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의 수수께끼
첫째, 로마서는 네 부분(1-4, 5-8, 9-11, 12-16장)이 마치 교향곡의 흐름처럼 함께 작용하면서 매우 절묘하고 세심하게 구성되어 있다. 각 부분은 나름의 내적 일관성과 문체, 분위기, 특징을 지닌다. 여러 면에서, 각 부분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확연한 구분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모든 부분을 관통하면서 로마서 전체를 단단하게 묶어 주는 큰 주제의 일관성과 전반적 흐름, 여러 맥락이 있다. 각 부분의 내용은 전체 그림에서 해당 부분의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말은 어느 한 부분만 따로 떼어 내어 ‘복음’의 진술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바울이 로마서 어느 대목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한 말은 그가 그 부분에서 제기하는 더 큰 주장의 일부다.
둘째, 로마서 해석은 로마서가 성경의 조직신학 안내서라는 인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말은 로마서가 특별한 목적을 위해 급히 써 내려갔기 때문에 더 큰 신학 형성에 부적절한 특별 ‘논문’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지만 사람들이 교회사의 특정 시점에서 토론하기 원했던 주제들—특히, 16세기와 그 이후의 ‘칭의’ 교리—을 로마서에 첨가한 것은 위험했다. 그 결과, 이후의 교리적 계획들이 특정 시점에서 ‘반드시’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상들이 정반대 증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한다고 전제되어 왔다.
셋째, 피조물의 회복이라는 이 주제에서 착안하여, 로마서는 사실상 내가 이 책에서 하나님의 구출 작전의 목표라고 명명한 놀라운 비전을 제공한다. 계시록을 비롯한 다른 초기 글들과 비슷하게, 바울에게도 예수님의 성취의 결과는 새로운 창조세계, 곧 인류가 ‘제사장 나라’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진정한 인류의 소명을 회복할 수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바울이 로마서 1장 18절에서 지적한 인간의 주요 문제는 ‘죄’가 아니라 ‘경건하지 않음’이다. 이것은 행위(물론 그것도 따라오지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예배의 문제다. 엉뚱한 신을 예배하면, 하나님의 현명한 질서를 세상에 반영하는 대신 왜곡을 반영하고 낳게 된다. 뭔가 어긋나고, ‘불의한’ 것을 낳게 된다. 바울은 그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경건하지 않음’은 ‘어긋난 것’, ‘불의’를 낳는다. 이 어긋남이 사물의 존재 방식과 충돌하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 진리를 포함하여 진리를 막게 되고, 이 악순환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신이 아닌 것을 예배하고, 진리와 거짓을 맞바꾼다.1:18-26
물론 우리는 이 모든 왜곡과 균열을 ‘죄’로 요약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울의 상세한 분석을 이해하지 못한 채 죄 문제로 곧장 들어가는 것은 그가 말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죄’는 단순히 ‘하나님이 금하신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 온전히 기능하지 못한 것이 죄다. 바울이 3장 23절에서 요약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그가 가리키는 영광이란, 진정한 인류가 마땅히 소유해야 하는 것이다. 이 ‘영광’은 시편 8편에서 말하는, 하나님 대신 그분의 세상을 돌볼 인간의 지위와 책임을 뜻한다. 참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함으로써 이 지위와 활동을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제사장 같은 소명이 뒷받침하는 왕 같은 소명이다.
당시 유대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희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로마서 8장이 뜻하는 바의 일부다. 즉 내주하시는 성령은 메시아 백성이 그분과 함께 새로운 창조 세계를 ‘지배할’ 뿐 아니라(8:18-25, 5:17에 근거해서), 세상을 위해 제사장으로 중보함을 뜻한다(8:26-27, 8:34을 내다보며).
복음의 핵심은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고, 열방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찬양하게 하는 것이다.15:8-9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목표가 인간이 메시아의 ‘왕’과 ‘제사장’ 사역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 데는 이 요약만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 로마서 5-8장과 새로운 출애굽
로마서 5장: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님나라의 도래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울의 주장에서 핵심은, 그분의 언약적 신실하심이다. 여기서 언약이란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다. 바울이 고대 문서를 해석한 내용에 따르면, 이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그 가문을 통해 하나님이 열방을 복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로마서 3장 21-26절은 사실상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에 대한 압축된 진술인데, 이 진술은 ‘속죄 신학’을 완벽하게 진술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성취된 ‘새로운 출애굽’, 특히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대해 요약한 것이다(‘구속redemption’이라는 단어는 거의 ‘출애굽’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구속은 노예 시장을 떠올리게 하지만, 성경의 주요 노예 시장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해방하신 애굽이었다.) 이스라엘의 실패에도,2:17-3:9 이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은 오랫동안 기다려 온 계획을 열매 맺게 하셨다.
