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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혁명이 시작된 날-톰 라이트

09. 예수님의 특별한 유월절 / III. 혁명적 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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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시대에 이미,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의미와 함의가 있는 일, 그 일의 결과로 세상이 전혀 다른 곳으로 변하게 될 어떤 일이 십자가에서 벌어졌다고 믿었다. 혁명이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는 ‘속죄’—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단어다—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활, 승천, 성령, 믿음의 삶, 죽은 자들의 궁극적 부활, 만물의 회복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 부활

십자가형 자체는 맥 빠질 정도로 평범한 의미 이외에는 다른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 성금요일 저녁에는 아무도 ‘속죄 신학’의 출발점으로 보일 만한 것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그 첫 번째 자극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셋째 날에 등장했다.
부활은 몸이 죽은 일정 기간 이후에 새로운 몸의 생명을 의미했다.
우리가 1세기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그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몸으로 부활하셨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라고 정말로 믿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정말로 온전히 몸이 다시 사셨는데, 사실상 그 몸은 이전보다 더 온전히 산 상태였다. 그분은 죽음을 통과하여 다른 편으로 나오셨고, 그분의 몸은 새 창조의 시작이셨다. 이것은 단순한 ‘소생’의 문제가 아니라, 새롭게 변화된 종류의 몸이었다.
이 새로운 몸은 창조된 실재의 연결된 두 차원 곧 성경이 말하는 ‘하늘’과 ‘땅’, 하나님의 공간과 우리의 공간에 동일하게 존재하셨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특별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과 함께 주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부활에서 십자가형에 대한 해석의 출발점을 발견한다. 십자가는 그다음에 일어난 일의 관점에서 뜻하는 바를 의미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기본 신념을 요약한 이 공식 문구(“메시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는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에 근거하고 있다.

● 예수님은 왜 유월절을 선택하셨나?

예수님은 지금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시편과 이사야서, 다니엘서 등의 고대 예언이 분명한 길잡이가 되어 준 방식으로 ‘왕이 되실’ 때라고 확실히 선언하고 계셨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혁명처럼 보였고(혁명으로 묘사되기 쉬웠고), 신경이 곤두선 제국의 권력자들로부터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고 자칭 메시아로 죽으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종합하면, 나는 그분이 우리처럼 이 연결고리를 알고 계셨고 그것을 자신의 기도와 성경 묵상 가운데서 소명으로 이해하셨다고 말하는 쪽으로 기운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확실히 아는 내용의 핵심에는 그 일이 발생한 시기가 있다. 그때는 유월절이었는데, 예수님이 이 시기를 택하신 데는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그 당국과의 최종적이고 운명적인 상징적 대결을 위해 모든 유대인이 출애굽을 기념하느라 분주한 때를 선택하셨다. 그들은 이 시기에 하나님이 오래전에 행하신 그 일을, 더 큰 규모로 다시 행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말이 되지 않는가? 하나님나라를 선언하는 것은 마침내 하나님이 그 백성을 노예 삼은 어둠의 세력을 무너뜨리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를 선언하는 것은 이제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출하고 재정비하여 새 생명과 새 과제를 주시고 재편하실 때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를 선언하는 것은 이사야 52장 7-12절에서처럼 하나님이 친히 돌아오셔서 능력으로 그분의 영광을 보여 주시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각각의 세 주제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가르침과 활동, 치유(특히 축귀), 소외된 자들과 ‘죄인들’과 함께 즐기심, 열두 제자를 부르심(그분 주위로 이스라엘 백성을 재건하신다는 확실한 표지),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그분이 하고 계신 일을 분명히 가리키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심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다시 돌아오는 주인 이야기를 말씀하실 때 이것은 오랜 포로 생활 끝에 사람들이 고대하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돌아오시는 것을 확연하게 암시한다.
