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진보’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이 스스로의 힘으로, 심지어 하나님의 꾸준한 영향으로 인해 갈수록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이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기 때문에 아예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원론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부활절에 예수님에게 하신 일을 이 우주 전체를 위해서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희망의 근본적 구조
첫째는, 창조의 선함이다.
이 세상이 선한 것은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자연’으로서가 아니라 창조물로서 선한 것이다. 여기에는 범신론이나 심지어 만유 내재신설의 암시가 전혀 없다. 하나님과 이 세상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저 ‘신’이라고 불리는 무엇 안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다. 성경 신학이 여전히 주장하는 것은 살아계신 한 하나님이 자신과는 별개인 세상, 자기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창조는 처음부터 사랑의 행위였고 타자의 선함을 확인하는 행위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고 매우 좋다고 하셨다. 그러나 창조계 자체가 신적인 것은 아니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인간의 창조가 그 창조의 정점을 이루는데, 그 정점은 하나님을 반영하도록 고안되었다. 인간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자신을 다시 반영해 드리고, 청지기 됨을 통해서 나머지 창조계에 하나님을 반영하도록 고안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격이 그 자체로 신성과 같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구분을 없애 버리는 것은 범신론으로 바짝 다가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범신론에는 악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둘째 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둘째는, 악의 성질이다. 성경 신학 안에서 악은 실재적이고 강력하지만 피조성이 곧 악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악한 것도 아니고(유일하신 하나님이 사랑으로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선하다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천국에서 순수한 영혼으로 남아 있는 대신 물리적인 재료로 만들어져 시공간 안에서 산다는 사실이 곧 악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부패할 수밖에 없고 변화무쌍하다는 사실이 곧 악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창조계는 선하다. 하지만 창조계는 언제나 지향하는 바가 있었다. 변화무쌍함은 하나님이 주신 이정표의 역할을 하는데, 그 이정표는 물질적 세계에서 비물질적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세계에서 언젠가는 그것이 되어야 하는 세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현재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미래를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종말론적 이원성(현재의 시대와 앞으로 올 시대)이지 존재론적 이원론(악한 ‘땅’과 선한 ‘천국’)이 아니다.
그렇다면 악은 피조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 대신에 그 자연 세계의 어떤 부분들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반항적 우상 숭배에 있다. 그 결과 이 우주가 엉망이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리해서 지혜롭게 창조계를 다스리는 대신에 창조주를 무시하고 하나님보다 요구가 덜한 어떤 것, 그들에게 권력이나 쾌락이라는 단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줄 어떤 것을 예배하려고 한다. 그 결과 선한 창조의 자연스런 변화의 일부였던 죽음이 두 번째의 영역을 얻게 되는데, 성경은 그것을 때로 ‘영적 죽음’이라고 부른다. 창세기에서, 그리고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죽음이 갖는 지배적인 이미지는 유배다. 아담과 이브는 그들이 그 열매를 먹은 그날 죽으리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은 동산에서 쫓겨난 일이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등을 돌리는 행위 자체가 생명이 없는 것을 향해 서는 것이다. 변화무쌍한 것을 예배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죽음밖에 줄 것이 없다. 그런데 그러한 우상 숭배를 실제로 행하게 되면 악이 이 세상에 고삐 풀린 채 들어와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상상도 못할 수많은 결과를 낳는다. 선하지만 불완전한 창조계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덧없음과 부패의 성질에 악이 뒤섞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자연 악’(natural evil)을 하늘과 땅이 최종적으로 ‘진동’할 것을 미리 보여 주는 예표로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세상이 탄생하려면 그러한 진동이 꼭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쓰는 ‘자연 악’이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인지도 모른다.
셋째, 구속의 계획이다. 창조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처럼 구속 역시 그 창조의 주체가 기쁘고 즐겁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면서 하게 되는 일이다. 구속의 요점은, 있는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속박된 것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악이 물질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항에 있다고 분석하기 때문에, 인간과 이 세상이 속박되어 있는 원인 역시 악이 형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만약에 형체를 갖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면 구속이란 그저 육체가 죽고 그 결과로 혼이나 영이 자유롭게 풀려나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됨의 상태는 바로 죄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구속이란 궁극적으로 영이나 혼의 선함만이 아니라 새로운 육체를 입은 삶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제시하는 계획이며, 그 계획은 하나님이 구속의 수단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길고도 다사다난한 이야기를 거쳐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는 사건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유대교 전통에서 이미 예시가 되었고, 특히 하나님이 이 땅 위에서 살기로 선택하신 장소인 성전을 통해서도 예시가 되었던 성육신은, 고대든 현대든 플라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범주적 오류(category mistake, 의미론적 혹은 존재론적 오류로서, 특정 속성을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에 그 속성을 부여하는 오류다-역주) 가 아니다. 그것은 선하고 지혜로운 창조주가 세우신 장기적인 계획의 핵심이자 성취다.
