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장 21-26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이 유월절과 출애굽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제 그 이야기를 단 한 번뿐인 ‘죄 사함’ 사건이기도 한 새로운 해방 사건으로 경험한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에 반응하는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실함 둘 다의 수단이시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과 언약 구성원의 상태 둘 다를 가리키는 핵심 성경 용어가 바로 ‘체다카tsedaqah’, 그리스어로는 ‘디카이오시네dikaiosynē’인데, (잠재적인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의’나 ‘정의’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인류의 가장 큰 실패는 우상숭배 곧 예배의 실패였다.
언약과 예배는 자연스럽게 같이 간다. 유월절과 출애굽에서 생생하게 나타난 아브라함과 그 가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성막 건설과 성막을 대체한 성전 건설과 직결되었다. 핵심 예배 대상은 ‘언약궤’였다. 이 언약궤 덮개 위에서 하나님은 ‘언약의 피’ 곧 전용된 정화를 통해 자기 백성을 만나실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거룩한 임재가 백성 가운데 임하시고, 그 백성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 그분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들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속죄일마다 이 일이 반복될 것이다. 이 단락의 중심 단어이자, 궤 덮개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단어 ‘힐라스테리온’(25절의 ‘화목제물’—옮긴이)은 ‘피’(여기서는 예수님의 피)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과 맺으신 언약은 바로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계속되는 우상숭배와 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예배도 있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었다. 2부에서 보았듯이, 이 모든 내용은 많은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이교 원수들에게서 해방시킬 새로운 유월절을 고대했던 제2성전기에 새로운 초점과 긴급성을 얻게 되었다. 이 새로운 유월절은 ‘죄 사함’ 곧 진정한 ‘포로 귀환’을 뜻한다. 이사야 40-55장, 에스겔 43장, 말라기 3장에 나오듯이, 이 일의 핵심에 오래전에 약속한 여호와 하나님의 귀환이 있다.
● 로마서 3장에 대한 통상적 해석과 그 문제점들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형상과 맞바꾸는 우상숭배에 뿌리가 있다. 문제의 근본 원인은 우상숭배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말한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 및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더 큰 세상과 맺으신 것이다.
‘의’는 단순히 하나님이 옳은 일을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물론 그 말도 사실이다), 그분이 하신 언약적 약속들에 신실하시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분이 하겠다고 말씀하신 일, 특히 그분이 세상을 위해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통해 맺으신 언약을 이루신다고 확실히 믿을 수 있다. 물론 신명기와 예언서들에서 이 ‘신실함’은 하나님이 우상을 숭배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는 뜻일 수 있(고 실제로도 그런 뜻일 때가 많)다. 언약은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분명히 밝혔고, 그런 일이 벌어질 때(신명기 28-29장에서 보듯이, 우상숭배의 궁극적 결과로 특히 포로기에) 그것은 신실하지 못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표지다. 그중에서도 가장 분명한 예가 다니엘 9장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는 유배로 이스라엘의 죄를 다스리시는 언약적 형벌4-14절과 언약의 회복을 약속하고 기도하는 데서15-19절 하나님의 의가 역사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개념이야말로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이 의미하는 바가 확실한 듯하다. 1-4장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3장 21-26절은 2장 17절에서 시작하는 주장과 4장의 창세기 15장에 대한 해설 사이에 구체적으로 위치한다. 이 두 본문을 미리 살짝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로마서 2장 17절부터 3장 9절까지는, 먼저 이스라엘의 거룩한 소명이라는 세계적 목적에,2:17-20 둘째로 이스라엘의 언약적 실패에,2:21-24; 3:2-4 셋째로 이 실패가 하나님의 ‘디카이오시네’ 곧 그분의 ‘의’에 제기하는 문제에 관심을 둔다.3:5 이스라엘이 신실하지 못한데 어떻게 하나님은 유대인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고 복 주시겠다는 언약에 신실하실 수 있는가? 그다음에 로마서 4장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과, 그 세계적인 목적,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그 언약에 충실하셨던 과거를 다룬다. 이 둘(세상을 구원하라는 이스라엘의 소명과 아브라함에게 열방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은 확실히 같이 간다.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에 미칠 하나님의 목적이 3장 21-26절 앞뒤 문맥의 주제다. 따라서 3장 21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언약적 신실함’이라는 보통의 성경 개념으로 받아들일 이유는 충분하다. 이 ‘의’의 나타남이 이스라엘을 통해 우상숭배와 죄에서 세상을 구하셔서 아브라함을 위한 세계적 한 가족을 창조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연결되어 있다고 이해할 만한 이유도 충분하다. 즉 우리가 살피는 본문 앞뒤에서 바울이 제기하는 실제 주장들은 ‘디카이오시네 테우dikaiosynē theou’와 3장 21-26절의 관련 개념들을 ‘언약적 신실함’으로 해석하는 것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이는 우리가 이 단락에 대해 방금 살펴본 내용과 들어맞는다. 이 단락은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신 윤리적 상태나 특징으로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로운’ 분으로 강조하면서 끝난다.
그렇다면 바울은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윤리적 고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언약적 목적에 대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 신실하심은 신실하신 메시아 예수님이 세상을 바로잡는 목적들(그분의 ‘정의’)을 세상에 가져오셔서 실행되었다. 야만적 행동에 빠지지 않고서야 ‘디카이오스’ 어근의 모든 용례를 똑같은 방식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이것이 내가 해당 문구를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라고 옮긴 이유다.