예수님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루시고 고난받으실 때로 유월절을 선택하셨다는 점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분이 자신의 공생애에 매우 극적이고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절정을 염두에 두셨다는 것을 이미 말해 준다. 예수님은 이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왕이 되는 길이라고 믿으셨다. 유월절을 배경으로 삼고 인간과 비인간 적대 세력과 반복해서 충돌하셨기에, 그분이 이 과제를 이스라엘의 출애굽 해방과 나란히 보셨다고 가정할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모세가 바로와 그 수행원들과 대면하고 애굽에 ‘재앙’이 내리고 나서, 출애굽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전체 유월절 배경이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예상하신 전체 사건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유월절은 “지금 자유!”, “지금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전달하시려고 했던 내용, 예수님이 일어나리라 믿으셨던 내용인 것 같다.
그분은 어떤 조짐이 있는데 그 일이 곧 벌어질 것이라고 선언하고 계셨다. 그 사건을 통해 자유와 하나님나라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실재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혁명을 시작하고 계셨다.
그분이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은 이 모든 내용을 뚜렷하게 만든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하신 일(막 11:12-18)을 유월절의 맥락에 놓으면, 모세가 바로와 대면한 사건이 곧장 떠오른다. 임박한 성전의 몰락이 바벨론의 몰락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 들어 있는 자료(막 13:1-31) 등를 포함하면 이런 연관성은 고조된다.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성전에서 하신 일(아마도 다가올 파멸을 예견한 예레미야와 같은 상징으로 해석된다)은 드디어 자기 백성에게 돌아오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성전이 다른 장소가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어 가고 있음을 발견하셨다고 선언하는 그분의 목적과 어떤 면에서는 관련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는 또다시 출애굽을 가리킨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을 떠나려는 목적이 자신들의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라고 바로에게 내내 강조했다.출 3:12, 18; 4:23; 5:1-3; 7:16; 8:1, 20; 9:1, 13; 10:3, 24-26 출애굽기의 절정은 20장에 나오는 율법 수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이 원래의 계획대로 하나가 되는 새로운 창조세계를 상징하는 ‘축소판’ 혹은 ‘작은 세계’인 성막 건설이다. 예수님이 ‘새로운 출애굽’을 가리키는 것들을 말씀하고 행하셨다면,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현재의 성전을 갱신하거나 대체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다가올 자신의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설명하기 원하셨던 예수님은 어떤 이론이나 본보기, 비유 같은 것을 제시하시지 않고 식사 곧 유월절 식사를 마련하셨다. 출애굽이라는 대사건까지 1,5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대신—물론 유월절에는 모든 사람이 그 사건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었겠지만—그분은 유월절 식사의 의미를 뒤집어서 그 다음날 벌어질 일을 내다보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의미로 만드셨다. 이미 우리는 합당한 역사적 의심을 넘어서서 예수님이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오실 하나님나라와 연관하여 보셨다는 것을 안다.
예수님은 앞으로 벌어질 일이 지난 몇 년간 끊임없이 싸웠던 어둠의 세력들을 마주하여 물리치리라고 믿으셨던 것 같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애굽의 권세와 홍해의 힘까지 물리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이 다가올 사건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과 온 인류를 포로 삼았던 모든 어둠의 세력을 타도하시리라고 믿으셨다. 궁극적인 해방의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이 사건보다 훨씬 후대에 기록한 복음서 기자들은 이 예측이 실현되었다고 확실히 믿었다. 예수님이 승리하셨다. 궁극적 유월절에 걸맞게, 이제 곧 일어날 어떤 일을 통해 하나님은 모든 세상 권세를 무너뜨리고 거기에 묶여 있던 자기 백성을 영원히 해방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곧 일어날 일을 이스라엘의 고대 유월절 전통과의 관계에서 이해하셨고,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시작에 대한 그분의 신념과 직결되었다. 왕이신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이미 생생하고 극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 왕의 능력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을 해방할 결정적 승리를 쟁취하리라고 믿으셨다. 온 세상이 구조되고 치유되고 회복되고 용서받을 것이다.