이 새로운 출애굽은 인류를 애굽의 종살이가 아니라 ‘죄’에서 구출하여, 가나안이 아니라 회복된 창조세계라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다.
제2성전기에 ‘새로운 출애굽’에 대한 기대감은 ‘포로 귀환’, 신명기의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갈망과 결합되었다. 이 해방의 중심에는 ‘죄 사함’이 있을 텐데, 갈라디아서에서 본 것처럼 이 죄 사함은 이스라엘을 억압에서 해방하고 ‘이방 죄인들’이 하나님 백성으로 들어가게 할 것이다. 대체로 이것이 바울이 5-8장에서 설명하는 내용이다.
도입부5:1-5는 전체 주제를 선언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3:21-4:25에 대한 요약) 이들에게는 성령의 선물 때문에 소망,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이 있다. 5장 6-11절은 의롭다 하심에서 소망에 이르는 과정을 더 자세히 설명하고, 8장 31-39절에 나오는 최후의 경축을 기대한다. 우리가 약하고 불의한 죄인일 때 메시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면, 우리가 결국 그분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이것이 소망의 논리요, 또한 사랑의 논리다. 5장 6-11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8장 31-39절은 영광스럽게 경축하고 있다.
메시아의 죽음이 보장한 소망 덕분에, 바울은 한 걸음 물러서서 아담에서부터 메시아에 이르는 성경 전체 서사5:12-21를 훑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그 곤경에서 구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면, 이 목적은 이제 메시아 안에서 더 온전히 성취되었다. 메시아는 원래 창조세계를 단순히 회복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세계를 시작하셨다. 따라서 5장 15절과 17절에 “더욱더”라는 표현이 나오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받은 이들이 “생명 안에서 더욱더 지배할 것”17절라는 약속도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도 구원의 목표는 진정한 인간의 운명을 회복하는 것,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소명의 언약을 회복하는 것이다. 난해한 본문이지만, 이러한 해석 틀로 천천히 살펴보면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인류가 창조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공유하는 아담 프로젝트가 정상화된 것이다.
그분의 죽음은 “메시아 예수 한 사람을 통한 은혜 안의 선물”,15절 “이 선물”,16절 “[풍성한] 선물”,17절 “옳은 행위”,18절 “순종”19절인데, 이 중에서 마지막 표현은 빌립보서 2장 8절의 “죽기까지 순종하심”을 떠올리게 한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적 정의’의 사역으로 여겨진다. 이 표현은 바울이 21절에서 사용한 복잡한 언어를 번역하고 풀어내려 애쓴 흔적이다. 특히 이 표현은 하나님의 통치나 “은혜”의 지배5:21의 시작을 가리킨다. ‘은혜가 왕 노릇 한다’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로 여겨진 하나님나라의 줄임말이다.
즉 이 모두는 하나님나라의 언어 곧 하나님이 그분의 주권적 통치를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시작하신 방식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류를 구출하셔서 그 새로운 실재의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일부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셨다. 죄에서 해방된 이들은 자신의 적절한 역할을 다시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이 ‘혁명’이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통해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를 고려할 때 상당히 의미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 모든 내용은 몇몇 다양하지만 상보적인 각도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출하셨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졌는지는 설명해 주지 않는다. 목표는 언뜻 볼 수 있어도 그 수단은 알 수 없다. 그 내용은 아직이다.
그는 “율법이 함께 들어온 것은 범죄를 최대한도까지 가득 채우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강조체로 표시한 ‘려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은 어둠과 슬픔이 많았던 이스라엘 역사, 신명기의 ‘저주’로 향하는 오랜 내리막이 하나님의 목적 밖에 있지 않았다고 암시하고 있다. 율법 아래 있던 그 내리막이 구속의 통로가 될 것이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오랫동안 방황했던 포로기까지도 결국엔 구원의 목적의 일부였다. ‘려는 것’이라는 표현은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음을 암시한다. 우연이 아니었다. 악령이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한 것도 아니었다.