그러나 이제는 (비록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거한 것이긴 하지만) 율법과는 아주 별개로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디카이오시네’]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는 메시아 예수의 신실하심을 통하여 믿음 있는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효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차별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더니, 메시아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고[‘디카이오우메노이dikaioumenoi’], 언약에 속한 자가 되었다고 값없이 선언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심을 통해 예수의 피로써 그분을 속죄소로 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전에 지은 죄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넘어가심으로 자신의 언약적 정의[‘디카이오시네’]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디카이오시네’]를 바로 지금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곧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시다는 것[‘디카이오스’]과, 하나님께서 예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것[‘디카이오우타이’]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로마서 3:21-26)
첫째, 통상적 해석은 3장 23절 하반절에 분명히 나타난 성전이라는 주제를 무시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말씀은 “이들은 천국의 ‘영광’을 얻을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을 암호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라는 1장 21-23절을 다시 언급한 것이다. (시편 106:20을 거쳐) 금송아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이 표현은 1장 18-32절 전체에서 보듯이 ‘죄’의 배후에는 우상숭배가 있다고 암시한다.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 대신 피조물을 숭배하고 예배했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 피조물의 2차 형상을 만들어서, 창조주 하나님과 두 배로 동떨어진 사물들을 예배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목적이 있어 주신 인간의 힘을 남용하여 진정한 인간의 소명을 뒤집고 약화했다. 인간의 기술과 재주는 하나님 아닌 신들을 만들어 예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계획되었다. 그렇다면 ‘죄’는 단순히 하나님의 규칙을 깨뜨린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1장의 주요 문제이자, 바울이 3장 23절 하반절에서 언급하는 문제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이 예수님을 참 하나님과 그분이 창조하신 인간이 새로이 만나는 장소와 수단으로 내세우시는 3장 24-26절에서 직접적으로 다루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묘사하면서 이 족장이 우상숭배를 뒤집었다고 암시한다.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4:20 그래서 바울은 전체 논의가 끝난 직후에, 자신이 도달한 요점을 5장 1-2절에서 종교의식의 언어로 요약한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그렇다면 통상적 사고 흐름에서 놓치고 있는 첫 번째 요소는 어떻게 바울이 ‘죄’만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영광’의 손실을 불러오는 우상숭배를 다루는지 보여 주려는 시도다.
두 번째로 놓친 부분은 어떻게 3장 21-26절이 바울이 2장 17-24절에서 소개한 사고의 흐름에 들어맞는지 보여 주려는 시도다. (여기서는 내가 조금 전에 간단하게 언급한 요점을 더 발전시켜 보겠다.)
바울이 반대하고 있는 유대인—우리가 추측하기로는 그의 이전 자아—은 “나는 보편적 죄의 법칙에서 예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반대하고 있는 유대인은 “세상은 엉망진창이지만, 토라로 무장한 우리 유대 백성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민족이다. 우리는 이 엉망진창인 세상을 정리하고 바로잡아야 할 소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기본적으로 이에 동의한다. 이런 내용은 많은 해석 전통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어서 바울의 분명한 단어를 간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유대인’에게 특별한 지위와 도구가 있다는 것을 반박하지 않는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2:17-18
그는 이스라엘이 열방의 빛이 되기 위해 이런 특권을 받았다고 동의한다(정말 그렇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2:19-20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아브라함과 그 가족을 부르셨다는, 유명한 유대 신앙의 전통적 진술이다. 표현은 다양하지만, 많은 전통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바울은 일부 해설가들이 생각했듯이, “너희는 편견이 심해서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은 “너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다고 믿는다”라는 뜻이다. 바울은 그 믿음을 확인해 준다. 그가 말하고 있는 ‘유대인’은 꽤 정확하다. 이것이 실제로 성경이 말하는 바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소명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성경은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지적했다. 예언자들은 반복해서 말했다. 이스라엘이 잘못을 저질러 그들의 소명은 원래 의도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비난이다.
우리 시대 많은 유대인이 주장했듯이, 이스라엘에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한도 내에서 비판하다는 고상한 오랜 전통이 있고 바울은 이 관습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에스라 9장, 느헤미야 9장, 다니엘 9장에 나오는 참회 기도가 이를 잘 보여 주었다. 신명기의 ‘저주’가 효력을 발휘하여 이스라엘은 포로로 잡혀갔다. 바울은 2장 24절에서 이사야 52장 5절을 인용하는데,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라는 에스겔 36장 20절도 떠올리게 한다. 유대 이외의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스라엘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모독했다. 이들의 소명은 틀어졌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그 가족으로 부르셔서 규례를 지키는 백성으로 만드실 수 있고 그렇게 하시리라고 잠시 가정함으로써2:25-29 그 비판을 더 확실히 한다.
그에게 성육신한 아들은 이스라엘의 메시아이기도 하다. 성육신이 택함을 취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절정으로 이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대표자의 모습으로 그분의 세상에 오셔서 그들 스스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을 이스라엘과 세상을 위해 하신다. 창조주와 그분이 창조하신 인간 사이에 만남의 장소가 되신 것이다. 그런 역할의 결합이 바울의 신학적 관점의 핵심을 형성한다
그는 하나님이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3:4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3:2하-4상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에 빛을 비추겠다는 그분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더군다나 3장 5절이 분명히 밝히듯이, (다른 어떤 계획과는 반대되는) 이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의미하는 바다.
