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 서적/혁명이 시작된 날-톰 라이트

11. 바울 서신과 십자가 / III. 혁명적 구출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구속의 목표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을 공유했다. 인류가 구원받는 것은 ‘천국’(바울은 이것을 목표로 언급한 적이 없다)에 가기 위해서나 그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서’(물론 사실이나, 이것이 핵심은 아니었다)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세계를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인들은 현 세계와 앞으로 올 세상에서 왕과 제사장 같은 인간의 일을 공유하려 했다. 큰 진노가 현세에 임하겠지만,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아 새로운 창조세계를 위해 살아갈 것이다.롬 5:9; 살전 1:10
둘째, 그 목표는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수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분의 죽음으로 죄와 죽음의 권세가 패배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님이 ‘죄를 위해’ 죽으셔서 그 패배가 성취되었다. 이스라엘과 세상을 대표하는 예수님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를 온전히 짊어지셔서 ‘그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고통받지 않게 하셨다.

‘소명 언약’ 안에서, 예수 메시아에게서 구원을 발견한 인류는 전에 이를 가로막았던 어둠의 세력의 유혹과 방해물에서 해방되어 지금 여기서 역사하는 새로운 창조세계 내에서 능동적 참가자가 될 것이다. 바울이 보기에, 예수님의 죽음에는 강력한 과거의 중요성이 있었지만,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 사랑의 궁극적 계시로 경축하는 이들은 그 깨달음 덕분에 거룩함과 연합, 고난과 사명의 삶으로 부름받고 회복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오늘날에도 그렇듯, 1세기 교회의 핵심 소명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세계에 주신 약속과 목적을 마땅히 지녀야 할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포로로 잡혀갔고, 이 포로기는 예언자들이 표현한 의미에서 1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새로운 유월절(노예 삼은 권세로부터 해방)은 포로 생활(“우리 죄를 위하여”)에서의 구출을 통해 성취되고, 이 모두는 오래된 하나님의 목적(“하나님의 뜻에 따라”)을 성취하기 위해 일어났다.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형이 ‘통치자들’의 권세를 타도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성경 서사라는 극적이고 충격적인 해결책을 제공함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전혀 새로운 과제가 주어지는 새로운 세계를 일으키고 있었다.
'종'이신 메시아가 아브라함 백성의 운명을 약속된 목적으로 이끄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열방 중에서 찬양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바울에 관한 한, 현재의 분열된 교회의 삶과 죽음 이후의 머나먼 ‘천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 된 예배가 늘 하나님이 염두에 두신 메시아 죽음의 목적이었다.

