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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혁명이 시작된 날-톰 라이트

14. 유월절 백성 / III. 혁명적 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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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그리스도인들에 따르면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그 결과로 세상이 달라지는 어떤 일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성금요일 저녁 6시, 세상이 달라졌다. 혁명이 시작되었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첫 번째 징조는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셋째 날 나타났다.
그분의 부활은 이 이야기의 깜짝 해피엔딩에 그치지 않았다. 부활은 찬란한 시작이었고, 마땅히 그렇게 보여야 했다. 부활은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강한 세력 곧 죽음의 세력이 무너졌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새로운 세력,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이 세상에 나타났다.
부활절의 관점으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공생애와 기이한 ‘왕의’ 죽음(그의 머리 위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다)을 되돌아본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죽음이 곧 궁극적 승리였다는 결론에 금세 도달했다.
그 승리는 ‘이 세대’의 끝에서가 아니라, 고난과 악함이 여전히 만연한 이 세대 한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이는 승리가 두 단계에 걸쳐 온다는 것을 뜻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새로운 종류의 과제를 받게 될 터였다. 최고의 간수를 제압했으니, 이제 누군가가 가서 옥문을 열어야 했다. 죄 사함이 이루어지고 우상이 그 힘을 잃었다. 누군가가 가서 ‘죄인들’에게 널리 사면을 선포해야 했다. 이 일은 새로운 종류의 힘 곧 십자가-부활-성령 같은 힘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고난받는 사랑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기독교의 선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거두신 승리의 실행을 의미한다. 다른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비롯된다.
핵심은, 모든 권세,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이긴 이 승리를 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님의 대표적이고 대리적인 죽음을 통해 얻었다는 것이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을 얻었다.
‘권세들’이 힘을 얻은 것은 우상을 숭배한 인류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다루실 때 그들이 가로챈 권위를 회수하신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8장 36절에서 하신 말씀은 그분의 나라가 이 세상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았다는 뜻이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흠정역KJV 본문은 모든 종류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선교’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데 끊임없이 인용되었다.


● 다시 선교를 생각하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을 내주셨기” 때문에 ‘승리’를 얻는다. 이 승리가 인류를 구출하고 용서하여 그들이 섬기던 권세들의 치명적 억압을 깨뜨린다. 중심에 ‘죄 사함’이 없는, 소위 ‘승리’에 근거한 선교는 한쪽 방향으로 잘못 치우치게 된다. 그것이 내가 설명한 첫 번째 관점, 곧 죄 사함이 없는 승리주의의 위험이다. “영혼이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는 관점으로만 생각하는 ‘죄 사함’에 기초한 선교는 또 다른 잘못된 방향으로 갈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관점, 곧 권세들이 그대로 세상을 다스리게 방치하는 용서의 메시지의 위험이다. 신약성경은 둘 다를 주장하고, 둘의 적절한 관계를 주장한다. 그것이 내 의견이다. 이 점을 바로 이해하면, 교회의 진정한 소명이 다시 부각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승리를—역사의 해방 사건으로서의 ‘죄 사함’에 대한 유대인의 갈망을 통해 재형성된—성경의 유월절 전통과의 관계에서 바라보면, 초기 기독교 운동을 현대적 의미에서의 ‘종교’가 아니라 세상에서, 세상을 위해 인간으로 살아가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된다.
그 원래 혁명에 따르면, 구원받은 인류는 해방되어 원래 의도된 자신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을 내주셔서” 성취된 ‘죄 사함’이 해방하는 승리의 열쇠다. 죄도 중요하고 죄 사함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중요한 이유는 우상숭배에서 비롯된 죄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할 소명을 망가뜨리고 왜곡하기 때문이다. 이 소명은 단순히 “천국에 갈 수 있게 준비되는 것” 그 이성이다.
인간 존재 곧 ‘왕 같은 제사장’ 소명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이런 일반적인 대안의 어느 한 측면이 아니라 훨씬 다차원적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과제를 완성하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이전에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과 땅 사이에 서서, 창조주를 사모하고 그분의 목적들을 이 땅에 실현한다는 뜻이다. ‘왕 같은 제사장’은 ‘땅’의 일부이면서 하늘의 하나님을 예배하고, 새로워진 폐로 하늘의 숨을 쉬면서 그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일하도록 구비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십자가 혁명은 우리를 해방하여 예배와 선교의 리듬에 사로잡힌, 중간 지대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
이렇게 십자가라는 혁명적 승리에 근거하여 선교적 소명을 표현하면 눈에 보이는 빤한 위험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미 승리했다는 인식이 없다면, (우리 스스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만과 (세상이 너무 강력해서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거나, 최소한 가만히 숨어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정리해 주시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두려움 사이에서 쉽게 휘청거릴 것이다. 최초의 승리는 우리에게 자신 있으면서도 겸손하게 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 하지만 죄 사함을 통해 이미 승리를 얻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선교’는 권세들의 손아귀에서 구출된 백성, 죄 사함을 받은 죄인으로 사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 백성이 되라는 부르심에서 동떨어지기 쉽다.