이 이야기를 선한 창조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예수님의 오심은 모든 창조물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순간이 된다. 인간은 창조계를 돌보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하신 아들,-이 분을 통해서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영원하신 지혜가 인간이 되어 진정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자신이 만든 모든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를 인간의 반항과 그 결과로 온 세상을 휩쓸게 된 죄와 죽음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렇다 해도 그 순간은 모든 창조물이 기다리던 순간이 된다. 아버지의 영원하신 사랑이 성육신으로 표현되어 자신을 내어주는 죽음을 통해,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는 죽음을 통해 이 창조계 전체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의 진정한 ‘우주적 기독론’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단절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일종의 범신론이 아니라 선한 창조계가 지혜로운 창조주와 다시 조화를 이루게 되는 행위로써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면서 예수님의 관점에서 유대교의 지혜 이야기를 새롭게 들려주는 것이다.
구속은 창조계를 손상시키고 왜곡시키는 악의 문제를 해결한 후에 그것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려진, 처음과 동일하신 그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다. 처음부터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들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일어난 일이 결코 복음을 믿어 현재와 그 이후에 새로운 생명을 얻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온전히 보거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 영향은 우주의 깊은 곳에까지 다 미친다.
창조, 악 그리고 구속의 계획(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났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의 저자들, 특히 바울과 계시록의 저자가 표현하고자 변함없이 애쓴 주제들이다.
파종과 추수
‘첫 열매’ 이미지는 유월절과 오순절이라는 유대교 축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두 가지 축제 모두 농업 축제이며 구원과 관련된 역사적 축제였다. 유월절에는 보리의 첫 수확을 하나님 앞에 바쳤다. 그로부터 칠 주 뒤에 오는 오순절은 밀의 첫 수확을 바치는 시기였다. 첫 열매를 바치는 행위는 앞으로 있을 큰 추수를 상징한다. 구원 역사의 차원에서 보자면 물론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날을 기념했고, 칠 주 뒤에 오는 오순절은 시내 산에 도착한 것과 토라를 받은 것을 기념했다. 이 두 개의 가닥은 서로 엮여 있는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는 이스라엘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며 그 땅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라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유월절의 이미지를 예수님에게 적용시킨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처음으로 부활한 첫 열매다. 그러나 이 사건은 별도의 사건이 아니다. 첫 열매의 요점은 그 뒤로 더 많은 수확이 뒤따르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유월절, 즉 갈보리와 부활절은 실제로 유월절에 일어났고 아주 초기부터 그 축제에 비추어 해석되었는데, 그 사건은 거대한 노예 소유주인 이집트, 즉 죄와 죽음 자체가 예수님이 죽음의 홍해를 지나 반대편으로 건너가셨을 때 패배당했음을 암시했다. 이어서 바울은 다음 장에서 그리스도인이 갖게 될 부활체의 성질을 예수님이 받은 새로운 몸에 기초해서 설명한다. 영지주의로 기울어진 모든 경향과는 반대로, 이 이미지가 어떻게 불연속성뿐만 아니라 연속성도 암시하고 있는지에 주목하기 바란다. 또한 모든 진화론적 낙관주의와는 반대로,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하는 단계로 나아갈 때에도 역시 연속성뿐만 아니라 불연속성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주목하기 바란다. 특히 이 이야기를 통해 상징화된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은 순전히 은혜의 행위로밖에는 볼 수가 없다. ‘진보’만으로는 결코 그런 일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승리의 전쟁
왕이 존재하는 모든 적을 진압함으로써 자신의 왕국을 설립하는 이미지.
바울은 우주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게 복종할 때까지 예수님이 다스릴 것이라는 사실과, 하나님 아버지는 그 다스림의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동일하게 강조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
새 창조 신학.