첫째, 우상숭배와 불의, 오래된 ‘죄’라는 근본 문제가 있다. 이것은 확실하다. 이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일부에서 가정하듯이, 이 문제가 언약과 이스라엘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로 대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죄’의 문제가 윤리적 규례를 깨뜨린 것에 불과하지 않고, 우상숭배의 문제라는 점을 잊어서도 안 된다. 진정한 인간의 소명을 붙들지 못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 문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죄가 문제요, 그 죄의 배후에 있는 우상숭배가 문제다.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으려 하신다면, 이 모두를 다루셔야만 한다.
하지만, 둘째로,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죄의 문제에 맞서1:18-2:16 이스라엘을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다.2:17-24 아브라함을 세상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삼겠다는 언약을 세우셨다.4:1-25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가족을 통해,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준엄하게 약속하시고는 이스라엘이 불성실하다고 이 약속들을 지키지 않으신다면 매우 이상할 것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다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그 본질에서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더 큰 언약적 맥락에서 일어난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신다. 그에게 ‘약속의 땅’뿐만 아니라 온 세상 열방을 가족으로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4장 13절에서 말하는 내용인데, 이는 그가 창세기를 시편 2편과 7편 같은 관점에서 읽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 시편들에서는 메시아의 통치 아래서 이 ‘유업’이 한 나라에서 전체 창조세계로 확장된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바울이 4장 5절에서 말하듯이 아브라함의 약속을 하나님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뜻이라고, 즉 하나님이 세상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그분으로 가족으로 받아들이신다는 뜻이라고 보는 데 달려 있다. (시 32편을 인용한 4장 4-8절은 죄 사함에 대한 중요한 언급을 강조한다.) 바울이 4장 17-22절에서 분명히 하듯이 이 가족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곧 ‘믿음[신실함]’)를 아브라함과 공유하는 가족이다. 아브라함은 1장 18-23절에 언급된 이들과 달리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4:20-21
그렇다면 바울이 3장 21-26절에서 맞닥뜨린 질문은 인간의 죄와 우상숭배,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이중 문제다. 이 핵심 단락 앞뒤로는 이 인간의 곤경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가족과 맺은 언약의 신실하심을 언급하는 단락들이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열방을 그의 후손으로 주셔서 용서받은 죄인들이 신실한 예배자가 되게 하신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 일이 성취되는 수단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상의 빛으로, 인류의 우상숭배와 죄 문제의 해답으로 부르셨다는 2장 17-20절의 분명한 함의와 연결된다.
죄,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에서 죄를 다루신다는 것은 틀림없는 핵심이지만, 이것들은 우상숭배(와 그에 따른 진정한 예배)와 아브라함의 가족,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구하려는 하나님의 헌신에 대한 더 큰 질문들 내에 자리하고 있다. 로마서 1장 18절-3장 20절도, 로마서 4장도 통상적 해석에서처럼 ‘죄’와 ‘의롭다 하심’에 관심이 없다. 실제로는 둘 다에 관심이 있지만, 제의라는 질문과 언약이라는 질문 내에서 틀을 잡는다. 로마서 3장 21-26절도 제의와 언약에 대한 내용이라는 표지가 있다면, 우리는 이것이 바울이 자신이 말하는 내용에 대해 생각하는 바라고 전제해야 한다.
우리는 더 가까이도 갈 수 있다. 우리의 핵심 본문과 4장을 연결해 주는 로마서 3장 27-31절은 유대인과 이방인,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피스티스pistis’ 곧 ‘믿음’을 기반으로 하나 되는 것을 이야기한다. 바울이 2장 25-29절에서 흘린 암시가 추가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로마서 3장 27-31절의 핵심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믿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한 분 하나님이라는 확고한 선언이다.
유대식 유일신교가 이방인과 유대인이 죄 사함을 받은 가족 내에서 똑같이 의롭게 하심을 받는다는 것의 핵심에 있다. 2장 17절-4장 25절에 이르는 전체 단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과 맺은 언약과, 이 언약의 중심에 있는 진정한 예배, 한 분 참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다룬다. 이 1장 18-23절의 우상숭배를 대체하고 1장 24-32절의 죄를 무효화한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이스라엘 전반의 대규모 실패에도 불구하고, 죄로 가득한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이 단락이 뜻하는 바라고 전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속죄소로 내세우셨다”는 이 단락의 핵심 진술이 성경에서 ‘언약궤’(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죄에서 정결케 하셔서 그분과 그 백성이 만날 수 있는 장소)의 덮개를 가리키는 ‘힐라스테리온’을 사용한다고 언급할 때는 그가 우상숭배의 자리에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고 있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전제해야 한다. 바울은 단순히 ‘제의적 비유’와 ‘법정’ 비유, ‘노예 시장’ 비유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정한 제의, 진정한 예배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한 분 하나님이 사람들을 더러움에서 깨끗게 하셔서 언약의 핵심인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말이다.
이런 전제들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언약이 진짜 배경이다. 진정한 예배의 회복이 목표다. 이 단락은 하나님이 죄를 다루시는 것을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시는 방식은 첫째, 그분의 오랜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둘째, 모든 인간의 불성실함의 기저에 있는 우상숭배를 다루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실하심을 통해 그분의 ‘의’를 드러내고 계신다.