오랜 약속의 성취, 종살이에서의 해방, 홍해 도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오신 하나님, 상속의 약속 등 유월절과 출애굽이라는 주제는 굉장히 당혹스럽고도 확실하게 응집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비유와 치유, 약속과 경고 가운데 예수님의 공적 선포와 개인적 가르침의 일부를 형성했다. 이제 이 모두가 모여 위업을 성취했다.

어떻게?
예수님이 그 백성의 죄를 다루셔서 세상 권세들에 승리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죄와 그로 인한 노예 상태를 한탄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물론,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의 견해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악한 권세들에 여전히 묶여 있는 한에는 새로운 출애굽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속박의 원인이 이스라엘의 죄였기 때문에 이 죄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유월절 승리와 포로기를 종식하는 ‘죄 사함’, 이 두 주제의 결합이 신약성경 여러 부분의 특징이 될 것이다.
우리는 전체 그림의 핵심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피를 요구하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의 파괴력을 자신에게 전가하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형상—나는 매우 심사숙고하여 이 단어를 사용했다—을 만난다.
유월절 식사가 원래 유월절의 모든 사건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이다. 해마다 먹는 음식은 예배자와 그 원래 사건을 연결해 주었다. 특히, 애굽에서 급히 탈출한 정황을 상징하는 떡과 집 문설주에 피를 바른 양은 복잡하고 급하지만 상징이 담긴 일련의 행동을 말해 주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구원하고 계신 것을, 종살이에서 구출하여 약속된 유산으로 향하는 여정으로 인도하고 계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유월절 식사는 그 일이 영단번에 일어났고, 우리는 그 영향을 받은 백성의 일원이라고 말해 주었다. 예수님이 떡을 두고 하신 말씀은 이를 탈바꿈하여 이제 이렇게 말해 주었다. 새로운 유월절이 일어날 텐데, 이후에 이 음식을 나누는 사람들은 그 영향을 받은 백성으로 여겨지고 그들을 통해 더 넓은 세상에 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식사와 전체 행사, 그 다음날 일어난 사건들을 관통하는 중요한 유월절 주제 내에서 예수님은 이 새로운 유월절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궁극의 해방이라는 수단으로 자유를 불러오는 승리를 나타내리라고 주장하셨다는 점이다. ‘죄 사함’은 궁극의 유월절이 일어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 사함’이 가능할 것인가? ‘피’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의 죽음을 희생으로 해석하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 마치 위대한 회복, 곧 신명기 30장 이후로 약속되고 수많은 예언과 시편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언급된 위대한 새 언약의 순간의 행위자가 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으시는 것처럼 말씀하고 행동하셨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애가 충격적인 종말을 향해 가는 것을 보시면서 이 언약의 회복의 순간을 명쾌하게 말씀하실 것이라는 데 놀라서는 안 된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그분이 그 회복의 순간을 자신의 죽음과 직접 결부하시고, 자신의 피를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희생제물의 피처럼 언급하신다는 점이다. (우리는 희생제물에 대한 이 언급에 동물들이 이스라엘 백성 대신 ‘형벌을 받고 있다’는 뜻이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지적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시점에서 ‘피’를 언급하신 것에도 그런 의미는 없다. 엉뚱한 데서 정답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잘못된 답이 되고 만다.)
여기까지는 역사적 근거가 확실하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을 위해 유월절을 선택하셨다. 유월절은 늘 왕국의 때였는데 이번은 궁극적인 때, 악의 세력에 진정한 승리를 거두는 때가 될 것이었다. 예수님은 잔을 두고 하신 말씀을 통해 이 새로운 유월절, 의도된 새 출애굽을 진정한 ‘포로 귀환’ 곧 궁극적 ‘죄 사함’을 가져올 언약의 갱신으로 해석하셨다. 둘은 같이 간다. 사람들을 죄와 그 죄의 영향력에서 해방하는 것은 승리를 얻는 수단을 뜻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어떤 방법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죄 사함’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나님나라의 도래, 여호와의 재림, 언약과 창조세계의 회복이라는 온전하고 적절한 맥락에서 볼 때 이 이사야 본문이 자신의 소명이 성취되는 방식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에서 핵심이었다고 확신(하고 상당히 자세히 주장)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보다 먼저 가셔서, 그들이 받을 고난을 친히 짊어지셨다.
