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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혁명이 시작된 날-톰 라이트

10. 구출 이야기 / III. 혁명적 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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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나라’는 ‘천국’이라는 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통치 곧 땅에서도 이루어질 하나님의 다스림을 뜻한다.
사복음서에 나오는 끔찍한 경고들은 대부분 임박한 이 세상의 재앙, 즉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와 관련된 다른 사건들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나라를 시작하셨는지, 어떻게 그분의 십자가형이 그 성취에서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순간이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의 사역 전반을 통해 오는데, 그분의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성취된다. 십자가는 ‘유대인의 왕’의 십자가다.

● 복음서 저자들에게 귀 기울이기


특히,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마침내 돌아오시는 이야기로 들려준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의 살아 계신 구현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메시아적 언어는 이를 표현하는 (아마도 예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완벽한 도구로 인식된다. 마태복음에서 천사가 요셉에게 태어날 아이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하고,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는 장면으로 마태복음이 끝날 때,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전체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누가의 탄생 이야기는 훨씬 더 분명해서, 마리아의 태에 있는 아이를 “거룩한 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눅 1:35 누가복음이 절정을 향해 가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행은 확실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 백성을 찾아오신 때”,19:44 곧 심판과 구원을 위해 친히 오시는 때로 여겨진다.
‘악’은 금세 잊힐 사소한 사건이나, 또는 한쪽으로 밀어 두거나 다른 나라들을 탓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악은 보편적이다. 이스라엘 성경에 따르면, 악은 다른 어디만큼이나 이스라엘에 그 증거가 만연하다.
이렇게 악이 세력을 결집하고 최고조에 달하여서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의 죽음이 급증하는 악의 세력과 (말하자면) 단순히 신학적으로만이 아니라 인과관계로 연결되었다.
이 모두는 특히 우리가 보이지 않(지만 때로 큰 소리를 내)는 악의 세력과 예수님의 오랜 싸움으로만 묘사할 수 있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이 존재들은 예수님을 헐뜯고 그분과 그 나라의 사명을 중대한 위험에 빠뜨리는 일에 몰두한 것 같다.
복음서 저자들이 이런 반대에 맞닥뜨린 예수님을 묘사한 내용을 보면, 세상의 온갖 다양한 악이 접근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악이 목숨을 노리고 다가올 때 예수님이 최후의 큰 구원 행위를 하시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 구원을 통해 마침내 그분의 진정한 정체성이 드러날 것이다. 이 ‘축사逐邪’는 보이지 않고 모호하지만 매우 센 유사 인격, 악의 세력의 강력한 구속에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을 영원히 해방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이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이 악의 세력에 대해 독특한 승리를 거두셨다고 설명하는 방식인데, 서사에 승리라는 개념을 덧붙이지 않고 서사에서부터 그 개념이 드러나 절정에 다다르게 한 것이다.
헤롯과 빌라도의 형상을 한 악이 함께 모였고, 하나님은 그에 맞서 온 세상에 정의를 가져올 진정한 왕을 세우셨다. 이 일은 특히, 예수님의 강력한 이름으로 나타나는 희한한 치유 사역을 통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승리의 유월절이 죄를 해결하는 유월절로 바뀌는 것을 보는데, 어린양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분”이기 때문이다.1:29
예수님이 몸소 한데 모으신 이 주제들의 결합을 따라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이 죄를 거두어 가심으로 악의 세력에 대승을 거두는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목격했다.
이 동일한 결합—곧 죄와 유배를 극복하고 거둔 어둠의 세력에 대한 큰 승리—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인자’로 자주 암시하는 것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진정한 메시아이시고, 그분의 통치가 세상 권력의 통치를 무너뜨릴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유월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죄를 끝냄으로써 이를 성취할 것이다. 앞서 자주 보았듯이, 이 죄의 종식은 포로기의 종말과 여호와의 다시 오심을 의미한다.