바울은 5장 1-2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결과로 “은혜”에 “들어가고” “영광의” 소망이 회복된다고 진술한다. 5장 6-11절이 분명히 하듯이, 바울이 지금 말한 모든 내용은 한 분 하나님의 깨지지 않는 언약적 사랑에 기초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는 5장 8절은 여전히 언약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는 3장 21절의 더 큰 차원이다. 이것은 로마서 1-8장의 마지막 장면을 내다본다. 8장 31-39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뿌리를 둔 칭의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것을 발견한다. 이 단락에서, 새로워진 제의는 하나님 우편에서 그 백성을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 곧 제사장이신 왕께 초점을 맞춘다.8:34
한 분 하나님이 죄를 다루셔서 죄 사함을 받고 예배하는 세계 백성을 창조하시는 방식인 언약과 제의를 다룬다는 확고한 의미를 증가시킨다.
● 구원의 재해석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
바울이 이 단락에서 말하려는 주안점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그분이 약속하고 목적하신 바를 행하셨다는 것이다. 4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계적 가족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죄를 처리하셔서 이 큰 ‘경건치 못한’ 가족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게 하실 것이다. 2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세상의 빛, 곧 1장 18절-2장 16절에 나오는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복음서 사건들에서 그분의 ‘디카이오시네’를 드러내고 보여 주셨다는 진술은 약속이 성취되고 목적이 이루어졌다는 진술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바울은 로마서 15:8-9에서 자신의 주장을 비슷한 용어로 요약한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의 계시가 값없는 은혜의 행위라고 강조하려 애쓴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하 하나님이 이렇게 해야 할 의무는 전혀 없으시다. 그분은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으셨다. 이 역시 언약적 표현이다. 바울서신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성경의 비슷한 용어들을 돌아보는데, 하나님이 통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사랑의 목적으로 약속하셨고, 순전한 자비로 이 약속들을 지키신다고 암시한다. 이것이 12장 1절에서 바울이 전체 주장을 요약하면서 강조하는 바다. 이 자비는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성품, 목적, 약속들에 충실하시기에 가능하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맞닥뜨린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결과를 거두게 해야 했다. 그 결과가 곧 유배였다. 하지만 그와 동일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회복을 의미하기도 했다. 앞으로 찾아올 이 회복, 억압적 이방 권세들로부터의 해방이 새로운 출애굽이 될 것이었다. 원래 출애굽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들창 15:13-16의 성취이기 때문에 언약의 갱신은 죄 사함이 있는 더 새롭고 큰 출애굽을 의미했다.
예수님과 연관된 사건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드러내고 보여 준다. 성경 전체와 로마서 전후 문맥은 이것이 하나님이 우상숭배와 죄를 다루시고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상을 향한 목적을 성취하시리라는 의미라고 암시한다. 대략적으로 이것이 바울이 이 단락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내용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신실하신 메시아
이스라엘이 신실하지 못했던 이 목적은 메시아에게서 성취되었다. 이것이 로마서 3장 22절의 요점이고, 내가 여기서(와 다른 곳에서도) ‘메시아의 신실하심’이라는 의미에서 ‘피스티스 크리스투pistis Christou’라는 문구를 택한 이유다. 따라서 나는 22절을 이렇게 풀이한다.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는 메시아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통하여 믿음이 있는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효력을 발생합니다.” 이것은 3장 1-5절에 나타난 사고의 흐름에 답해 준다. 이스라엘의 특권은 하나님의 신탁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2장 19-20절에서 설명한 소명을 요약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명령에 “신실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3:3과 “참되심”3:4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에도 ‘디카이오스’ 곧 그분의 언약적 정의에 충실하실 것이다.3:4하-5 그분의 계획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대표자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역할을 완성하실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언약 가족의 일원이라는 표시가 ‘피스티스’ 곧 ‘믿음’이나 ‘신실함’인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이것이 메시아 백성의 표시다. (바울의 세계에서 ‘피스티스’라는 단어를 ‘정절’, ‘충성’ 등과 동의어로 여겼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에게 이 단어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믿는다는 의미에서 ‘믿음’을 포함했다.4:24-25; 10:9 하지만 우리는 이 예리한 초점이 더 폭넓은 의미들을 차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에서 핵심은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 곧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고 아브라함에게 죄 사함을 받은 대규모 가족을 허락하셔서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는 계획에 대한 그분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행동으로 보여 준다는 것이다. 메시아의 죽음은 하나님이 친히 계획하고 그분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일을 성취하신다. 메시아의 신실하신 죽음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계획이 성취된다. 또는 달리 표현하면(모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바울도 부활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다시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분은 그때부터 메시아의 십자가를 염두에 두셨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시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는 목적과 약속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이것이 메시아에게서,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메시아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형태의 순종 곧 이스라엘에게는 없었던 ‘신실하심’을 드렸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다
바울은 모든 믿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선언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이중 맥락(‘하나님의 언약적 정의’에서처럼)은 이 유명하지만 난해한 개념에 대해 밀접하게 엮인 이중 의미를 제공한다. 한편으로, 모든 믿는 자를 아브라함의 가족으로 선언한다는 뜻이다. ‘칭의’는 메시아에 대한 ‘피스티스’를 공유하는 한 가족을 세우겠다는 언약의 선언이다. 다른 한편으로, 칭의는 이 믿음의 가족을 의롭다고 선언한다는 뜻이다.