만나는 사람마다, 가는 마을과 공동체마다 예수님이 주신 인상은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그분은 어디를 가든, 수상한 도덕적 배경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과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나라의 오심을 축하하셨다. 그분은 어디를 가든, 어두운 영의 세력에 사로잡혀 내면이 타락한 이들을 비롯하여 온갖 종류의 환자들을 고쳐 주셨다. (우리가 이를 어떻게 해석하기 원하든,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으셨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래야 우리는 그분이 어둠의 세력과 한 패라는 그분에 대한 고발들을 설명할 수 있다.예를 들어, 마 12:24 이는 확실히 초대교회가 꾸며낸 고발은 아니었다.) 또한 그분은 어디를 가든, 죄 사함을 주셨다. 이제 우리는 죄 사함이 성전에 가서 개인적으로 얻는 것인 동시에, 언약 갱신이나 포로 귀환 같은 더 큰 복의 약칭이라는 것을 안다.
이 모두를 포함하여 훨씬 더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은 권력 있는 긍휼의 사람 혹은 긍휼이 많은 권력자로 다가오신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고 선언하신다. 이를 분명히 상징하는 것이 유월절이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억압하던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드디어 그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다는 상징과 언어로 말씀하시는 순간으로 유월절을 선택하신다. 이스라엘에 주둔한 군대는 이 어둠의 세력이 외형상으로 드러난 상징에 불과했다. 자신이 예레미야 31장 31절의 새 언약을 시작하고 있다는 예수님의 주장과 연관되어, 출애굽기 24장 8절에서처럼 ‘언약의 피’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재해석한 듯하다. 하지만—이것이 극적인 승리라고는 보기 힘든, 점령 세력의 손에 예수님이 죽으심을 통해 일어난다는 분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이 새로운 유월절이 권세들의 패배로 여겨질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똑같은 사건이 예레미야의 새 언약, 곧 죄가 용서받고 드디어 포로기가 끝나는 언약의 출발로 여겨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언약의 갱신은 소위 대표 대리적representative substitute 원리로 설명된다. 이스라엘의 전형인 ‘종’이 이스라엘과 온 세상, ‘많은 사람’의 운명을 스스로 떠안는다는 것이다. 이 원리 자체는 예수님이 나환자나 부정한 여인, 들것에 실린 시체를 만지실 때마다 인간으로서 반복해서 보여 주신 신실한 사랑이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유월절의 핵심 요소, 이사야 52장 7절의 하나님나라 선언(“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이라는 핵심 사실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영광스러운 임재요,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바로 그것을 목격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복음서 전반에서 받는 중요한 역사적 인상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자신이 하리라고 말씀하신 일을 하고 있는 인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구약성경에서 면면히 자신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던 존재를 구체화하고 성육신하신 인간에 대한 것이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매를 맞고 망가진 인간을 닮은, 이상하고 잊기 힘든 형태이긴 하지만—백성을 구원하려고 돌아왔기에 새로운 유월절이 일어났다.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을 상징하는 피, 하나님의 보호와 자기를 주는 사랑을 말해 주는 생명의 피 덕분에 언약이 갱신되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말한다. “여호와의 팔”이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사 53:5)이라서 죄 사함이 이루어졌다. 십자가는 이스라엘 하나님이 죽음으로 나타내신 영원한 사랑이 실제로 드러난 것일 뿐 아니라 그 암호화된 상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