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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혁명이 시작된 날-톰 라이트

08. 새로운 목표, 새로운 인류 / III. 혁명적 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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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대답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철저하기 재정의하셨다. 이 말씀은 전반적인 기대를 전혀 새로운 초점, 곧 예수님의 독특한 역할로 집중시켰다.
예수님은 전체 성경 이야기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들을 향해 전진해 왔다고 주장하셨다. 최근에 일어난 일들은 단순히 예기치 못한 반전이 아니라, 그 이야기의 성취로 보아야 했다.
예수님의 구체적인 재정의(와 그 재정의를 보여 준 누가)는 그 지형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전에 상상한 모든 것을 초월하여 그 지형을 뒤바꾼다. 토라와 예언서, 시편에 다양하게 표현된 이스라엘의 소망은 이스라엘(이나 인류나 신실한 자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빼돌리는 구출 작전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구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통해 구속받은 인류는 자신이 원래 창조된 역할을 다시 한 번 더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정의와 자비가 영원히 다스리는, 새로워진 세상을 위한 소망이었다. 예수님은 이 소망을 포기하고 ‘구원받은 영혼이 천국 가는 것’을 지지한다고 설명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새 창조에 대한 이 소망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셨다.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 금요일 저녁, 비록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첫째, 이교의 압제에서 구출된다는 유대인들의 소망 곧 온 세상을 위한 새로운 정의와 평화, 여호와가 그분의 성전으로 궁극적으로 돌아오시는 것을 철저하게 재정의한다. 이스라엘 메시아의 십자가형과 부활을 그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놓고 새로운 초점으로 삼는다면, 모든 게 달리 보인다. 둘째, 기독교 세계는 오랫동안 “영혼이 구원받아 천국 간다”는 ‘구속’의 의미를 고수하고 가르쳤는데, 이는 복음이 우리에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할 하나님나라를 약속한다는 신약성경, 다시 말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메시아 안에서 통일된다거나, 또 달리 말하면 “정의가 깃들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 같은 메시지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우리가 그 이상한 밤에 혼란을 느낀 제자들처럼, 어떻게 옛 성경적 소망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재정의되었는지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면, ‘천국’과 관련된 ‘기독교’ 문화의 기대감을 훨씬 더 철저하게 수정한 시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첫째, 이 약속된 새 세상에서 인류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둘째, 인간의 실패(‘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인류는 구원을 받아 그 부르심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현대 대중 기독교 사상은 세 층위의 실수를 범했다. 우리는 종말론을 플라톤화했고(약속된 새 창조를 ‘천국에 가는 영혼’으로 대체했다), 그로 인해 인간학을 도덕화했으며(인간의 소명에 대한 성경의 개념을 도덕적 성과에 대한 질적 검토로 대체했다), 그 결과 우리의 구원론 곧 ‘구원’에 대한 이해도 이교화되었다(우리가 곧 살펴볼 진정한 성경적 개념들을 ‘하나님이 자신의 진노를 만족시키려고 예수님을 죽이셨다’는 개념으로 대체했다).
새로운 창조세계는 우리가 기도와 성경 공부, 성례전, 하나님나라를 위한 세상의 사역에서 잠깐씩 감지하는 하늘과 땅의 만남을 완벽하게 지닌, ‘천상의’ 세계가 될 것이다. 인간의 소명에는 강력하고 타협 불가능한 윤리적 요소도 확실히 있는데, 이 요소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소명이라는 더 큰 범주 가운데 자리할 때 사라지기보다는 오히려 강화된다. 구원의 수단에는 자기 백성을 대표하고 대신한 예수님의 죽음이 포함되는데, 많은 이들이 다소 추상적 범주로 이해하는 그런 의미에서는 아니다.
