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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톰 라이트

4. 부활절의 특이한 이야기 / 1부 배경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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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례가 없는 이야기들

 

A.D. 30년(혹은 그 때가 언제였건 그 해)의 예루살렘 사건도 표면적으로 여러 내용들이 불일치한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한 불일치는 오히려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케 하는 합리적인 징조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 사건의 첫 목격자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들려 줄 정도로 당황했던 것이다.

(1) 첫째, 우리는 사복음서 이야기에서 이상하게도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부활 내러티브에는 두 개의 작은 예외만을 빼면 그러한 인용이 거의 없다. 이것이 더 놀라운 이유는, 바울이 활동하던 시기부터 일찌감치 공동의 신경에서는 부활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일어난 일임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다른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시편과 예언서들을 샅샅이 뒤지면서 이제 막 일어난 부활 사건을 설명해 주고 그 사건을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한 긴 이야기 안에 위치시키고 또한 그 이야기의 절정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 본문들을 찾았다.
(2) 이 이야기들의 두 번째 특이한 점은 좀더 자주 거론되는 특징인데, 주요 증인으로서 여자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네 개의 복음서 이야기에는 여자들이 전면에 그리고 중심에, 첫 증인으로서, 첫 사도로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이야기다.
(3) 세 번째 특이한 점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묘사다. 실제로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매우 정상적인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나타나시는데, 정원사로 혹은 같이 길을 가는 동료 여행자로 오해될 수도 있는 정상적 육체를 가진 존재로 나타나셨다. 그러나 또한 그 이야기에는 그 몸이 변형된 몸이라는 결정적인 징후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바로 이 점이 그 이야기들을 가장 신비로운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 그 몸은 확실히 물리적이었다. 그 몸은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죽은 그 몸의 재료들이 다 사용된 육체다. 그래서 그 무덤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또한 그 몸은 잠긴 문도 통과해 다니고, 사람들이 늘 알아보는 것도 아니고, 마지막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을 나누는 것이라고 대개 생각했던 얇은 막을 통과해 하나님의 공간, 즉 ‘천국’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전례가 없는 이야기다.
(4) 부활 이야기의 네 번째 특이한 점은 그 이야기들이 결코 미래의 기독교적 희망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약성경의 거의 모든 곳에서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는 예수님께 속한 자들이 언젠가는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최종적 희망과 연결되어 있고, 그와 같은 신자들의 부활은 현재에 세례와 태도의 변화를 통해서 예견되어야만 한다는 간략한 덧붙임 말이 따라오고 있다.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해석하자면, 부활은 매우 현 세상적이고 현 시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따라서 그분이 메시아시다, 따라서 그분이 이 세상의 진정한 주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분의 추종자로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전령이 되어 그분의 주되심을 온 세상에 공표하고 그분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게 해야 한다!

이 이야기들은 본질적으로 바울 이전의 매우 이른 시기의 것이며, 그 이후 전달이나 편집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약간 다듬은 것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으로 변경된 부분이 없다고 믿는 것이 훨씬 더 쉽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대략적이고 보편적인 증언이다. 새로운 종교적 체험이나 통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 예수님이 결국 메시아였고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가 결국에는 현재의 시간 안으로 뚫고 들어옴으로써 자신들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진 것이라고 그들이 단번에 그 의미를 해석하게 된 어떤 일, 그들로 하여금 유대교의 부활 신앙을 이교의 다른 신앙으로 대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몇 가지 서로 다른 그러나 일관된 변형을 일으키면서 오히려 그 부활 신앙을 다시 확인하게 해준 어떤 일, 그 어떤 일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존재가 되었고, 그러한 일을 했고, 그러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부활절과 역사

