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고대 이교주의와 유대교에서 바라본 부활과 죽음 이후의 삶
‘부활’은 ‘죽음 이후의 삶’이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건 간에 그것이 있고 난 이후에 오는 새로운 육체적 삶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모든 이교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활을 부인하기 위해서든, (일부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활을 지지하기 위해서든, 고대인들이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그것을 두 단계로 보았는데, 육체적 죽음이라고 하는 중간 단계의 시기가 먼저 오고 그 이후에 새로운 육체적 생명을 의미하는 부활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부활’은 죽음 직후에 사람들이 들어가는 상태를 극적으로 혹은 생생하게 표현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 이후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일어날 수 있는-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일을 의미했다. 부활은 육체를 의미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말했을 때는, 그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리고 그 누구도 일어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예수님에게 일어났다는 의미였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궁극적인 부활을 믿었다. 즉 사람이 죽고 나면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돌보시다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이 세상 전체를 심판하시고 재창조하실 때 자기 백성에게 새로운 몸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바로 마르다가 나사로의 무덤 옆에서 예수님과 대화할 때 예수님의 말이 의미하는 바라고 생각했던 내용이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 이것이 바로 ‘부활’의 의미였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비유와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속적 통치(하나님 나라)가 (비록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고 바랐던 모습으로는 아니지만) 바로 지금 침입하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설명하셨다. 그러나 부활의 개념은 다시 정의할 시도조차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부활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 천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는 천사와 같을 것이라고(마태복음, 마가복음) 혹은 천사와 대등할 것이라고(누가복음)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하셨던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예수님이 생각하셨을 것이 분명한 그러한 일들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았을 가능성이 크고, 묵시적인 이미지와 은유로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자신의 죽음에-마카비우스를 따랐던 순교자들이 그랬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처럼-일종의 구원의 의미를 부여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논지였다. 그 세계에서는, 그와 같은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거기에다 ‘하나님께서 내가 죽은 후에 나의 정당함을 입증하시리라’라고 덧붙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기대했을 정당함의 입증 방식은 마카베오 2서가 증언하는 것처럼 당연히 부활일 것이다.
십자가형은 하나님 나라가 온 것이 아니라 오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메시아일 수도 있었던 사람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는 것은 그가 메시아가 아님을 의미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희망의 놀라운 특징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대해 가졌던 희망은 확고하게 부활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는 말부터 해야겠다.
그들이 사후의 목적지로서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그 ‘천국의’ 삶을 궁극적인 육체의 부활로 가는 도중에 일시적으로 거치는 단계로 보았다.
예수님이 강도에게 바로 그 날 그가 자신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낙원’은 그 다음 장에서 누가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듯이 결코 궁극적인 목적지가 될 수 없다. ‘낙원’은 하나님의 백성이 부활 이전에 안식하는 지극히 행복한 동산이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말씀하셨을 때 “거할 곳”을 일컫는 단어는 ‘모네’(monē)인데, 이 단어는 한시적인 거처를 의미한다. 바울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죽음 직후에 주님과 함께하는 지극히 행복한 삶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이것은 부활의 서막에 불과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미래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는 신앙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 첫 번째는 죽음과 (어떠한 형태이건 간에) 그 직후의 상태로 머무는 단계이고, 두 번째는 새롭게 재창조된 세상에서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사는 단계다.
(1) 그러한 수정 가운데서 첫 번째는 초기 기독교에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믿음의 편차가 사실상 없었다는 사실이다.
첫 두 세기의 거의 모든 시기 동안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부활이 무대의 중심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무대 전체를 차지한다.
(2) 초기 기독교에서는 부활이 주변에서 중심으로 옮겨 왔다.