이 모두의 핵심에는 참 인간이신 예수님의 성취가 있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구현하신(또는 ‘성육신하신’) ‘형상’이시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나라를 임하게 하려는 예수님의 사역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분의 죽음은, 인간의 잘못 곧 도덕률 위반을 통해서가 아니라(물론 도덕률 위반도 문제가 되지만, 이것이 핵심은 아니다) 창조주를 예배하고 그분의 지혜로운 청지기직을 세상에 반영해야 할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의 실패를 통해 세상에 퍼진 파괴적 권세들을 이기신 승리였다. 예수님의 죽음에 이런 효력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곧 살펴보겠듯이, 그분이 대표하고 대신하신다는 의미에서)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오래전에 약속한 ‘죄 사함’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플라톤화, 도덕화, 이교화된 사고에서 벗어나 이스라엘 성경의 세계(“메시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로 들어갈 때 이 모든 내용이 이치에 맞는다. 그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의미이지만 말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철저하게 재정의하시며 이 소망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되었다고 설명해 주셨다. 이스라엘의 소망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재확인해 주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누가복음 1장 68 -77절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한 노래에서 ‘죄 사함’이 오래된 약속의 성취를 가리키는 핵심으로 등장한다. 이 약속의 실제 효력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다려 온 이 민족의 구원이다. 이것이 “죄 사함”과 “성경대로”라는 개념이 가리키는 목적이다. 이스라엘 성경 일부에서처럼, 신약성경에서는 이 목적이 유대인들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장될 것이다. 시편과 예언자들이 분명히 밝혔듯이, 이스라엘의 소망이 성취됨으로써 세상의 모든 민족이 한 분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환영을 받게 된다. ‘죄 사함’은 이스라엘에 약속하신 구원의 복을 요약해 주는 동시에 비유대인들을 한 가족으로 환영하는 주요한 복으로 볼 수 있다.
신명기가 암시한 대로 참 하나님께 돌아온 믿는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언약의 갱신과 ‘포로기의 종말’이라는 고대의 성경적 의미에서 ‘죄 사함’을 경험하고 있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려고 우상을 버리고 돌아온 믿는 이방인들은 이들의 완전한 포용을 목적으로 한 하나님의 사면을 통해 ‘죄 사함’을 경험하고 있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 설교에는, 이 ‘죄 사함’의 개념을 예수님에 관한 좋은 소식을 믿은 결과로 나타날 핵심으로 강조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메시아 예수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에는 언약의 갱신이라는 복을 주는 목적이 있었다.
우리가 사도행전 초기 설교에서—(우리 추측으로) 해당 사건들보다 최소한 한 세대가 지나서 글을 쓰고 있는 누가가 여기서 좀 더 발전된 ‘속죄 신학’을 주입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하나님의 구조 활동 목표가 성경의 서사와 예언들에 명쾌하고도 견고하게 뿌리 내리고 있음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이 실제 뜻한 바다.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비유대인들을 이 회복된 백성으로 맞아들인다는 성경의 서사(사도행전 2-3장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지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시작되었는데, 넓게는 국가 차원에서, 좁게는 개인 차원에서 작용하는 이 모든 내용을 한 구절로 요약한 것이 곧 ‘죄 사함’이었다.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과 성령을 통해 일어난 일이 이스라엘 예언의 성취”라는 것이다. 즉 법정은 이스라엘 조상의 전통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제자들을 고발할 수 없다.
복음의 목적을 진술하는데, 그 목적은 곧 ‘죄 사함’이 이스라엘을 속박에서 해방한 새 세상이다. 사도행전 전체에서 그렇듯이, 여기서도 우리는 이 주제가 새로워진 인간의 소명이라는 개념 안에서 펼쳐지는 방식을 보기 시작한다. 이 새로운 하나님의 목적들에서 적극적 역할을 하기 위해 성령으로 무장한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다.”
복음이 여전히 성경의 성취 가운데 있으면서도 활짝 열려서 온 세상을 포함하는 지점으로 직접 이어진다(행 13:46-47).