바울이 먼저 말하고(“이제는”, 3:21)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듯이(26절에서), ‘칭의’는 현 시점에 이루어진다. 2장 1-16절과 8장 31-39절에서처럼 미래의 평결을 이미 현재에 선언했다. 이것은 바울의 유명한 칭의 신학에 독특한 역학을 제공하고, 메시아에게 일어난 일의 직접적 결과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을 때 그분은 예수님이 그 ‘아들’1:3 곧 그분의 목적을 실행하시려고 세상에 ‘보내신’ 분이라고 선언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의롭다고 선언하셔서 가짜 메시아라는 오명도 벗겨 주셨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전과 같이 동일한 두 의미(언약적, 법정의)를 지닌 법적 평결로 볼 수도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적 목적들을 성취하신 이스라엘의 진정한 대표자, 메시아이셨다. 또한 사형이라는 법정 판결에도 불구하고 ‘의로운 분’이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 때 선언하신 그 판결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판결을 선언하셨다. “[그들은] 메시아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구속을 통하여… 의롭다고, 언약에 속한 자가 되었다고 값없이 선언되었습니다.”3:24 칭의는 ‘메시아 안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 시에 그분에 대해 하신 말씀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 때문에 넘겨지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려고 살아나신 분입니다”라고 말한 이유다. 예수님의 부활이 ‘의롭다 하심’을 불러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은 이 의롭다 하심이 원칙적으로 십자가에서 일어났다는 표지다. 바울이 로마서 5장 9절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서 선언하듯이, “메시아께서 일으켜지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툭 던지는 말이지만, 그래서 더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신학, 사실상 이 책의 핵심에 근접한다. 십자가에서 진짜 혁명이 일어났고, 부활은 그 일이 일어났다는 첫 번째 표지다. 이 혁명의 여러 결과 중에서도, 칭의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이유는 죄 사함의 확신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브라함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갈라디아서 3장에서처럼) 확신 때문이기도 하다. 이 둘의 배후에는, 십자가의 승리로 세상을 다스리던 권세들, 인류를 사로잡고 있던 우상들이 타도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요한복음 12장 30-32절에서처럼, 이것은 세상 민족들이 현재의 “통치자들”에게서 해방되어 이스라엘의 메시아 앞에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단계다.
어찌 됐든, ‘현세의’ 칭의의 핵심은 최후의 날에 선언될 판결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정죄’가 됐든 ‘칭의’가 됐든 이 최종 판결은 2장 1-16절에 묘사됐고, 바울은 8장 31-39절에서 그 순간을 내다본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이미 죄를 정하셨기에8:3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8:1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우리가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을 믿”을 때4:24 이 판결이 이미 알려졌다는 것이다.
새로운 유월절, 새로운 출애굽
여기서 핵심 단어는 ‘구속’이라는 뜻의 ‘아폴리트로시스apolytrōsis’와 ‘속죄소’라는 뜻의 ‘힐라스테리온’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더니, 메시아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구속[‘아폴리트로시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고, 언약에 속한 자가 되었다고 값없이 선언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심을 통해 예수의 피로써 그분을 속죄소[‘힐라스테리온’]로 내놓으셨습니다.3:23-25상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가 “메시아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구속을 통하여” 드러났다고 말하면서 ‘아폴리트로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노예 시장에서 노예를 ‘구속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노예 주인에게 돈을 주면 그 노예는 자유의 몸이 된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다. 바로와 애굽의 신들을 이기고 그 백성을 구출하신 하나님의 크신 해방이 ‘아폴리트로시스’ 곧 이스라엘의 언약 이야기의 핵심에 있는 위대한 ‘구속’이었다. 예수님과 다른 많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바울도 십자가를 유월절과 연관 지어 해석한다. 새로운 유월절, 새로운 출애굽인 것이다.
원래 출애굽에서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시고출 2:24 온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19:5; 24:3-8 예레미야가 ‘새 언약’31:31-34에 대해 말할 때는 하나님이 언젠가 성취하실 더 큰 구원을 내다보기 위해 이 원래 출애굽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이것이 예수님이 성취하신 일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에서 핵심이었다. 새로운 유월절은 옛 유월절에 기초했다. 하지만 새로운 유월절은 단순히 우리를 노예 삼는 인간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지 않고, 종살이를 가져온 죄에서의 해방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것이 제2성전기의 유월절에 대한 재해석에 속죄나 죄 사함이라는 개념이 포함된 이유다.
하지만 어떤 종류든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것은 유월절의 부정적 측면에 불과하다. 출애굽의 긍정적 목적은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언약의 하나님을 자유로이 예배하는 것이었다.출 3:12, 18; 4:23; 5:1; 8:1, 20, 27; 9:1, 13; 10:3, 7-11, 24-26 따라서 백성이 나와서 언약 헌장인 토라를 받았을 때, 그 언약은 그 백성에게 뿌려진 희생제사의 피(출 24:8에 나오는 ‘언약의 피’)로 재가된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런 다음 이들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만나실 장소, 일종의 결혼식처럼 언약식을 거행할 수 있는 성막을 건설해야 했다(예언서에서 익숙한 개념으로, 렘 2:2은 여러 예 중의 하나다). 언약 사건(출애굽)은 언약 만남(여호와와 이스라엘이 엄숙한 상호 관계로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이어져야 했다. 우리가 이 사건과 만남을 하나님이 언약에 얼마나 신실하신지를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서사에서 발견한다면, 모든 것 배후에 출애굽 서사가 있고, 역으로 바울의 진술 중에 어렵고 난해한 부분을 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생긴다.