●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는 연합에 대한 책이다. 메시아 안에서, 특히 그분의 죽음을 통해, 한 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한 가족을 주셔서 믿는 유대인과 믿는 이방인이 한 몸을 이루게 하셨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에 대해 한 말은 모두 이 목적을 겨냥한다. 십자가 때문에 모든 신자는 대등하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목표’라면, 우리는 ‘수단’에 대해 훨씬 더 나은 개념을 얻을 것이다.
사실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내용이다. 바울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구원’처럼 부활도 거의 언급되지는 않지만)이라는 메시아 사건은 한 분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비유대 국가들을 유사 신성의 종으로 삼고 유대인들을 죄의 권세 아래 종 삼았던 ‘권세들’을 이기고 거두신 승리를 드러낸다. 언제나처럼, 바울을 비롯한 성경 저자들이 사람들을 종살이에서 해방하는 이야기를 할 때는 출애굽 서사의 유월절 이야기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우리 죄를 위하여”가 죄 사함과 포로 귀환 부분에 해당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유월절’ 부분이 나타난다. ‘새로운 유월절’은 원조 출애굽처럼 이방 제국들의 정치적 종살이에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 아래 있던 궁극적 종살이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여기서 죄는 (로마서 7장에서와 같이) 궁극적 원수, 사탄, 참소자를 대신하고 있다. 아무튼 바울이 이 짧은 서두에서 말하는 내용은 표준 유대 종말론의 지형에 속하는데, 그 시간은 이 세상이 여전히 뒤죽박죽인 ‘현재 세대’와 하나님이 세상과 자기 백성을 ‘현재 세대’의 온갖 악에서 구원하시는 ‘오는 세대’로 나뉘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셔서 이 일이 일어났다고 선언한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고, 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님의 죽음이 구세계의 권세를 파괴하는 수단이었다.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이제 “새 창조”,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일부다. (이 마지막 문구는 논란이 많은데, 많은 독자들이 바울이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이스라엘 메시아의 전체 백성—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다는 암시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 해석이 확실히 갈라디아서의 전반적 사고와 흐름을 같이하는 듯하다.)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한 가족의 온전한 구성원이고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할례 받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장이 이 양괄식 구조에 녹아 있다. 바울은 확실히, 모세 율법이 의도적으로 제한된 시간 동안 하나님이 주신 목적에 쓸모가 있는 임시 제도임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 제한된 시간이란 아브라함에게 주신 원래 약속과, 메시아가 창조하신 한 가족에게서 그 약속이 성취되는 기간 사이의 일종의 긴 괄호 같은 것이다. 이 임시 기간은 이스라엘의 애굽 체류처럼, 이스라엘과 비이스라엘 국가들이 똑같이 공유하는 종살이 형태였다. 하지만 후자의 중심에는 이 전체 인류의 노예 상태를 다루기 위해 계획된 압축적 유월절 서사가 있다. 예수님과 성령을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고비를 넘어, 전체적으로는 온 세상과 구체적으로는 메시아 백성을 악의 권세가 치명타를 입은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시려는 행동이었다.
하나님은 ‘새로운 출애굽’(이 단락은 출애굽을 암시하는 내용이 가득하다)을 통해 오래전 약속하신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셨다(“기한이 찾을 때”). 그리하여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을 불문하고, 종이었던 이들이 “아들”(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것도 출애굽을 암시한다)로 환영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아들과 아들의 영을 보내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예수 메시아를 믿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그의 성령 가운데 활동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한 분 참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이들이 할례를 받는다면, 이들은 이 새로운 계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될 것이다. 마치 새 시대가 시작되지 않은 것처럼, 자신들이 이전에 몸담았던 구시대를 똑같이 계속해서 살아가는 조금 다른 방식을 원하게 될 뿐이다. 이 책의 목적을 위한 핵심은 이것이다. 메시아의 십자가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말하고 우리가 2장 19-20절에서 살펴보겠듯이, 이렇게 해서 구시대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유월절—하나님의 궁극적 구출 계획이요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이 먼저이지만, 이스라엘의 포로 상태를 감안할 때 이 새로운 유월절이 효과가 있으려면 ‘죄 사함’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렇게 일이 진행되었다.
‘소명 언약’—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소명, 아브라함의 씨의 소명—이 온 세상을 축복하는 수단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셔서 이제 열방으로 복이 흘러갈 수 있다. 그리고 본문 마지막에 등장하는 ‘우리’ 유대인들도 언약 갱신에 대한 확실한 표지 곧 온전한 ‘유업’의 계약금인 성령을 받을 수 있다.
메시아께서 “현재의 악한 세대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려고”(4:1-11에 부합한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셨”다(3:10-14에 부합한다). 이 둘은 정확히 같이 간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수단이다.
바울은 메시아에게는 두 가족이 아니라 한 가족이 있으며, 이를 부인하는 것은 복음 자체를 부인하고 메시아의 십자가형을 불필요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에 “현재의 악한 세대”에 속한 이전의 모든 정체성을 죽이고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하는 효력이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첫째, 이 사건이 발생한 것은, 하나님이 ‘현재의 악한 세대’를 무효라고 선언하시고 ‘오는 세대’를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재의 악한 세대’의 권세들 곧 이전에 사람들을 포로 삼았던 권세들에게는 더 이상 이들을 죄수로 가둬 둘 아무 권리가 없다. 새로운 유월절은 모든 노예가 이제 자유를 얻었다는 뜻이다.
둘째, 이 목표를 달성한 수단이 바로 ‘죄 사함’이다. 바울이 2장 15절에서 암시하듯이 이방인들을 배제하자는 유대인(이나 유대인 메시아 신자)들의 주장이 그들이 ‘이방 죄인’이기 때문이라면, 이 주장은 메시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셨”기 때문에 뒤집힌다. 따라서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인’으로 취급될 수 없고, 그런 근거로 이방인을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기각되어야 마땅하다.
셋째, 유대인(과 1:13-14에서 말한 대로 독실하고 열심 있는 전형적 유대인인 바울 자신)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인정하고 메시아의 가족으로 들어오는 것은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 아들”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도 전혀 새로운 정체성, 궁극적 이스라엘의 정체성, 메시아의 정체성을 받는다. “내가 살아 있지만 내 안에 사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메시아이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메시아의 대표적 지위와 아브라함의 가족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들을 통해 해석된 메시아의 십자가형은 한 언약 가족, 곧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 백성, 이미 ‘오는 세대’의 삶을 경축하는 백성의 창조와 유지를 뜻한다.
첫째, 새로운 유월절이 일어났다. 따라서 이제 당신은 성령이 이끄시는 ‘오는 세대’에 살고 있고, 당연히 그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한다. ‘육신의 일’은 ‘현재의 악한 세대’에 속했으므로 잊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도덕적으로 힘쓰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이전의 주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런 문제는 ‘육신의 일’과 복음으로 그 일을 버리는 것을 인간의 소명에 대한 보통의 윤리적 관점과 그것이 조장하는 구원에 대한 ‘행위 계약’적 관점으로 해석할 때만 불거진다.) 바울이 가리키는 도덕적 수고는 메시아의 가족에 속하게 될 때 실제로 발생한 일을 인식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바울이 2장 19-20절에서 말한 대로,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뜻이었다. “메시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5:24 복음으로 인한 거룩함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메시아 백성의 의무다. 세상은 그들에게 못 박혔고, 그들은 세상에게 못 박혔다. 십자가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창조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낡은 ‘행위 계약’을 떠나 새로운 유월절 백성으로 성경적 ‘소명 언약’을 받아들일 때 벌어지는 일이다.
둘째, 갈라디아서 1장 4절대로, 메시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셨”기에 이 새로운 유월절, 곧 어둠과 ‘현재의 악한 세대’의 권세들에 대한 승리가 성취되었다. 이 권세들에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류와 세상을 사로잡은 이 권세들의 엄청난 장악력이 우상숭배와 죄의 힘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인류 전반, 바울의 성경 해석에서는 특히 이스라엘이 이전에 정당하게 자기들 것이었던 권위를 권세들에게 넘겨주었다. 따라서 메시아가 율법의 정당한 저주 아래 ‘죄를 위하여’ 죽는 것은 승리를 얻는 데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었다. 이 두 단계—하나님의 승리인 유월절, 그 승리의 수단으로서 죄를 위한 메시아의 죽음—가 갈라디아서의 모든 내용을 뒷받침한다.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연합과 거룩함, 그 둘에 동반되는 고난은 메시아의 죽음에 뿌리를 둔다. 그것들이 없어도 된다고 여기는 것은 메시아가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고 여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재의 악한 세대’가 여전히 아무 문제 없이 세상을 장악하고, 이방인들이 여전히 ‘권세들’의 깨지지 않는 통치 아래 있다고 시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체성, 하나님의 사랑(2:20에 나온 대로)이 궁극적으로 계시되지 않았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 고린도전・후서