우주 전체에 있는 모든 세력, 모든 권위가 메시아에게 굴복할 것이고, 마지막에는 죽음 그 자체가 자신의 권력을 내놓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우주의 항시적인 상태라고 간주하고 싶은 것들-엔트로피, 위협적인 혼돈 그리고 붕괴-이 창조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행동하시는 메시아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이 부활절에 예수님을 위해서 하신 일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를 위해서 하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을 때 하신 새 창조의 행위에 비견될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새로운 창조의 행위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부활했다고 말할 때 나타나는 직접적인 결과를 한눈에 다 보게 된다. 만일 죽음 이후에 예수님이 비육체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다면 죽음은 패배당한 것이 아니다. 죽음은 손상되지 않은 채로 있고 그저 다르게 설명될 뿐이다. 그런 상태라면 예수님도, 인류도, 이 창조계도 지금과 같이 구체적 모양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미래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바울은 바로 그 점을 부인하는 것이다. 죽음은 선한 창조의 선한 일부가 아니라 최후의 적이다. 따라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진정한 주로 높임받기 위해서는 죽음이 반드시 패배당해야만 한다. 그렇게 될 때에만 이 세상의 주이신 메시아 예수가 그 나라의 통치권을 자신의 아버지에게 넘겨드리고 하나님은 만유 가운데 계시게 될 것이다.
하늘의 시민-땅의 식민화
모든 권세 위에 있는 예수님의 권위.
바울이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은 이 생이 끝난 후에 천국에 가서 살게 될 것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구원자, 주, 왕이신 예수님-물론 이것은 전부 왕에 대한 호칭이다-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와서 사람들의 현재 상황과 상태를 바꿀 것이라는 의미다. 여기에서 핵심 단어는 ‘변하게 하다’(transform)이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그날에 예수님은 현재의 육체성이 불필요한 것이고 따라서 폐기될 수 있다고 선언하시지 않을 것이다. 또 진화의 속도를 더함으로써 그냥 육체를 개선하기만 하시지도 않을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서 1:19-20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성취해 낸 것과 똑같은 위대한 권능으로 우리의 현재 몸을 변하게 해서 예수님과 같은 종류의 몸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복속시키는 일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빌립보서 3장은 비록 인간의 부활에 대해 우선적으로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일이 우주 전체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승리 안에서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만유 안에 계실 하나님
바울이 모든 역사의 목표로서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함이라”(15:28)라고 선언하는 부분을 보게 된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미래지향적인 세계관의 핵심을 매우 분명하게 진술한 것이다. 여기에서 시제는 미래다. 악에 대한 그리고 특히 죽음에 대한 최종적 승리가 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시는 순간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악과 공모하는 것이며, 죽음 자체와 공모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참으로 이 세상의 창조주라면 창조계가 하나님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창조가 사랑의 행위였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의 창조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창조하고 난 후에 그 사랑은 창조계가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고 섭리와 지혜로 그것을 보존할 뿐 제압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모든 창조계를 자신의 존재와 사랑으로 채우시고자 한다.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는 다른 존재들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자기 자신으로 덮어 버리고자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우주와 이 세계 전체가 자신의 사랑을 위한 저장소로 고안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심지어 기독교 미학의 일부로써 이 세상은 우리에게 그 창조주를 끊임없이 상기시킬 뿐 아니라 미래를 가리키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고, 넘쳐나고, 흠뻑 젖도록 고안되었다.
우주적 종말론의 형태로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불완전하다. 언젠가 반항의 모든 세력이 패배당하고 나면 그리고 창조계가 그 창조주의 사랑에 자유롭게 그리고 기쁘게 반응하게 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으로 그 세계를 채워서 그것이 하나님과는 별개의 독립적인 존재로 머무는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넘쳐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역설인데 자유롭게 주는 사랑은 자유롭게 되돌아오는 사랑을 위한 배경을 만들어 내고, 그렇게 순환하면서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연합은 서로를 배재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축하하며 온전하게 만들어 준다.
새로운 탄생
로마서 8장 새로운 탄생의 이미지.
바울은 다시 한 번 이집트 탈출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예수님이나 우리 자신이 아니라 창조계 전체에 그 이미지를 적용하고 있다. 그는 현재 창조계가 마치 이스라엘 자녀들처럼 노예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21절). 원래 하나님의 의도는 자신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인 인간을 통해, 생명을 주는 지혜로 이 창조계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미래를 위한 약속이었다. 언젠가 진정한 인간 존재, 하나님 자신의 형상, 하나님의 성육신한 아들이 와서 인류를 자신들의 진정한 정체성으로 이끌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한편 창조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을 받을 때까지, 즉 부활절에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 예수님의 모든 백성에게 일어날 때까지는 무익함과 변화무쌍과 부패에 종속되어 있을 것이다.