속죄소와 만남의 장소
만남의 장소는 궤의 덮개 곧 ‘카포레스kappōreth’였다.25:10-22 이곳은 출애굽기 마지막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백성을 만나기 위해 구름 가운데 나타나셨던 곳이다.40:20-21, 34-35
‘카포레스’는 정결 의식을 행하여 하나님과 그 백성이 안전하게 만날 수 있게 하는 곳이었다. 속죄제의 피가 성소를 깨끗하게 하는 의식적 세제 역할을 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거할 수 있는 곳을 순결하게 유지했다. 출애굽기 40장에서처럼, 이곳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연결을 유지할 뿐 아니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우주의 구조를 유지했다. 이곳은 유월절 사건이 목적한 곳, 하나님과 그 백성의 깨지지 않는 연합이 이루어지는 곳이요, 하늘과 땅이 서로 교류하는 에덴의 상징적 재창조다. 이 사건은 만남으로 이어져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은 아브라함 가문과의 언약을 세웠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이런 사고의 흐름을 쫓아가고 있다.
‘덮개’는 그런 ‘자비’의 장소는 아니었지만, ‘만남’과 ‘정결’의 자리였다.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셨다. 그러기 위해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뿌려 이스라엘이 과거에 지은 죄들의 더러운 영향들로부터 성소를 깨끗하게 했다.
바울은 하나님이 ‘전에 지은 죄’를 넘어가기로 작성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나도 과거에 비슷했지만,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이전 죄에 대한 형벌을 단순히 연기하여 예수님께 부과한다는 의미라고도 말할 수 없다. 내 생각에, 여기서 전제는 바울이 이스라엘의 이전 죄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메시아 안에서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상에 주실 언약에 성실하시기에, 그 목적을 위해 ‘전에 지은 죄’를 넘어가셨다.
바울 세계에서 성전(과 그 이전에는 성막)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그런 만남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만남의 장소와 정결케 하는 장소인 ‘카포레스’와 ‘힐라스테리온’이라는 개념은 정확히 이런 목적과 이런 문제에 답을 주어야 한다.
바울이 3장 25절에서 이 ‘힐라스테리온’에 대해 한 말은 하나님이 그것을 제공하고 “내놓으셨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시고,5:8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며,8:3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다8:32는 이후의 진술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를 다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3:24 된 일이다.
인간의 우상숭배, 죄의 근원에 대한 해결책은 한 분 참 하나님을 새롭게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열방이 똑같이 섬기던 우상들을 그분에 대한 새로운 계시로 대체하셨다. 이렇게 한 분 하나님이 행위로 새롭게 드러나신 것은 모든 민족이 자신들의 우상을 떠나 그분만을 예배하라고 요청할 것이다.
나라의 해방으로 가는 길은 죄 사함을 통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반복해서 봤듯이, 죄는 우상을 통해 일하는 ‘권세들’이 그것들을 숭배하는 이들을 옥죄고 통제하는 것이기에 죄를 다루고 ‘권세들’의 힘을 깨뜨리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리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서사가 도달한 곳이다. 이것은 더 이상 단순히 애굽을 탈출하여 만남의 장소인 성막, 하늘과 땅이 만나는 새 에덴을 건설하는 문제가 아니다. 훨씬 더 어두운 장소에 대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했고, 죄를 지었으며, 궁극적으로는 포로로 잡혀갔다. 따라서 새로운 유월절의 핵심에는 새로운 종류의 속죄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자기 백성을 정결하게 하셔서 언약을 갱신하실 뿐 아니라, 전 세계에 효력을 미치게 하신다. (이것이 요한일서 2:2의 의미인 듯하다.) 새로운 ‘아폴리트로시스’의 핵심에는 새로운 ‘힐라스테리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나타내어 온 세상이 예배하게 할 것이다.
따라서 ‘힐라스테리온’은 정결의 장소가 된다. 유한한 인간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갈 때 그들은 특히 죽음과 그와 연관된 것에 오염된 채 나아간다. 죄는 우상숭배의 확실한 증상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당신이 부정하게 다른 신들을 섬겼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생명의 근원을 저버린 우상숭배는 이미 죽음의 케케묵은 냄새를 풍기는 죄로 귀결된다. 그리고 죽음은 하늘과 땅을 결합하는 성전이 확인해 주어야 할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선하심을 궁극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전을 정결케 하여 죽음의 냄새로 오염된 인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레위기의 율법 의식이 주는 답은 희생제물의 피가 하나님이 주신 생명, 죽음보다 강한 생명, 따라서 성소와 예배자 모두를 정결하게 하는 생명의 표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결이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힐라스테리온’은 둘 다를 가리킨다. 그것이 바울이 5장 시작 부분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믿음으로 그분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로 로마서 1-4장의 결과를 요약할 수 있는 이유다. 이것이 성전 언어다. 바울은 이것이 그가 3장에서 말한 내용의 직접적 결과라고 믿는다.
종의 소명
포로기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벌’이라면, 그 벌이 이제 ‘종’에게만 부과된다. 그가 이스라엘을 대표하신다. 이스라엘의 불충한 불순종을 대신하여 그분이 신실하게 순종하신다. 포로기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결과라면, ‘종’은 행동으로 ‘여호와의 팔’을 드러내신다. 열방 앞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드러내셔서 만민이 예배하게 하신다.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일이 토라뿐 아니라 예언서도 성취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궁극적 문제에 대한 이 해결책, ‘우리를 온전케 하는 형벌’사 53:5은 소명 언약 곧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영광을 공유하는 언약 내에서 의미가 있고 말이 된다. 인간의 소명, 이스라엘의 소명, 예수님의 소명. 하나님의 소명. 성육신이야말로 로마서 3장의 핵심이다.