그는 여러 곳에서 유월절 이미지, 특히 ‘누룩’을 없애는 것과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는’ 개념을 가져다가 메시아 백성이 이전 노예 시절에 지녔던 삶의 방식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메시아의 영단번의 죽음을 자신들의 기본 정체성으로 주장하고 있기에, 그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세상 끝날’이 다가오고, (다시 말해) ‘현재의 악한 세대’가 정죄받고 ‘오는 세대’가 시작되었으니, 이들은 현재의 악한 세대가 아니라 오는 세대에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배워야 한다.
죽음이 패할 수 있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원칙적으로 죽음이 패한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해결하셨기 때문이다.
메시아가 다시 사셨을 때 죽음을 정복하셨다. 죄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것이 연결고리다. 그것이 성경대로, 모든 ‘권세들’로부터의 자유라는 메시지(유월절 메시지)가 ‘죄 사함’의 메시지(포로 생활의 종말이라는 메시지)와 직결되는 이유다.
고난과 수치를 당하는 진정한 사도적 삶이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권면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메시아의 십자가형이 죄를 해결함으로써, 모든 권력 구조를 타도하기 위해 자신을 주시는 넉넉한 사랑 가운데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와 동일한 하나님의 본성이 이제는 복음의 내용뿐 아니라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성품과 환경을 통해 일하실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 얻은 승리가 십자가를 통해, 특히 사도들의 십자가 닮은 삶과 사역을 통해 실행되어야 함을 발견하고 분별했다.
십자가가 사람들을 죄에서 해방시켰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실제로 활동하는, 하나님을 반영하는, 그분의 형상을 닮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주는 그 사랑이 세상에 알려진 그 어떤 권세와도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을 지녀서(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약할 때 강하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 사랑이 승리한 이야기다.
권세들을 이긴 유월절 같은 승리의 내부에는 죄를 해결한, 포로기의 종말이 있다.
그리고 그 죄가 해결된 방식은 진정한 대표가 될 수 있는 유일한 한 사람의 적절한 대리다. 그 한 분이 많은 이의 죄를 담당하신다. 죄 없는 분이 죄인 대신 죽으셨다. 이것만이 사랑, 새로운 출애굽, 포로기의 종말이라는 서사 안에서, 예수님의 서사 안에서 말이 된다.