● 대표 대리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죄 사함이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죄 없이 죽으시고, 몸소 전체 유대인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셔서 죄 사함이 이루어진다.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성격을 철저한 자기 희생과 자기 부인과 연관 지어 재정의하셨기에 죄 사함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윤리적 요구가 아니라 실상은 개인의 소명인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통해 힘을 재정의하셨고 그분의 끔찍한 죽음이 그 재정의를 궁극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에 죄 사함이 이루어진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면’ 그의 통치에 사로잡혀 있던 이들이 자유를 얻을 것이다. 이런 사고의 흐름은 이스라엘 성경에 뿌리박고 있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드디어 하신 일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가정하에 이치에 맞는다. 이것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심오한 신학적 근거다. 그전까지는 이방인 선교가 불가능했지만, 어둠의 세력이 패배한 지금은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그 종은 이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본래 이스라엘이 부름을 받았지만 할 수 없었던 일을 온 세상을 위해 할 것이다. 열방을 오랜 속박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한 백성에 동참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인류 전반을 괴롭힌 죄와 죽음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는 길의 어느 한 지점으로 모아질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 사건을 바라보고 뱀에 물린 자신들의 상처, 자신들의 죄와 죽음이 해결된 것을 깨닫도록 말이다.
그러므로 요한에게 더 큰 승리는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대신해 죽는,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환 수단으로 성취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전체의 반역을 대신하여, 강도와 혁명가의 죽음을 죽으실 것이다. 누가가 바라바와 예수님을 ‘교환’한 내용을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부분이 그 점을 포착하고 있다.
하나님 백성의 궁극적 목적지는 부활이라고 번번이 강조한다. 하지만 바로 그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는 부활이라는 최종 도착지 이전의 행복한 동산 곧 중간 상태인 ‘낙원’이 주어질 것이다. 죄 있는 자들의 죽음을 대신 죽으신 죄 없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통치의 결과는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만큼이나 개인적이고 친밀할 것이다.
첫째, 십자가는 어둠의 세력이 패배하는 수단이다(22:53을 다시 주목하라). 그리하여 하나님나라 곧 세상에 대한 새로운 주권적 통치가 마침내 시작될 수 있었다. 둘째,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들의 죽음을 대신 죽으시기에 이 일이 성취된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새끼를 보호하려 애쓰는 암탉 같으셨다.(눅 13:34)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자기 백성을 대표하시기 때문에 그분만이 정당하게 그들을 대리하실 수 있다. 그 대리를 통해 (복음서 전체에서처럼) 국가적으로도, (누가복음 23장의 사례에서처럼) 개인적으로도, 더 큰 실재가 발생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온 세상 죄의 무게를 스스로 짊어지고, 축적된 악의 세력 아래 죽으신다. 그래서 이제 드디어 하나님나라가 온전히 임할 수 있다. 이제 예수님의 왕 같은 대표 대리적 죽음을 통해 메시아가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신다.(눅 24:26) 온 세상을 다스리는 그분의 새로운 통치가 시작되었다.
하나님나라는 ‘땅’과 동떨어진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도 시작될 천국의 통치다. 따라서 마태복음 5장 12절에서 약속한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은 사람들이 ‘천국에 가서’ 그 상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너희의 상이 땅에서 드러날 때까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예수님이 개척하고 계신 길에 헌신하려고 욕과 박해를 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을 통해서 실현된다. 이 중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화평하게 하는 자 같은 일부 특징은 확실히 ‘활동적’이지만, 중요한 것은 목록 전체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시작될 것이다. 이들은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되는 법을 배울 것이다.5:13-16 용서와 화해의 길,5:21-26 순결의 길,5:27-32 정직의 길5:33-37을 배울 것이다. 특히, 5장의 절정에 도달하면서, 이들은 비폭력의 길 곧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5:38-48 이들은 다른 뺨을 대고, 십 리를 동행하고, 속옷과 겉옷까지 내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진정한 자녀임을 드러낼 것이다.5:39, 41, 40, 45
마태에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수단, ‘모든 권세’가 예수님께 주어지는 수단이다. 이것은 비단 ‘새 윤리’뿐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행동, 새로운 생활방식을 위한 본보기가 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통치가 세상에 임해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통치는 예수님의 독특한 하나님나라 소명을 통해, 그분이 결국에는 임마누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시기 위해 세상의 멸시와 악의와 적의를 스스로 짊어지심으로써 나타날 것이다. 마태가 아브라함에서 다윗, 포로기, 메시아에 이르는 족보로 스케치한 이스라엘의 긴 이야기가 성취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다. 이스라엘은 세상의 운명을 짊어졌고,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짊어지셨다. 그분의 죽음을 통해 세상의 헤롯과 빌라도들이 책임을 추궁당하고, 하나님의 통치—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삶에 드러난 팔복이 그 특징인—가 시작되었다.