이 모두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우리는 (“메시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초기 복음 공식과 직결되는) ‘죄 사함’이라는 표현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내가 복음의 ‘목적’이라고 부른 것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목적은 “죽고 나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내용을 언급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전체는 다음을 전제한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나라는 이미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6; 8:12; 19:8; 20:25; 28:23, 31). 둘째, 이 나라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다(1:11; 3:21). 셋째, 이 마지막 새 세상에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새로운 몸의 생명으로 부활할 것이다(4:2; 24:15, 21; 26:23) 사도행전 1장 9-1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경우를 제외하고, 사도행전에는 사람들이 “천국에 간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다. 게다가 그분의 ‘승천’은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대중적 이미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보좌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과 상관이 있을 뿐이다(참고. 고전 15:25). 사도행전에서 ‘죄 사함’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서사와는 전혀 다른 서사에 속한다. 다른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죄 사함의 목적은 이미 시작되었고 오는 세대에 완성될 하나님의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분의 형상을 지닌 인류로 온전한 역할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죄 사함’이 함축하는 바에 충실하려면, 이 모든 의미가 훨씬 더 큰 무언가, 훨씬 더 혁명적인 무언가의 일부라고 주장해야 한다. 이 더 큰 실재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더 작은 실재, 곧 죄인인 내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꼭 필요하다. 하지만 역사가 보여 주듯이, 그 실재는 플라톤화된 복음 내에서 너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런 복음은 창조 질서는 아예 포기한 채 현재의 초연한 영성과 미래의 초연한 구원만을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혁명은 또다시 길들여진다. 더 큰 실재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된 실제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그 결과로 만사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금요일 저녁 6시에 무언가가 달라졌고, 그 변화는 근본적이었다. 하늘과 땅이 만나서 우주의 ‘새 성전’이 지어졌다. “하나님께서 메시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고.”(고후 5:19)
고대의 예언이 적절히 성취되어 이 사건들을 통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새 시대가 드디어 시작되었다고 보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현실에서, ‘죄 사함’은 단순히 한 개인의 체험이나 도덕 명령에 그치지 않았다(물론 그것도 포함하지만). 죄 사함은 새로운 존재 상태, 새로운 세상, 전형적인 죄 사함의 순간인 부활의 세상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이제 첫 제자들은 ‘죄 사함’을 세상의 존재 방식에 대한 사실,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단 한 번의 성취에 뿌리내리고 그분의 부활로 드러났으며 성령을 통해 변화된 제자들의 삶으로 실행된 사실로 보였다. 죄 사함은 ‘유월절’이나 ‘새로운 출애굽’을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 되었다. 혹은 하나님나라 선언문인 이사야 52장과 ‘종’의 사역을 담은 53장에 곧바로 이어지는 54-55장에서처럼, ‘죄 사함’은 ‘새 언약’과 ‘새 창조’를 뜻하게 되었다. 복음은 이 새로운 실재를 선언했다.
죽음을 물리치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 새로운 실재는 최종적인 새 창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궁극적 열매를 맺도록 계획되었다.
만물 곧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메시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궁극적 성전 곧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새 세상의 역할을 한다.
죄와 죽음을 이미 정복하신 예수님은 죄와 죽음을 비롯한 모든 원수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다스리실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옛 피조물의 태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이 훌륭한 비유를 출애굽 사건들에 대한 강력한 암시로 엮어 낸다. 결국에는 이 피조물 자체가 ‘출애굽’하여 부패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화로워질 때 찾아올 자유를 공유할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 소망이다.
이 모든 하나님의 구출 계획의 ‘목적’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다. 이 모두는 이스라엘의 옛 소망이 성취된 것이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랐지만, “성경대로” 이루어졌다. 이 모두는 ‘죄 사함’이라는 문구로 요약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 예상치 못한 희한한 방식으로 성취되었을 뿐이다.
‘죄 사함’은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실재가 틀림없다. 죄 사함은 (유행어를 사용하자면) ‘우주적이다.’ 개인이 죄 사함을 공유할 때, 곧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아는 안도감을 느낄 때 이들은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간에 새로운 창조세계라는 큰 합창단에서 ‘내부 파트’ 중 하나를 노래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셈이다.