예수님 안에, 그분의 죽음 속에 한 분 하나님이 그분의 세상을 만나시는 장소, 하늘과 땅이 마침내 하나가 되는 장소가 있다. 예수님의 희생의 피로 죄와 죽음의 오염이 제거되어 그런 만남이 가능해진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0절에서 현재의 논의를 다시 한 번 요약하면서 “우리가 원수였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고 쓴다. 정말 그렇다. 이것은 소명 이야기, 성전 이야기, 그리고 사랑 이야기다.
바울의 ‘언약적 정의’라는 표현 배후에는 사랑(이사야서의 또 다른 큰 주제)이라는 심오한 의미가 자리하고 있다. 언약은 결국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이다. 바울은 메시아와 그 백성에 대해 말하는 여러 단락에서 그 언어를 선택하는데, 그가 예수님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인간으로 구체화한 모습을 보았다는 확실한 표지다. 하나님은 그 결혼과 그 목적에 신실하셨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5-8장에서 3-4장에서 말한 내용의 온전한 의미를 끌어다가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agapē’와 메시아의 사랑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다.8:31-39 8장 전체는 성전의 언어로 가득 찬, 영광스러운 하늘과 땅의 축제인데, 3장에서 예수님을 ‘내놓으신’ 언약의 성취 가운데 하늘과 땅이 ‘만나고’ 그 만남에서 이 축제가 비롯된다.
하나님은 자기를 숨기고 오셔서(“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다시 말해 “그가 능력으로, 인격으로 나타나신 여호와라고 누가 생각했겠느냐?”) 온 인류의 우상숭배와 죄와 유배를 분명히 보여 주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죄와 유배의 결과를 떠안으신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류는 바벨에 이르렀다. 가나안에서 쫓겨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이르렀다. 바벨 이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와 언약적 약속을 세우셨고, 바벨론 이후에 이 약속이 실현되었다.
종살이는 임의로 주어진 형벌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면, 그 땅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가 거기 남아 있을 수도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신을 섬김으로써 사실상 스스로를 노예로 판 셈이었다. 따라서 포로기의 종살이는 이스라엘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였다.
이는 ‘형벌’의 언어를 매우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쯤 해서 또다시 ‘행위 계약’으로 돌아가 균형을 잃기 쉽기 때문이다.
‘형벌’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이스라엘 역사 전반에 걸쳐 만들어진 결과를 가리키는 뚜렷한 비유다.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죄와 그 결과들에 대해 말할 때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셨다”고 세 차례 반복한다. 그가 묘사하는 타락하고 좀먹는 생활방식은 마구잡이가 아니라, 우상숭배의 결과다.
이사야서의 의미는 ‘종’이 이스라엘의 소명을 성취하는 것과 여호와 곧 강력한 ‘여호와의 팔’을 구현하는 ‘종’과 연관이 있다. 이 종은 이스라엘과 세상을 구원하려고 이스라엘의 반역과 우상숭배, 죄의 결과를 짊어진다. 그는 이스라엘이 지은 죄의 결과들을 자신에게 끌어와 없애고 길을 낼 것이다.
하지만 이 ‘종’이 고통받고 상처받고 알아보기 힘든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한 진짜 ‘여호와의 팔’이라면, 로마서 3장 21-26절의 핵심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대두한다. 로마서 1장에 따르면 인류가 저지른 가장 주요한 잘못은 우상숭배다. 그에 대한 한 분 하나님의 주요한 반응은 메시아를 만남의 장소,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드러내는 궁극적 계시로 ‘내놓으신’ 것이다.
새로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
원래 출애굽 서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시고, 이야기의 끝부분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출 3:13-15; 33:17-34:9 드디어 성막에 거하러 오셔서 (우리 추측으로는) ‘카포레스’에 임하시는 이 하나님의 영광40:34-38이야말로 성막이 세워진 목적이요,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가 끔찍한 대체물인 현실이었다. 나는 바울의 출애굽 서사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이 ‘힐라스테리온’으로 ‘내놓으신’, 그분의 인격적 임재의 계시인 예수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보편적 죄로 인류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된다. 물론 이 단락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디카이오시네’ 곧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추론된 일반적 진리가 아니라, 정확히 예수님에게서 이것을 볼 수 있다. 그분이 곧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다.
여기가 바로, 새롭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계획인 성육신의 신비와 이스라엘의 소명의 목적인 택함의 신비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것이 ‘힐라스테리온’의 진정한 의미—하나님과 그 백성이 함께 만나는 장소—가 위치하는 맥락이다. 그 장소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다. 믿음의 초점인 예수님, 우리가 기도하면서 부르고 그분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사랑하는 예수님이 우상숭배 문제에 대한 궁극적 해답이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분이신 하나님의 형상이시며”,골 1:15 다른 모든 ‘형상’은 기껏해야 왜곡된 모방에 불과하다. 이스라엘의 소명은 하나님의 개인적 용도를 위해 의도된 계획이었음이 드러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 한 분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와 진정한 인간의 신실한 순종이 시공간과 물질 내에서 만나서 합쳐지고 실현되는 장소로 내놓으셨다. 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대표했다. 세상의 빛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은 세상을 대표했다. 예수님 안에서 이스라엘과 모든 인간의 소명은 신실한 순종으로 요약되었다.