● 빌립보서

빌립보서 2:6-11

첫째, 이 시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언급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창세기와 이사야서를 비롯하여 다양한 성경 본문을 떠올리게 하는 이 시는 메시아이자 이스라엘의 대표자이며 인간의 전형인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어 인류와 이스라엘의 이야기도 말해 준다. 십자가는 예수님과 이스라엘, 인류,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십자가가 바로 성경 서사의 핵심이다.
둘째, 여기서 십자가는 세상 모든 권세를 이긴 승리의 수단이다. 이 시는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리라고 선언한다. 전반부는 예수님이 보통의 세속 권력으로 하실 수 있는 일, 즉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일을 거부하신 것을 묘사한다. 바울 시대와 빌립보(로마 식민지)에 잘 알려진 세상에서 이런 대조는 뚜렷하다. 세속 황제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누구나 다 알았는데, 예수님은 정반대셨다. 자기를 비우고 겸손히 낮추셔서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일반적인 인간 행위, 일반적인 왕들의 행위와는 정반대다. 그 결과, 예수님의 중개로 십자가가 하나님나라를 세운다. 이것이 후반부 3연이 경축하는 내용이다. 이 부분은 사복음서가 이해한 내용과 정확히 같다.
셋째, 현 맥락에서 이 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서로와의 관계에서 취해야 할 방식의 근거와 본보기가 되는 삶의 양식을 보여 준다. 공동체에서 삶을 나누고, 서로 사랑하고 영적으로 교제하며, 진심으로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라고 강조한다. 바울은 이를 근거로 교회에 지시한다. 그러고 나서, 이 시(빌립보서 2:2-4)는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본보기로서만이 아니라, 소위 이런 종류의 삶을 볼 수 있는 장소로서 말이다. 그 ‘장소’는 메시아 백성이 ‘그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메시아 자신이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여러분이 메시아 예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지니게 되는 마음입니다.”2:5 이들은 이미 예수님께 속했고, 예수님의 ‘마음’이 이렇게 움직이니 그들의 마음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들이 예수님을 닮아 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이 이들의 마음 가운데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메시아는 만유의 주인이시지만 종이 되셨다. 전능하시지만 약해지셨다. 아버지와 동등하셨지만 이런 지위를 악용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들의 죽음을 죽으셨다. 이렇게 십자가가 죄와 죽음의 무게를 떠안고 제거함으로써 하나님나라를 세울 수 있다. 하나님나라는 우상의 권세를 무너뜨림으로 세워지는데, 우상은 인간이 죄 가운데 그들에게 권세를 부여하기 때문에 권세가 있다. 죄가 해결되면 우상들은 원래 모습 곧 번쩍거리는 쓰레기 더미로 축소된다. 죄가 해결되면 세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나라를 세웠다. 둘째, 이것은 죄 많은 인류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인류의 죽음을 공유하고 인류의 죄를 떠안은 그분의 종의 정체성 때문에 가능했다. 셋째, 이 행동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체를 지니”시고 그분과 “동등함”에도 불구하고 하신 일이 아니라, 그분이 그러하시기 때문에 하신 일이었다. 신약성경이 십자가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든, 그것은 늘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다.