‘몸이 없는 천국’이라는 플라톤화된 개념의 핵심 문제는, 그 운명을 기대하거나 준비하면서 현재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못된 관점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일반 대중이나 심지어 잘 배운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천국’을 ‘착한 사람’이 가는 곳, 다시 말해 ‘나쁜 사람’은 갈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복음의 표준 가르침으로 이런 개념은 금세 조정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나쁜 사람’이기에 누군가가 ‘천국에 간다’면, 필시 우리의 나쁜 점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다른 누군가의 ‘선함’이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고방식 전체의 문제는 도덕 행위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으로 보는 개념 자체가 왜곡이라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우리는 궁극적 끝에 대한 시각 곧 종말론을 플라톤화했고, 그에 맞춰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 곧 인류학도 ‘도덕화했다.’ 이는 기독교 윤리라는 전통으로 이어졌는데, 나는 이를 인간에 대한 성경적 소명 곧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그분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사장직은 ‘윤리 행위’를 핵심 요소로 포함한다. 하지만 ‘용서’처럼 이 윤리 행위도 더 큰 실재를 가리킨다. 곧 하나님의 현재 창조세계에서의 적극적인 역할로 예상할 수 있는 하나님의 미래 세계에서의 적극적인 역할에 대한 인간의 소명 말이다.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는 인류에게 벌어진 일을 묘사한다. 이들은 예배하고 증언한다. 예배가 ‘제사장’ 주제에 상응한다면, 증언은 ‘왕’ 주제에 상응한다. 둘 다 이스라엘의 소망과 소명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 십자가가 형성한 나라

첫째, 이스라엘은 이방 권력자의 지배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둘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마도 메시아라는 대리인을 통해 온 세상 통치자가 되어 정의와 평화의 새 시대를 여실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임재가 그 백성과 함께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진심으로 예배하게 될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출발점이 될 것이고, 사도행전은 어떻게 이 세 가지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다.
사도행전은 “성경대로” ‘죄 사함’이 좌우명이었던 한 백성이 세상으로 나가서 하나님나라와 예수님의 주권을 선언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에서는 바울이 로마에서 이 일을 했다(28:31) 하지만 이 일이 이루어진 방식은 기독교 이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 해방되고 권력자들이 무너지고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리라 꿈꾸던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과 성령을 통해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해방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십자가와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권력자들이 무너졌고,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신자 공동체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물론, 완전한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다. 누가는 그 점을 매우 분명히 한다. 예수님은 만물을 심판하고 회복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행 1:11; 3:31; 17:31). 하지만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에서 하신 말씀처럼,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새날 곧 하나님나라라는 실재를 열게 될 것이다(눅 22:18).
첫째, 진정한 예배의 회복이다. 사도행전은 에베소서 1장 10절처럼 새로운 성전이라는 실재를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부활하신 인간 예수님은 하늘로 들려 올려지시고, 이로써 그분의 위격 안에서 하나님의 선한 창조세계의 두 영역을 하나로 합하신다. 하지만 예수님의 승천으로 하늘과 땅이 이미 합쳐져서 ‘땅’의 일부—예수님의 인간 몸—가 온전히 ‘하늘’에 있다고 하면, 성령이 강력한 바람으로 제자들에게 임한 사도행전 2장에서처럼 그 반대 방향으로도 다시 합쳐진다. 이것은 불과 구름이 성막을 채운 사건이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솔로몬의 성전을 채운 사건에 맞먹는 신약성경의 사건 중 하나다.
여기에 예수님과 성령님과 함께 새 창조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믿음의 근거가 있다.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소우주’ 대신, 친히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충만한 백성이 새로운 성전 곧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 된다. 첫 제자들이 가장 중요한 의미에서 그 나라가 이미 임한 것처럼—다른 의미에서는, 헤롯과 카이사르가 여전히 건재하기에 확실히 미래의 일이었지만—말한 것은, 이 새로운 실재 가운데 거하며 이 실재를 살아 냄으로써만 이해가 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새로운 성전 백성으로 구성되었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대부분의 논쟁은 성전에 집중된다. 또한 이 새로운 공동체의 새로운 생명 자체가 예배에 뿌리박고 있었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권능 있는 일들”(2:11)을 선포하고, “사도의 가르침”과 “공동생활”, “빵을 떼는 일과 기도”(2:42)를 중심으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정립했다. 최소한 처음에는, 옛 성전과 평범한 가정 영역을 하나로 연결하려고 애썼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이후의 많은 장면은 새로운 예배의 삶과, 어떻게 사도들이 이 새로운 삶의 양식을 통해 제사장처럼 하늘과 땅의 불편한 교차로에 서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사도들은 성경에 기초한 예배와 중보, 위험과 순교 가운데 하늘과 땅을 하나로 모은다. 스데반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다고 증언하고는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중보에 동참하는 장면이다(7:56-60). 