신약성경 전반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구출하여 ‘지옥’을 피해 ‘천국’에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의 강력한 혁명 곧 새로운 종류의 권력이 가득한 혁명으로 여겨진다.
첫째, 그 나라는 제자들이 기대한 방식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받을 세례를 말씀하시는데,10:38 이는 그분이 받으실 고난을 암시하는 듯하다. 복음 이야기의 출발점에 있었던 그분의 세례가 그 고난의 이정표였기 때문이다. 그분은 ‘잔’도 말씀하시는데, 이는 이후의 겟세마네 동산 장면14:36에서 뚜렷해지는 소명을 암시한다. 그분은 그 백성이 더 이상 마실 일이 없도록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이 비우셔야 한다.(특히, 렘 25:15-17; 49:12; 5:7; 애 4:21)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나라를 성취하신다. 죄인들을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몸값’으로 주시기 때문이다.
새로운 종류의 권세가 세상에 나타나는데, 그 권세는 자신을 주는 사랑의 권세다. 이것이 성금요일에 시작된 혁명의 핵심이다. 보통의 수단으로는 보통의 권세를 무너뜨릴 수 없다. 한 세력이 또 다른 세력을 압도한다면, 여전히 ‘힘’이 이기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권세를 이긴 하나님의 승리의 핵심에는, 오래된 예언자적 소명에 순종하여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목숨을 주는, 자신을 주는 사랑이 있다. 이 문구가 암시하는 이사야 53장에 나온 대로, 많은 사람을 대신한 한 사람의 죽음이 핵심이 될 것이다. 그 죽음이 권세를 타도하고, (예루살렘 성벽 파수꾼들이 똑똑히 목격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안내하며, 언약을 새롭게 하고, 창조세계를 본래의 목적으로 회복한다.
성경 전반에서 소명 언약이란, 죄 문제가 해결되고 인간이 해방되어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목적의 일부인 그분의 형상을 닮은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서에 드러난 이 십자가의 비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나라나 속죄에 대해 역사와 상관없는 동떨어진 이해에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라고 초청한다. 온갖 우여곡절이 많은 이 서사 안에서 살아가라고,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하나님나라 사역을 목격한 무리 가운데 살아가라고, 우리가 (그 심오한 모호성을 알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교회의 삶이라고 부르는 지속적인 장기 서사 안에서 살아가라고 초청한다. 특히, 초창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알았던 것처럼, 우리도 마지막 만찬이 다시 되살아나는 반복되는 식사를 통해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그분의 죽음을 단순히 이해할 뿐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원한 방식이라면, 그것을 궁극적 하나님나라의 표지와 맛보기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이유는 충분하다. 그 안에 우리도 ‘죄 사함’을 공유한 사람들이라는 확신을 담고서 말이다. 복음서는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위해 팔복 백성이 될 수 있는 에너지와 방향 감각을 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승리하시고 세상의 정당한 통치자가 되셨으며, 그분의 평화와 화해의 길이 세상 모든 권세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이 드러났음을 우리는 안다.
역사의 주인이 약속을 받은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해야 할 일을 감당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