이 지점에서 교회 전체와 개인의 삶에 견제와 균형이 있는 게 틀림없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교회 내에서 목양과 지도가 필요하다. 때로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동참하는 사역을 위해서 죄의 힘이 얼마나 어둡고 깊은지를 새로이 느끼고, 거기서 구원받는다는 의미를 새로이 알아야 한다. 그런가 하면, 늘 죄에만 집중하는 것은 신경증이나 방종한 행동이 될 수도 있어서 오히려 바깥을 내다보고 세상에 치유와 희망을 가져오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순례는 리듬과 균형의 문제다. 그 양상은 다른 성품, 다른 교회, 다른 사회 문화적 상황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그 리듬과 균형을 얻고 늘 새로이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는 더 큰 그림에 시선을 고정해야 하고, 우리를 위한 치유의 가능성도 가득한 그 몸 안에서 개인의 소명 또한 분별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현재의 악한 세대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셨습니다”갈 1:4라는 믿음의 핵심으로 끊임없이 돌아오는 것이다. 이 말씀의 각 요소는 매우 중요해서, 나머지 요소들을 알려 주고 뒷받침해 준다.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은, 우리를 ‘현재의 악한 세대’의 권세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의 새 시대, 새 창조의 일부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새 창조는 예수께서 (그분이 다시 오실 때 마지막 완성을 기다리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지만, 구조된 구조자들의 사역을 통해 지금도 활동 중이다. 이 구원받은 인류는 구원의 사랑을 세상에 가져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들이 의를 불러오고, 화목하게 된 이들이 화해하는 자가 된다. 이들이 유월절 백성이다.
많은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이를 근거로 행동하려 하면, 곧 하나님을 모시고 광장으로 나간다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선교의 표지는 엄청난 저항을 만나고 ‘승리주의’나 그보다 더 심한 비난을 받을 것이다. 일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열의가 식어서는 안 된다. 산상수훈을 읽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아니 그런 사람이 소수에 불과한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아예 없는 세상보다는 늘 더 나은 곳일 것이다. 교회 역사는 우리가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고, 지금까지 만들었으며, 앞으로 만들 수 있음을(오, 주님!) 일깨워 준다. 하지만 요점은, 성금요일에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그 중요한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미 거둔 꼭 필요한 승리를 우리가 또다시 거둘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의 사랑으로, 십자가에 부어진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물론이요, 우리 주변 사람들, 특히 어려운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교회의 선교는 쉽지도 않았고 군대를 동원하지도 않았다. 물론 ‘침략’과도 거리가 멀었다. 핵심은, 세상의 창조주께서 힘을 앗아 간 권세들로부터 그분의 정당한 소유권을 다시 주장하신다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승리는 십자가라는 수단을 통해 실행될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승리를 거두고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제 그 백성의 고난을 통해 그 승리와 혁명이 실행으로 옮겨진다.
바울은 이것이 메시아의 방식이고 십자가의 방식이라고 강조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승리하셨다. 친히 수치와 비하의 자리로 가셨다. 혁명은 그렇게 시작되어 그렇게 세상으로 퍼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난이 따른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사회 문화적 갱신에 “하나님나라를 불러오기” 원하는 열성적인 이들은 십자가에서 시작된 혁명이 십자가를 통해서만 실행된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사실 고난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이 세상에 부어지는 수단인데 말이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 이 말은 믿음을 위해 고난당하거나 죽는 것이 세상의 눈에는 위험하고 체제 전복적으로 보이는 방식을 따르는 데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단순한 필요악이 아니라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인식을 반영한다. 고난과 죽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혁명이 지속된다.
신약성경 곳곳에 이런 사상이 새겨져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그 길에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고난이 있을 때 죄를 짓거나 반항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럴 수도 있으나, 바울이 고린도후서 2장에서 강조하듯이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닥치는 고난은 십자가의 승리를 새로운 현실로 만들고, 그 승리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다.
메시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이미 지금,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미래에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새로운 창조세계에서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수단이다.