이런 장면들이 제사장 같은 장면이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이야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자 세상의 창조자의 강력한 임재와 회복된 예배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둘째, 이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소망이 있다. 예배와 기도에서 증언이 나오기 시작한다. '증언 '은 새로운 상황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역시 제자들이 놀란 청중에게 고대의 예언이 성취되었고, ‘죄 사함’이 실제 시공간에서 이루어졌으며, 이제 온 세계가 그 창조자와 회복자의 이름으로 정렬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는 오순절 날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선언하는 것은 이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고 ‘죄 사함’이 그 모든 것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 다양한 복음 선포 장면을 통해 계속되다가 12장에서 첫 번째 결정적 장면에 도달한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교회에 심각한 위해를 가하려 하지만, 천사가 베드로를 옥에서 풀어 주고 헤롯 자신이 갑작스레 죽음을 맞으면서 뜻을 이루지 못한다. 다음과 같은 누가의 말이 이런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헤롯이 죽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자라나고 번창했다.”(행 12:24) 여기에 하나님나라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있다.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세상 나라들은 하나님나라에 비해 힘이 없다는 게 드러날 것이다. 세상 나라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박해하고 죽일 수는 있겠지만, 이는 예수님에 이어 다른 신약성경 저자들이 하나같이 강조했듯 하나님나라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 나라는 정확히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성취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이들의 고난을 통해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이교 세계를 다스리던 ‘권세들’이 십자가에서 패하고 무너졌기에, 전에 종 되었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메시아의 해방하시는 새로운 통치에 충성할 수 있게 되었다.
부패한 위정자들, 잔혹한 군인들, 무능한 뱃사람들, 폭풍우, 치명적인 독사 등 세상 권세들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그는 가택 연금 중에도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주 되신 예수님을 “매우 담대하게 가르쳤으며,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28:31)
이 모두가 이스라엘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이라는 강력한 선물로 하나님의 세상이 회복되었고,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으며,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이 내주하는 이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고—이들은 예배와 증언으로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앞당기고 있다—누가가 말하는 방식이다. 권세들을 물리치고 이미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셋째, 따라서 (돌아오셔서 통치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칭송하는) 예배와 (구원하시는 참된 주님을 세상에 선포하는) 증언 이후에는 이스라엘이 이방 통치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라는 소망이 등장한다. 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이스라엘은 죽음에서 해방되고, 그와 함께 바벨론이 부과한 모든 궁극적 포로 생활로부터, 모든 폭군의 궁극적 무기로부터 해방되었다.
우리는 누가가 대부분의 다른 초기 기독교 작가들처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춘 메시아 공동체를 해방되고 구속받은 사람들로 보았다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이들 가운데서, 이들을 위해, 이방 권력자들로부터 구출하겠다는 오래 기다려 온 약속이 성취되었다. 예배하고 증언하는 하나님 백성으로 활동하고 있다. 출애굽기 19장의 “제사장 나라”로, 이사야 49장의 “종”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러면서 그분이 온 땅의 하나님이심을 발견하는 시편 속 백성으로 말이다. 이스라엘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이야기를 볼 때마다 부활과 승천과 성령이 이 전체 사건에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에 의미가 없다면, 그분의 죽음이 이후 다른 사건들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면, 그중 어느 하나라도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번번이 발견한다.
계시록 5장에서 보좌 주위에 있던 이들은 “주께서… 주의 피로 하나님을 위해 한 백성을 사서, 그들을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통치할 것입니다”9-10절라고 찬양했다. 이것이 늘 큰 구원 행위의 목표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창조주 유일신교, 종살이와 출애굽의 성경 이야기, 포로 생활과 귀환, 성전 파괴와 재건, 창조세계의 궁극적 회복을 붙들었다. 비록 자신들이 생각한 대로는 아니지만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자신들이 오래전에 약속된 새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이 새 세상에서 예수님은 이미 주로 등극하셨고 하나님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주권을 행하고 계셨다. 이들은 자신들이 왕 같은 제사장처럼 예배자와 증인으로 살아가라는 부름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또한 나사렛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이루어진 일 덕분에 이 모두가 가능할 뿐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었다. 주후 33년 니산월 14일 저녁 6시에 이 일이 성취되었다. 비록 이후로 사흘간 아무도 몰랐(고 상상하지도 못했)고, 눈에 띄는 효력이 나타나기까지는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말이다.
이 큰 서사 곧 이스라엘의 삼중 소망과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새로운 소명을 염두에 둘 때에만,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오로지 이렇게만 이 혁명의 원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