(3) 초기 기독교에서는 새로운 육체란 비록 그것이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물리적인 객체라는 의미에서 확실히 육체이기는 하겠지만 변형된 육체, 즉 이전의 재료들이긴 하지만 새로운 속성을 가진 재료들로 만들어진 육체일 것이라는 인식이 처음부터 부활에 대한 믿음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활’의 실제 내용이 매우 정교해졌던 것이다.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식의, 현재의 ‘물리적인’ 육체와 미래의 ‘영적인’ 육체의 대조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영혼에 의해 살아가는 현재의 육체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살아가는 미래의 육체의 대조다. 그리고 미래의 육체에 대한 요점은 그것이 부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새로운 육체는 부패하지 않는 육체다. 가장 길게 이어지는 바울의 논쟁 중 하나이자 그 편지 전체의 핵심적 절정에 해당하는 그 장은 새로운 창조, 즉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계를 다시 만드시는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영지주의자들을 포함한 온갖 부류의 플라톤주의자들이 원하는 것처럼 그 창조계를 저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변형된 신체성[혹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역간)에서 쓴 표현대로 하자면, ‘초신체성’(transphysicality)]은 광체로 변형된 신체성이 아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부활 신앙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새로운 육체가 주어지면 그것은 변형된-그러나 주요 성경 본문이 암시했을 수도 있는 단 하나의 방식으로 변형되지는 않는-신체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하는 관점이다.
(4) 하나의 사건으로서 ‘부활’이 두 개로 나누어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부활’은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죽음을 면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사후에 영광스럽고도 존귀하게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 이후에 다시 육체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했다는 점이다.
부활이 마지막 때에 위대하게 일어나기 전에 역사 도중에 한 사람에게 먼저 일어남으로써,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최종적으로 부활할 것을 예견하고 보장할 것이라는 내용의 이미 임한 종말론을 믿는 무리는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없었고, 그 신앙은 기독교의 핵심이 된다.
(5) ‘협력적 종말론’(collaborative eschatol-ogy).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이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고 마지막 날 최종적 부활에서 완성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도록 부르셨다고 믿었다. 개인의 삶과 정치적 삶에서, 또 자신들의 사명과 거룩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성취를 실행하고, 그럼으로써 최종적 부활을 기대하며 살도록 부르셨다고 믿었다. 그냥 하나님이 ‘종말’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만약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인격으로 친히 임한 종말이고 하나님의 미래가 현재에 임한 그 분이시라면, 예수님께 속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입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변화시키는 책임을 맡고 있다고 믿었다.
(6) 부활은 은유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세례를 의미하는 부활이었고, 성령께서 가능하게 하시는 윤리적 순종에 힘쓰는 새로운 삶, 신자가 헌신한 새로운 삶을 의미하는 부활이었다.
또한 이러한 은유적인 의미가, 후대의 영지주의자들이 좋아했던 추상적인 혹은 ‘영적인’ 지시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지시물-세례와 윤리-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부활이 미래의 육체적 실존을 일컫는 문자적인 언어로 여전히 수용되면서, 동시에 이전에 존재하던 이스라엘의 인종적 회복과 관련된 강력한 은유적인 의미를 버리고, 전반적인 인간 존재의 회복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었다. 사실 초기 기독교 안에서 우리는 유배로부터의 귀환, 즉 이스라엘의 인종적·영토적 회복을 말하는 언어 자체가 이제는 현재의 인간 존재의 회복과 그들의 궁극적인 육체적 부활 모두를 일컫는 의미로 은유적으로 사용되는 현상을 보게 된다.
(7) 유대교의 부활 신앙 안에서 일어난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변형은 그것이 메시아주의와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유대교에서는 그 누구도 메시아가 죽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 누구도 메시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것은 부활 신앙 자체만의 놀라운 변형이 아니라 메시아 신앙 자체의 변형으로까지 이어진다. 바울 이전에 확립된 초기 신경(creed)의 단편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보여 주는 것처럼, 아주 일찍부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부활 때문에 예수님이 참된 메시아라고 단언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Lord)이고 따라서 카이사르는 주가 아니라고 하는 신앙이 아주 일찍부터 발전할 수 있었다.
바울에게도 이미 예수님의 부활과 미래에 있을 그 백성들의 부활이, 세상의 왕과는 다른 왕, 다른 주께 충성하는 기독교적 입장의 토대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죽음은 폭군(사탄을 일컬음-역주)의 마지막 무기인데, 많은 오해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요점은 죽음이 정복당했다는 것이다. 부활은 죽음을 다르게 설명한 것이 아니다. 부활은 죽음이 타도된 것이며, 죽음에 의존해서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이 타도된 것이다.
부활은 결코 존경받는 자리를 차지하는 길이 아니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자주 그랬다.
유일신, 선택, 그리고 종말론이라는 유대교의 신학 안에서 기독교는 역사, 희망, 그리고 해석학을 바라보는 전적으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적인 설명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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