메시아께서 고난을 받고 악의 권세들에 승리를 거두셨다. 메시아 백성인 교회는 메시아의 삶, 죽음에서 부활하신 삶을 공유하기 때문에 현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메시아의 승리가 실행된다. 이것이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다. 지금 온 세상을 다스리는 그분의 화려한 통치는 성령이 인도하시는 사역과 그 백성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그들의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메시아의 승리의 고난에 뿌리를 둔,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 백성의 현 과제는 기도, 특히 슬픔이 가득한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의 기도 가운데 깊어진다. 고난과 승리는 늘 같이 간다.
창조주의 뜻은 늘 인간을 통해 그분의 세상에서 일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 중보—참을성 있고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중보—역할은 이런저런 작은 목표를 실행에 옮길 뿐 아니라, 창조세계를 종살이에서 구조하여 마침내 새로운 창조세계를 가져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핵심 초점이 된다. 고난은 승리의 수단인 동시에 승리를 실행하는 수단이었다.
예수님은 고난이 닥칠 것을 경고하시되, 타인에게 고난을 유발하는 이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마 18:7). 그럼에도 고난은 여전히 사역이 진전되는 수단이다.
예수님은 열두 군단의 천사를 소집하여 한순간에 모든 원수를 물리치고 이후로는 아무런 할 일도 남기시지 않는 그런 종류의 혁명가가 아니셨다. 이 책에서 계속 살펴보았듯이, 그분이 완수하신 혁명은 이상한 새 권력, 곧 고난을 밟고서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 승리를 쟁취하는 언약적 사랑이라는 힘의 승리였다. 이는 승리도 똑같은 방식으로, 곧 갑작스러운 정복이라는 지름길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우회로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산상수훈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혁명을 성취하셨는지 이해한다면, 왜 이 혁명이 단 한 번의 완승이 아니라 한 단계씩 실행되어야 하는지, 왜 이 각 단계가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져가신 아낌없는 사랑과 동일한 단계여야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사랑은 언제나 고난받을 것이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가족으로 이끄는 것은 섬세한 신학자들의 복잡한 십자말풀이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요 아낌없이 베푸는 사랑이다.
교회와 우리 배후의 성례전적 사역과 기도를 가지고, 십자가에서 이미 거둔 승리가 언젠가는 온전히 드러나리라는 지식을 가지고, 그리고 기도와 믿음으로 우리는 행한다. 고난이 따르겠지만, 우리가 이미 승리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메시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미 죽어서 장사되었고 새 생명으로 부활했다. 예수께서 겪으신 그 일이 그 백성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위대한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악의 세력에 맞서는 궁극의 보호책으로 “나는 세례 받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예수님의 승리의 보호 아래 있었던 것이다.
메시아의 가족이 된 사람들은 생각과 행동으로 끊임없이 그 가족 됨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전적인 노예의 삶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새로 찾은 자유를 실생활에 옮기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주의 만찬을 행하는 것이 곧 그분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바울이 ‘전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단어 ‘카탕겔로katangellō’는 당시 문화에서 공개 법령을 선언할 때 흔히 사용하던 단어다.
주의 만찬을 행하는 것이 곧 그분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것은 정사와 권세들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주의 만찬은 세상에 대한 새롭게 공인된 사실을 진술한다. 주의 만찬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찬탈한 어두운 세력에 맞서 그들의 패배라는 소식을 선언한다. 주의 만찬은 어떻게든 사람들이 자기들을 예배하기를 기다렸다가 그 힘을 이용하려는 어둠의 권세들을 부끄럽게 한다.
떡을 떼는 식사, 예수님의 만찬은 마치 전령이 장터에서 들려주는 공개 칙령처럼, 예수님이 주님이시며, 그분이 죄와 죽음의 권세들에 맞서 이기셨다고, 그분이 다시 사셔서 죽음이 아무런 권위를 갖지 못하는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셨다고 악의 세력들에 맞서 선언한다.
그분의 형상을 닮아 창조주께 순종하는 인류는 세상에서 위임받은 권위를 실천하여 생명이 번창하도록 해야 한다.
성례전은 예수님이 그 대가를 치르셨고, 그분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음을 찬양하는 것이다. 성례전은 그분의 승리를 강력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성례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승리하셨다고 위협적인 권세들에 맞서 선언하는, 지혜로운 기독교 영성의 일부로 사용될 수 있고, 마땅히 그렇게 사용되어야 한다.
이 모든 ‘승리’ 이야기가 이런 뜻을 지니는 이유는, 우리가 보았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죄 사함을 위해 새 언약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죄는 어둠의 세력들이 자기들을 예배하는 인간을 종으로 삼는 족쇄였다. 십자가에서 죄를 용서받자 족쇄가 끊어졌다. 승리를 얻었다. 이 승리가 교회의 선교에 대한 전망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