창조계 전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날, 그들의 부활이 창조계 자체의 새로운 생명을 알리게 되는 그 날을 갈망하며 학수고대하고 있다.
해산의 고통 이미지를 사용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는 것에 대한 유대교의 친숙한 은유다. 그는 23절에서 교회의 산통에 대해 또 몇 구절 뒤에는 성령의 산통에 대해 그리고 22절에서는 창조계 자체의 산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다시 한 번 연속성과 불연속성 모두를 강조한다. 이것은 단순히 창조계가 더 높은 삶의 방식으로 한 단계 올라가는 순탄한 진화의 이행이 아니다. 이것은 경련과 수축 그리고 어머니와 자식이 분리되어 두 개의 존재가 되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을 포함하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의 창조계가 변화무쌍하고 부패와 죽음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물질성을 거부하는 이원론도 아니다. 바울이 논증의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선택한 이 은유는 그가 창조계의 파괴나 그저 그것의 꾸준한 발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옛 창조의 자궁으로부터 새 창조가 격렬하고도 극적으로 탄생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음을 보여 준다.
하늘과 땅의 결혼
계시록 21-22장
결혼 이미지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해 치장한 신부처럼 하늘에서 내려온다.
빌립보서 3장에서처럼,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이 땅으로 내려온다. 실제로 교회 자체가, 천국의 예루살렘이 이 땅으로 내려온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주기도문에 대한 최종적 응답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에베소서 1:10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도와 약속은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총합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것은 피조물인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이 세상에 반영할 것이라는 창세기 1장의 약속이 최종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풍부한 상징의 이미지로 그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죽음을 영원히 패배시키고 없애 버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최종적 성취다. 이것은 창조계가 현재 처한 부패의 곤경으로부터 구출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하늘과 땅은 (계시록이 주장하기를) 남자와 여자처럼 서로를 위해 만들어졌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합쳐지고 나면,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축하하고 즐거워할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창조계의 징표이며, 창조계 안의 양극은 경쟁이 아니라 연합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징표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최종적 발언을 하는 것은 미움이 아닌 사랑의 징표이며, 창조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불모의 상태가 아니라 풍성한 열매 맺음의 징표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부패할 수밖에 없는 옛 하늘과 옛 땅을 대체한다. 이것은 내가 계속해서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쓸어 버리고 다시 시작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축하는 물론이고 죽음을 정복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드디어 완성에 도달하게 되는 오랜 준비도 없을 것이다. 본문의 내용이 전개되면서 어린 양의 아내인 신부가 아름답게 묘사된다. 그녀는 유배 시절의 선지자 에스겔이 약속한 새 예루살렘이다. 그러나 재건된 성전이 결과적으로 무대 중심을 차지하게 되는 에스겔의 환상과는 달리 이 도시에는 성전이 없다(21:22). 예루살렘 성전은 언제나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고 미래에 있을 그 임재를 앞서 상징하는 것으로 고안된 것이었다. 실재가 오게 되면 이정표는 더 이상 필요 없다.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그들 사이에 거하시면서 그 도시를 자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그 도시로부터 흘러나와 전 세계로 퍼져가는 생명의 강에 은혜와 치유를 부어 주실 것이다.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새 세상에서 맞이하게 될 미래에 대한 징표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은 사람들이 종종 생각하는 것처럼 구름 위에 앉아서 하프를 연주하는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뻗어나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리자가 되어 새로운 창조의 임무를 성취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영광을 축하하고 확장시킬 것이다.
나오는 말
예수님의 부활에 기초하고 있는 우주 전체의 미래 희망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미지는 이 세상 전체에 약속된 미래에 대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만큼의 혹은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일관된 그림을 제시해 준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그 미래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지혜로운 통치 아래서 부패와 죽음이 사라지고, 마치 어머니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현재의 창조가 새로운 창조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신약성경의 이 그림은 최첨단 물리학의 문제를 다루고 그것과 대화할 수 있는 틀(테야르 드 샤르댕과 그 외의 사람들이 제시했던 종합적 그림으로는 결코 불가능한)을 기독교의 희망에 제공해 준다.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과 같은 최근의 저자들이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창조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유기 혹은 진화가 아니라 구속과 회복이며, 그 두 가지는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 약속되고 보장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온 세상이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은 이어서 기독교적인 미래 희망과 관련된 다른 주제들-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는 것과 육체의 부활 그 자체-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새로운 세상의 베일이 벗겨지는 일의 핵심은 예수님 자신의 개인적 현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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