● 골로새서

골로새서 2장 13-15절
바울은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내려올 무렵이면 이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의 옷이 벗겨지고 수치를 당하고 패했다고 믿었다.

메시아 사건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여러분을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범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통치자들의 권세는 무너졌다. 새로운 유월절이 이제 확실히 발생했다. 다시 한 번 죄 사함을 통해 권세들을 이기고 승리를 성취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스르고 반대하는 손으로 쓴 문서를… 지워 없애 버리셨”다고 덧붙인다. 이 법조문이 간접적으로 가리키는 유대 율법은 비유대인들은 배제했고, 불순종한 유대인들에게는 저주를 선언하게 했다. 이것이 사라졌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나는 율법을 통해 율법에 대해 죽었는데, 이는 내가 하나님에 대해 살기 위해서입니다”라는 갈 2:19을 기억해 보면, 매우 유사한 지점이다.) 이번에도 이 승리 때문이다. 그 덕에 이방인 선교도 가능해졌다. 열방을 사로잡고 있던 ‘권세들’이 무너지고, 이제 종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우상들은—우상에는 사람들이 공식적으로든(로마제국에서처럼) 비공식적으로든 우상화한 인간 통치자도 포함된다—인간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여한 덕분에 권세를 얻는다.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세상에서 책임을 지도록 설계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인간성이 부패하고 죄를 짓고 인간 소명의 특징을 잃어버릴 때 우상에게 자신들의 힘을 내주고 만다. 그러면 우상들은 이 힘을 이용하여 인간과 세상 위에 군림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들을 망가뜨린다. 하지만 죄를 용서받으면 우상들은 그 힘을 잃고 만다.
성금요일 6시에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이 힘을 잃어버렸다고 바울이 자신만만하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죄가 패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 일이 일어난 것을 실제로 알게 된 한 가지 방법은, 그가 비유대 세계에서 예수님을 주로 선언했을 때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고 이 새로운 주인께 기꺼이 충성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복음의 해방시키는 능력이 그 복음이 선포하는 진리를 보여 주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권세들’은 그 힘을 잃었다. 죄가 패하고 죄인이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출애굽은 죄 사함을 통해 성취되었고, 죄 사함은 진정한 한 분 하나님의 구현이신 메시아의 삶과 죽음으로 성취되었다. 그분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고통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셨다.
예수님과 그분의 죽음의 결과로 간주하는 모든 것이 한 분 하나님의 사역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