로마서 6-8장: 새로운 출애굽
로마서 6-8장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이것이 바울이 ‘묘사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 세 장은 바울이 로마서 3장 24절에서 하나님의 구원 목적의 계시를 “메시아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구속”으로 묘사했을 때 의미한 내용을 충분히 해설한 것이다.
‘구속(속량)’은 출애굽의 용어다. 로마서 6-8장은 조금 더 자세할 뿐 갈라디아서 4장 1-11절과 마찬가지로 출애굽 서사로 되어 있다. 바울은 왜 이 시점에 출애굽 서사를 기록하려 했을까? 예수님이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으로 유월절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때 이후로 초대교회는 유월절을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는 기본 통로로 사용했다. 바울은 이를 선택하여 기념한다. 우리가 본 대로 유월절은 악한 권세의 타도, 홍해를 건너는 하나님 백성의 구출, 율법 수여, 무엇보다도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장막에 거하러 오시며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길고도 험난한 여정에서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기이하고도 위험한 임재와 관련이 있었다. 이 모든 주제는 로마서 6-8장의 메시아와 성령 서사에서 본연의 의미를 찾는다. 그 중심에는 이번에도 메시아의 죽음이 있다.
로마서 6장 2-11절은 메시아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그분과 함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자신도 죽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것과 같았다. 세례의 물을 통과한 이들은 자신들이 노예 생활(‘애굽’)이라는 옛 세계를 뒤로하고 자신들의 유산인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광야의 이스라엘처럼(바울은 고전 10장에서도 이 암시를 가져온다) 옛 방식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죄’는 단순한 개인의 ‘죄sins’ 이상이다. 이 죄는 노예 주인, 간수, 홍해를 건너 그 손아귀에서 벗어난 바로 왕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 성취하신 것이다.
메시아가 죽으셨을 때 “여러분”—메시아에 속한 모든 사람, 그 “몸”의 일원인 모든 사람—도 동시에 죽임을 당했다. 메시아가 죽으셨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육체 안에 있는 죄를 정죄하고 계셨다.
예수님의 순종의 죽음이 새로운 종류의 권력, 주권적 구원의 사랑이라는 힘이 세상에 흘러나간 방식이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압제자들을 타도하시고 그 백성을 종살이에서 구출하셨을 때처럼, 새로운 현실이 탄생했다. 우리는 바울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세례를 가리키는 이미지로 사용한 것을 보았다. 세례 요한이 자신의 고유한 운동을 시작하면서 염두에 둔 것도 비슷했을 것이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늘 새로운 출애굽 운동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백성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적용되는 것은 모두 그 백성에게 적용되기에 이 모두가 ‘효력이 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그들도 죽었다. 그것이 직관에 어긋나는 듯해도 말이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신 메시아의 새로운 생명이 바로 ‘현재의 악한 세대’에 불쑥 뛰어든 ‘오는 세대’의 출발이다. 그분께 속한 사람은 자신이 그분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았기에 더 이상 옛 주인에게 복종할 의무가 없다는 믿음으로 믿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궁극적인 하나님나라 언어, 유월절 언어다. 이것은 바로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사로잡고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현재의 악한 세대’의 권세들이 패한 것과 관련이 있다.
적대 세력을 이기고 사람들을 치명적 억압에서 구출하는 것은 확실히 ‘큰 그림’ 곧 유월절과 하나님나라와 같은 그림이다.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셔서 이 광범위한 성취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서 예수님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현재의 악한 세대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셨”다.
이스라엘의 죄는 유배라는 결과를 가져왔고, 포로기는 연장되었으며, 그 결과 새로운 ‘종살이’가 나타났다. 그래서 죄 사함을 통해 새로운 유월절이 시행되어야 했다. 사복음서와 바울의 다른 서신서들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의 대표 대리적 죽음을 통해 죄를 용서받는다.
‘죄’는 단순히 인간이 저지른 잘못의 총합이 아니라 능동적 세력으로 취급된다. 물론 이것은 ‘죄’가 우상숭배의 결과라는, 내가 앞서 한 분석과 일치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힘을 다른 ‘세력들’에 넘겨주어서 그 노예가 되고 말았다.