순교자들의 메아리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
모든 초기 그리스도인은 이 사건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자기를 주시는 사랑으로 자신을 드러내셔서 감사가 풍성한 예배의 초점이 되셨다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이 예배는 우상을 대체하고, 따라서 죄의 치명적 억압을 영원히 깨뜨린 새롭고 진정한 인간 존재를 탄생시킨다.
● 결론: 구속의 성취, 혁명의 출발
이스라엘은 열방에 복이 되라는 하나님의 소명에 신실하지 못했지만, 이스라엘의 실패는 적절한 방식으로, 곧 속죄일이 늘 가리켰던 실재에 의해 다루어진다. 메시아는 신실하신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이 부름받은 목표를 매우 구체적으로 성취하셨다. 새 언약의 피인 예수님의 피로 이스라엘을 위한,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들이 드디어 세워졌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들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실함이 만나서 합쳐지고 그 원래 목적을 성취하는 장소요 수단이시다.
그리하여 참 하나님이 죄의 핵심에 있는 우상들을 대체하시고 예배의 진정한 중심으로 세상에 깜짝 놀라게 드러나셨다. 이스라엘의 과거 죄들, 언약을 위험에 빠뜨린 불신실함은 눈감아 주시고, 전 세계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언약의 목적은 멋지게 이루어졌다. ‘소명 언약’ 곧 세상의 빛이 되라는 이스라엘의 소명이 성취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예수님 안에서 ‘만났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하나님과 인류, 하나님과 세상이 만나서 화해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고.”고후 5:19 바울의 생각에서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실제로 자기 백성과 만나시는 독특한 장소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그분 안에 요약하고, 그분의 신실하심이 그들의 불신실함을 대체하는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구현한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구하러 오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구현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들과 이스라엘의 소명이 동일한 인간, 동일한 사건 속에 와서 하나가 된다. 이것이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우리 모두가 우상숭배를 하고 죄를 지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은 그 사명에 신실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드러낸 신실하신 메시아를 세우셔서 그분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종살이에서 탈출하게 하셨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첫째, 그는 인류와 세상을 죄와 죽음에서 구출하기 위한 창조주의 오랜 언약 계획이 성취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 새로운 유월절이 일어났다. 둘째, 그는 하나님이 친히 언약적 신실하심의 행위(바울은 5장과 8장에 가서야 비로소 이 단어를 사용하지만, 줄여서 말하자면 ‘사랑’)로 이 일을 성취하셨다고 말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소명과 그분의 심오한 목적들을 메시아의 신실한 죽음 가운데 하나로 모으셨다. 셋째, ‘유월절’ 운동에 걸맞게, 그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유대인과 이방인이 똑같이—과거의 죄에서 해방되어 한 언약 가족에 편입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 가운데 들어가서 정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지막 날을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5:9; 8:1; 8:31-39 넷째, 우리가 연구한 다른 초기 기독교 사상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새로운 유월절도 ‘죄를 다루었고’ 이를 통해 포로기가 무효화되었다고 보았다. 유월절과 ‘속죄일’이 만나 합쳐지는 대목이 바로 여기다. 다섯째, 이 모두의 핵심에서 바울은 이사야 53장의 의도된 의미대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메시아가 “우리의 범죄 때문에 넘겨지셨”다고 보았다. 죄를 다루면 죄의 힘의 ‘권세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가 보았듯이, 이것이 다른 모든 문을 여는 열쇠다.
역사는 중요하다. 이스라엘은 세상 죄의 무게가 무겁게 드리워진 장소, 동산에서 추방되어 유배된 아담과 하와가 바벨론 물가에서 실연된 장소였다. 신약성경의 구원은 시공간과 물질세계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해야 하는 것으로 보기에 역사는 중요하다.
예수님의 죽음은 철근으로 굳게 닫히고 독한 잡초가 웃자란 인류 역사의 대문이 활짝 열리고 창조주의 하늘과 땅 화해 프로젝트가 강력하게 시작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결국에는 화석류가 찔레를 대신하고, 잣나무가 가시나무를 대신할 것이다. 사랑이 많고 너그러우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유대적 관점이다. 그분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스라엘의 목적이 성취되고 세상을 구원하는 목적이 성취되는 통로인 이 신실하심이 이제 행동으로 드러났다.
● 복음서와 바울서신을 넘어서
교회의 첫 세대에는 예수님이 죽으신 날에 성취된 일에 대해 혁명적 신념들이 폭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혁명에는 다양한 전통과 다양한 표현 방식을 초월하여 꾸준히 유지된 뚜렷한 형태가 있었다. “메시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라는 초기의 ‘공식’ 요약은 최고의 기준으로 남았다. 이 믿음을 자세히 설명한 사람들은 각 요소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성경의 큰 서사들이 드디어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표에 도달했다고 전제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기본 신념을 고수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따라서 그분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메시아였고, 그분의 죽음은 진정 새로운 유월절이었다. 그분의 죽음은 ‘포로기’를 불러온 죄 문제를 다루었고, 예수님이 악의 무게를 온전히 홀로 나누고 견디셔서 이 일이 이루어졌다. 그분의 고난과 죽음에서 ‘죄’가 정죄되었다. 어두운 권세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권세가 패했고, 그 포로들이 자유를 얻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시고,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그런 일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도구인 위대한 성경 이야기들을 충분히 생각하자, 정말로 혁명이 시작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과 함께, 똑같은 혁명이 그들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이 결연히 시작하신 일을 그들도 결연히 지속해야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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