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 서적/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톰 라이트

2. 낙원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다? / 1부 배경설정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희망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혼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짓밟힌 적이다.
더 이상 죽음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던은 신약성경의 핵심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포착했다. 즉 마지막에 가서는 죽음이 그냥 새롭게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정복된다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자기 마음대로 행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저 불멸의 영혼이 필멸의 육체를 두고 떠나오는 것이 우리에게 약속된 궁극적 미래라면, 여전히 죽음이 다스리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의 패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른 설명의 차이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대단한 적이지만, 그것은 정복되었고 결국에는 온전하게 다 정복될 것이다.

 어떠한 선택들이 가능한가?

기독교 사상은 죽음을 야비한 적으로 보는 것과 좋은 친구로 보는 것 사이를 오갔다.
성경은 ‘사후 천국행’에 대해 말하는 바가 거의 없으며, 지옥행에 대해서도 말하는 바가 많지 않다.
신약성경에서 사용되는 천국이라는 용어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의 설교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는 사후의 운명을 일컫는 말도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말도 아니다. 이것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일컫는 말이다.
요한계시록 4-5장은 현재의 실재를 그린 것이다. 즉 우리가 사는 현재 삶 가운데서 천국의 영역을 그린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미래의 운명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다른 영역, 숨겨진 영역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셨고, 마지막에 그 둘을 다시 만드셔서 영원히 연결시키실 것이다. 계시록 21-22장에서 나오는 실제 종말의 그림을 보면, 우리는 속죄받은 영혼들이 육체가 없는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서 하늘과 땅을 영원히 감싸며 결합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연옥이란 말하자면, 죽을 때도 우리는 여전히 창조자를 만날 준비가 덜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빛을 향해 성장해 가는 정화의 시기가 필요할 것이라는 주장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오늘날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죄의 일소’라든가 그 외에 다른 불편한 것들을 강조하는 표현보다는, ‘정화’라든가 ‘빛을 향해 성장해 간다’는 식의 표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만인구원설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굴복할 때까지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믿음을 선택할 기회를 계속해서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통 기독교가 제시하는 천국의 그림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며 사는 생기 있고 적극적인 인간의 삶이라고 주장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때때로 현재의 활동적 삶을 미래에 투사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혼란의 영향

죽음은 예수님이 정복하신 그러나 아직은 최종적 패배를 기다리고 있는 적이다.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부활절이다. 그것을 없애 버리면 정말이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장례식에서 화장이 그 이면의 함의, 즉 새로운 육체를 얻어서 살아가게 될 미래의 삶이 있음을 확신 있게 단언하지 못하고 창조계 속으로 다시 융합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혼란이 지닌 더 큰 함의들

새 창조의 일부로서 부활을 믿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확고한 교리를 보면, 현재의 세상과 우리의 현재 육체에 더 많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전통적 유대교와 전통적 기독교에서 이 교리는, 현재의 세상(그리고 현재의 상태)과 (어떠한 형태로 주어지건 간에) 미래의 세상 사이에는 불연속성뿐 아니라 연속성도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며, 그 결과 현재에 우리가 하는 일이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바울은 현재 시점에서 우리의 육체를 제대로 다루어야 하는 주된 이유로 미래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으며(고전 6:14), 뒤로 물러앉아서 무슨 일이든지 그저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현재에 행해지는 그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미래에서는 낭비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지금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유로 미래의 부활을 제시하고 있다(고전 15:58).
부활은 언제나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이 선한 창조자라는 확고한 관점을 수반했다. 이 한 쌍의 믿음은 이 세상의 불의에 대한 온순한 묵종이 아니라 그것에 대항하는 확고한 결의를 불러일으킨다.

핵심 질문들

부활절은 희망이 몸소 미래에서 현재로 잠시 들어옴으로써 이 세상 전체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궁극적인 미래의 희망은 여전히 놀라움으로 남아 있다. 그것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현재로서는 그것에 대한 이미지와 은유만이 있는데 실재는 그것보다 더 위대하고 더 놀라울 것이라 추측하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에 주어진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이 책도 그 일부를 구성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임무는, 부활 백성으로서 첫 부활의 징표가 되고 마지막 부활의 예견이 되면서, 함께 그리고 따로 예배하고 선교하며 마지막 때까지 기독교적 삶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