‘유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메시지와 성취를, 오래 기다렸던 하나님나라의 도래로 보았는데, 이 하나님나라가 임하여 죄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고, 어둠의 권세들을 무력화하며, ‘오는 세대’를 불러올 것이다.
우리가 율법을 받은 것은 ‘죄’를 한 지점으로 가져가 거기서 영단번에 정죄하기 위해서라고 담대하게 주장한다. 그는 ‘토라 아래 있는 이스라엘’ 이야기는 죄를 쌓기 위해서, 한 장소에 모으기 위해서, 동시에 이스라엘의 대표자 메시아께 가져가기 위해서 의도되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시편 105편과 106편 같은 ‘쌍둥이’ 본문에서 보는 이중 서사—선택, 구출, 약속이라는 희망 찬 이야기와 반항, 실패, 포로기라는 어둡고 비참한 이야기—는 소망과 약속의 초점인 메시아와 율법이 쌓아 올린 죄가 만날 때 마침내 결합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그분의 죽음이 토라를 통해 쌓인 ‘죄’를 최종적으로 다루는 수단이 될 것이다.
‘요점’ 곧 예수님의 공생애의 목표와 목적은 전체 이야기에 비춘 의미를 뜻한다. 메시아는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
“율법이 함께”(아담-메시아 장면으로 함께) “들어온 것은 범죄를 최대한도까지 가득 채우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늘어난 곳에 은혜가 훨씬 더 넘쳤으니.” 앞에서 주목했듯이, ‘려는 것’이라는 표현은 의도적이고 중요했다. 바울은 이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라고 믿게 된 사람이 나중에 생각한 것이다. 오로지 예수님의 관점에서만,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로지 예수님의 관점에서만, 그는 하나님이 주신 토라가 ‘죄’를 더하는 효과가 있었을 뿐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원래 의도였다고 돌아볼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2절에서부터 ‘죄’를 대문자로 시작하는 단수로 언급했다. 이 ‘죄’는 세상에 풀려서 궁극적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힘이나 세력이다(“죄가 죽음 안에서 지배한 것같이”5:21). 여기서 ‘죄’는 인간의 잘못이 축적된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와 악이 불러온 권세들이 축적된 것인 듯하다. 이 권세들은 원래 인간이 소유해야 했는데, 우상숭배를 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 그 힘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죄’라는 단어로 이 모든 것을 의인화한다. 때로는 (최소한 7장 7-12절에서) 바울이 ‘사탄’이라고 해야 할 곳이나 창세기에서 뱀이라고 해야 할 곳에서 ‘죄’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의 요점은 이스라엘이 토라에서 아담의 죄를 발전하면서 반복한다는 것이다.
토라가 이스라엘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은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를 대규모로 실천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대규모’가 바울이 5장 12절-8장 4절에서 ‘죄’를 힘으로 언급한 이유에 기여한지도 모른다. 그것은 강력한 죄, 힘으로 바뀐 ‘죄’, 자라서 최악을 행하는 죄다.
하나님이 동산에서 주신 명령은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고, 토라에 주신 명령은 “탐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각 경우에, 죄는 그 명령을 절호의 기회로 붙잡았다. 바울은 7장 11절에서 “죄가 계명을 통해 기회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죄가 나를 속이고 계명을 통해 나를 죽였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즐거워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토라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매우 모호한 성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목적이 시행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언약 헌장으로 받아들였지만,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죄’를 드러내어 최대한 키우는 것뿐임을 알게 되었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성경이 반복해서 증언하듯이 반항과 우상숭배와 죄로 물든 백성에게 율법을 주실 때 처음부터 의도하신 바였다고 확인해 주고 있다.
하나님이 토라를 통해 이스라엘 가운데 하고 계시던 일은 ‘죄’를 한 장소에 모아서 정죄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형벌적 대속’ 교리를 분명하게 가르치는 곳이 있다면, 바로 여기다.