첫째, 예수님의 무덤은 정말로 비어 있었다. 둘째, 제자들은 예수님을 실제로 만났고 부활한 예수님이 단지 귀신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 만남이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빈 무덤이 반드시 있어야 그러한 신앙이 생겨난 이유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기록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그러나 두 가지를 같이 모아 놓으면 초기 기독교 신앙의 발생이 완전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설명된다.
‘인지적 부조화’란 사람들이 무엇인가가 사실이었으면 하고 절실하게 바라지만 그것에 반대되는 증거가 확실하게 있을 때, 그 반대되는 자료를 무시하고 오히려 더 요란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선언하는 현상이다.
부활은 죽음을 좀더 좋게 묘사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정복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리고 부활은 죽고 난 이후의 어느 시점에 일어나는 일이지 죽음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단연 최고의 역사적 설명은 나사렛 예수가 완전히 죽고 묻혔다가 정말로 세 번째 날에 (사람들이 때로 무시하듯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심폐 소생된 시체’가 아니라)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부활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원래 가졌던 몸의 재료를 ‘다 사용했기’ 때문에 빈 무덤만이 남았고, 아무도 기대하거나 상상하지 못했던, 그러나 그 육체를 만난 사람들은 생각을 크게 바꿀 수밖에 없었던 새로운 성질을 가진 새로운 종류의 물리적 몸을 가지고 부활했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왜 기독교가 시작되었고 왜 기독교가 그러한 형태를 띠게 되었는지를 완벽하게 설명해 줄 것이다.
만약 그러한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역사의 중심으로 간주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인식론의 중심, 즉 우리가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의 중심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1세기에 ‘부활’이라는 단어는, 육체적으로 철저하게 죽었던 사람이 육체적으로 철저하게 다시 살아난 것을 의미했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 혹은 ‘순전히 영적인’ 세계-그 세계가 어떠한 세계건-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활’은 공적 세계를 침범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이나 신학자 못지않게 역사나 과학을 공부한 사람에게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세계 안에서 일어난 아주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이제 시작되는 세계 안에서 일어난 매우 특징적이고, 원형적이고, 토대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옛 세상에서 일어난 부조리한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상징이자 시발점인 것이다.
창조와 정의의 하나님을 허용하는 세계관과 허용하지 않는 세계관 사이의 충돌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초월하지만 또한 포함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패러다임에 맞지 않는 무엇인가가 나타났거나 이런저런 방법을 다 시도해 보았는데도 해결되지 않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 한 가지는 바로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그 때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큰 전체 안에 그것을 포함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도마가 받은 도전이다.

믿음의 인식론- 도마
희망의 인식론- 바울
사랑의 인식론- 베드로

도마가 새로운 종류의 믿음으로 부름받았고, 바울이 근본적으로 새롭게 된 희망으로 부름받았다면, 베드로는 새로운 종류의 사랑으로 부름을 받았다.
부활은 현 세계 안에서 일어난 매우 독특한 사건이 아니다(비록 그러한 면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부활은 원칙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탄생하게 되는 새로운 창조 세계의 결정적 사건이다. 우리가 이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는 것은 둘째 치고 그것을 잠깐 보기만 하려해도 우리에게는 다른 종류의 앎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참여시키는 앎, 객관적 자세로 연구하는 유사 과학 연구의 냉정한 평가만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하는 인식론이 필요하다. 그러한 인식론을 가장 잘 요약해서 표현한 말이 ‘사랑’이며, 요한이 말하는 온전한 의미의 ‘아가페’다.
사랑은 가장 깊은 앎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실재에 완벽하게 관여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실재를 확인하고 축하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객관적으로 사실이거나 (따라서 냉정한 관찰자에 의해서 그렇게 지각될 수 있거나) 아니면 주관적으로 사실이거나 (따라서 실재적 공공 세계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쓸모가 없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하는 ‘객관’과 ‘주관’의 진부한 반정립이 사랑의 인식론에 의해서 극복되는 것이다. 새로운 공공 세계, 부활절에 시작된 세계, 예수님이 주이시고 카이사르는 주가 아닌 세계에서 살게 될 사람들에게 필요한 앎의 방식으로 대두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인식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역사적 논증이 참으로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도마와 바울, 베드로가 직면했던 질문들, 즉 믿음, 소망, 사랑의 질문들을 던지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앎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의 앎뿐만 아니라 역사적 앎과 과학적 앎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제일은 사랑이다.

나오는 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일은, 1세기에 일어난 오래된 사건을 연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21세기에 다시 희망을 발견하는 문제가 된다. 희망은 다른 세계관-부자와 권세 있는 자와 부도덕한 자가 최종적 발언을 하는 세계관이 아닌-이 가능하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을 때 생겨난다. 예수님의 부활이 요구하는 이러한 세계관의 전환은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전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