아 있는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중요한 의미에서 그분의 부재를, 또 한 가지 의미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한편으로는 성령이, 다른 한편으로는 성례전이 매우 중요하게 부각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임재하시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 이 세상의 주도권을 잡은 인간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 바로 그분이 우리를 위해 지금 중보하고 계시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보다도 우선이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도 더욱더 우선이다. 그러한 느낌이란 당연히 우리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서 오락가락하는 것 아닌가.
예수님이 여전히 실제로 육체를 가진 인간-사실 우리보다 더 충실하게 육체를 가진 인간-이지만 지금 현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가 정말로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다르다.
성경이 ‘하늘’과 ‘땅’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같은 시공간 연속체 안에 있는 서로 연결된 두 개의 지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비물질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두 가지 다른 종류,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의 두 가지 다른 종류 그리고 (비록 이것이 앞의 두 가지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두 가지 다른 종류(충분히 가능한 일이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승천을 통해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간과 우리의 공간-다시 말해서 하늘과 땅-은 비록 매우 다르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하늘’에 대한 논의는 단지 우리 자신의 영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은유적인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간과 우리의 공간은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맞물려 있고 교차하는데, 심지어 그 두 개가 각각 구분되는-적어도 지금은 구분되는-정체성과 역할을 유지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서로 맞물려 있고 교차한다. 언젠가 그 둘은 매우 새로운 방식으로 서로 합쳐질 것이고, 서로에게 열려 있고 서로를 볼 수 있을 것이며, 영원히 결합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 하나님이 조성하신 공간의 핵심 인물인 예수님이-웨슬리가 표한한 대로 “수난의 그 소중한 표시를” 자신의 “빛나는 육체”에 지금도 지니고 계시는 인간 예수님이-우리가 현재 아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고 우리도 그분 앞에 나타날 것이다. 승천에 대한 다른 절반의 진실은 사도행전 1:11에서 천사들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이 돌아오신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복음서나 사도행전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이 천국으로 가셨으니 우리도 그분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자”라는 식의 말에 근접한 말은 없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시면서 천국에 계시는데 그 통치를 완성하기 위해 언젠가 돌아오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재림’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이 이 우주 전체를 새롭게 하실 때 예수님 자신이 새로운 세계의 중심이자 핵심으로 직접 나타나실 것이라고 신약성경은 주장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고 해결하시고 그저 안도의 한숨만 이끌어낸다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들판에서 바다와 홍수에서 기쁨의 외침을 이끌어내실 것이라는 뜻이다.
‘종말론’이라는 단어는 초기 기독교와 관련해서 그 세대 안에 예수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대하는 의미로 종종 사용되었고, 그 일이 일어나지 않자 재림을 다시 정의한 것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그러한 기대는, 머지않아 세상에 종말이 오리라는 1세기 유대인들의 기대에 기초하고 있었고 또 그 기대에 새롭게 초점을 맞추어 주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 세대 안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걱정한 것은 아니며, 그들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유대교가 가졌던 기대는 오히려 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 현재 세계 질서 안에서 일어나는 극적인 변화였다.
‘마지막 것들에 대한 연구’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닌 ‘종말론’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전들이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단지 죽음, 심판, 천국, 지옥에 대한 것이 아니다. 종말론은 대부분의 1세기 유대인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강력하게 믿었던 내용, 즉 하나님의 인도 하에 이 역사가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가는 방향은 정의, 치유 그리고 희망이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라는 믿음에 대한 것이다. 현재의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으로의 이동은 현재 시공간의 우주가 파괴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치유의 문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이 세상의 미래에 대한 전체적인 인식이며 그 미래가 이미 현재에 우리를 만나러 오기 시작했다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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