이스라엘을 통해 이스라엘과 함께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적 소명 서사 안에 자리하고 있다. 메시아에 초점을 맞춘 이 소명은 결국엔 진정한 인간 존재에게로 넓혀졌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판결이 내려졌다고 이미 말한 바 있는데, 그 판결은 그들이 ‘의롭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분의 피로 의롭다고 선언”된5:9 이들이 임박한 진노에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이미 약속했다. 이제 우리는 그의 말뜻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 안에 죄를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벌을 부과했지만, 그 벌은 죄 곧 세상과 인간 생활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결합되고 축적되고 의인화된 세력에 부과된다.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벌을 주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육신에 있는 죄에 벌을 내리셨다고 선언한다. 확실히 십자가형은 끔찍한 사건이었다. 사도가 신학적으로 뒤돌아보니, 정죄받는 것은 죄 자체였지 예수님이 아니었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날에 예수님이 겪으신 신체적・정신적・영적 고통은 어떻게 해서도 완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말해서는(또한 교회의 생활과 가르침, 실천의 여러 측면에 관통하는 암시와 관련하여), 그 때문에 모든 게 달라졌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확실히 형벌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예수님께 대한 형벌이 아니라 죄에 대한 형벌이지만, 어쨌든 형벌은 형벌이다. 마찬가지로, 그분의 죽음은 대리적이다. 하나님이 (메시아의 육신 안에서) 죄를 정하셨기에 “메시아 안에 있는” 죄인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한 사람이 죽어서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아도 된다.
이 대리는 보통의 ‘행위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서사, 소명 서사, 성경대로의 이야기 안에서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다. 우리가 이 대리를 그 이교적 의미에서 구출해 내면, 유대 서사와 메시아 서사의 핵심에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영화롭게’ 되려고 구원받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그분의 지혜와 사랑을 세상에 비추는 진정한 인간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바울이 한 일은 복음서에서 했듯이 죄를 다루는 것을 더 큰 하나님나라 서사 안에 위치시킨 것이다. 새로운 유월절(노예 삼는 권세에서 구출되는 것)은 죄를 다루는 것으로 성취된다. 이번에는 ‘죄들’이 자라서 ‘죄’로 전력을 다하면서 두 이야기가 마침내 하나가 되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는 토라가 이런 식으로 죄를 더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죄의 육신을 입고 보냄받은 자가 하나님의 아들, 그분의 본체였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났다.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 곧 우리가 보았듯이 언약적 구출과 회복에 대한 소망을 나타낸 수많은 고대 이스라엘 표현의 핵심에 있는 언약적 사랑의 궁극적 표현이 되려면, 우리는 창조주요 언약의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실 때는 자기 자신을 보내신 것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속죄제’는 번번이, 이스라엘이 본의 아니게(그럴 의도가 없는 경우) 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의도는 있지만 그것이 죄인 줄 모르는 경우) 지은 죄와 관련된 특정한 희생제사라는 것이다.
죄 사함,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에스겔에 나온 포로 귀환이라는 주제가 이제 가능하다. 포로기가 끝나고, 노예 주인의 권세는 깨졌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통해 언약이 갱신된다. 권세들의 토대인 죄가 정죄되었기에 권세들이 무너졌다고 확신할 수 있다.
둘째, 그래서 그 결과는 죄인들이 해방되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소명 곧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메시아가 구속하고 성령이 내주하는 인간은 자신의 적절한 소명을 차지하고, ‘권세들’은 산소가 끊긴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이라고 한 4절에서부터 시작되는 로마서 8장 나머지 부분이 이야기하는 바다. 이 말씀은 부활8:9-11과 더불어, 자기 자신의 몸과 행동을 책임지는 삶,8:12-16 고난받는 소명과 그럼으로써 메시아와 ‘영광’을 함께 받는 것8:17-25을 앞서 가리킨다. 고난을 통해서, 하지만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희한한 통치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세계로 이어져서, 고통 가운데 탄식하는 현 창조세계가 왜곡과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영화롭게 될 때 오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8:21 이것이 궁극적 ‘영광’ 곧 인간의 ‘왕 같은’ 역할인데, 우리는 이를 위해 지음받고 5장 17절에 나온 대로 이를 위해 구속받았다. 인간은 ‘의를 가져오는 사람’이 되려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성취된 혁명의 결과다. 십자가 사역은 인류를 창조세계로부터 구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창조세계를 위해 구해 내기 위한 것이다.
메시아를 통해 구속받고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고통 가운데 “동일한 영께서 말보다도 더 깊은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을 발견한다.8:26 하지만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백성을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이다.8:27 이렇게 계속해서 마지막 확신의 진술까지 이어진다. 아무것도 우리를 메시아의 죽음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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