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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혁명이 시작된 날-톰 라이트

05. "모든 성경에" / II. "성경대로": 이스라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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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과 아담

우리가 이 전체 서사와의 적절한 연관성 가운데 예수님의 죽음을 볼 때에야 비로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의미한 바에 대해 던지고 싶은 질문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대로”라는 표현에 초기 기독교의 중요성을 온전히 부여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 죄를 위해”라는 문구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온전히 의미한 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플라톤화된 구원관과 인간 곤경의 윤리화, 궁극적으로는 구원의 성취에 대한 이교화된 관점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플라톤화된 구원관은 혁명의 선두를 둔화시켰다. 인간 곤경의 윤리화는 문제의 일부를 전체인 양 다룬다. 구원의 성취에 대한 이교화된 관점은 성경의 진짜 그림을 왜곡한다.
이스라엘과 그 땅 이야기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와 의도적인 병행을 이룬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그 가족 이야기를 이 가족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는 측면에서 소개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문제를 되돌려 놓기 위해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셨다. 이렇게 해서 인류를 향한 원래 계획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약속의 땅은 새 에덴이 될 것이다. 이 점은 원래의 성경 본문과 후대에 기독교와 유대교 저술에서 이 이야기를 인용한 많은 곳에서 확실히 볼 수 있다.
세 가지가 결과가 뒤따른다. 첫째, 약속의 땅은 사망과 반대되는 생명의 장소가 될 것이다. 신명기는 뒷부분으로 갈수록,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추방당하여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된 창세기 3장 22-24절을 상기시키면서 이 점을 더욱 강조한다.30:15-20 태초에 인간이 받았다가 잃어버린 생명은 마침내 회복될 것이다. 약속의 땅의 ‘생명’이 동산에서 추방된 ‘죽음’의 해결책이 될 것이다.
둘째,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될 것이다. 원래 하늘과 땅 창조세계는 인류뿐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역할을 해야 했다. 창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인 인류가 그 중심에 있는 일종의 성전이었다. 광야의 성막과 이후의 예루살렘 성전은 축소된 창조세계 곧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회복하고 새롭게 하시는 그분의 궁극적 목적의 표지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실 장소,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충만한 곳이 되어야 했다. (수많은 성경 본문이 이 궁극적 목적을 당연시하지만, 민 14:21; 시 72:19; 사 11:9; 합 2:14 같은 본문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함께 읽으면,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의 성막 건축과 그곳에서 대제사장 아론의 역할은 원래 창조의 갱신이나 회복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막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이 이야기는 원래의 창조를 반영한다.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 하나님이 신비롭게 임하신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은 그 중심에서 자신의 제사장 역할을 감당한다.
셋째, 이스라엘 성경에는 약속의 땅을 더 큰 무언가를 미리 보여 주는 이정표로 보았다는 표지가 있다. 하나님은 기름 부은 왕에게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라고 말씀하신다.시 2:8 온 세상을 포함하는 이 ‘약속의 땅’의 확장은 시편 72편과 89편에서 좀 더 상세하게 반복되고, 이사야 11장 같은 예언서 본문이 회복된 창조세계에 대한 환상으로 그 그림을 채운다. 다른 시편과 예언서들도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온 세상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구원하시고 인간성을 회복하시는 통치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번에도 성경의 관점은 인간 영혼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이 표상하고 상징하는 약속된 새 창조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 이야기와 이스라엘 이야기를 한편으로는 나란히, 다른 한편으로는 순서대로 읽으면 어떻게 될까? 두 경우 모두, 같은 이유로 생명의 약속이 죽음의 실재로 대체된다. 초기 인류는 창조주의 부르심과 명령을 거부했고, 이스라엘은 훨씬 더 증폭된 언약의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을 거부했다. 포로기라는 끔찍한 비극이 찾아오자 위대한 예언자들은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이교도 무리가 이스라엘을 이기고, 거룩한 곳을 짓밟고, 선택된 백성을 바벨론(인간의 교만이 극에 달했던 창세기 11장의 그 ‘바벨’)으로 끌고 갔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신명기와 정확히 맥을 같이하는 예언자들의 핵심 통찰은 유배를 일종의 살아 있는 죽음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야기의 끝일 수는 없었다. 아니면, 혼란이 또다시 찾아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위대한 예언자들은 기도와 시로 이런 통찰을 표현하려고 애썼다—창조주가 언약 백성을 인류를 구원하는 수단으로 선택하셨고 이제는 그 선택된 백성이 구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니, 하나님은 이번에도 똑같이 하실지 모른다. 어쩌면 그분은 추방된 이스라엘 내에서 남은 자, 곧 그 한 사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이를 부르시기 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실지도 모른다. 그 구원이 어떻게 성취될지는 미지수로 남았다. 구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예언자의 믿음에서 비롯된 확신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정말로 세상의 창조주시라면, 그분에게는 이 일을 반드시 성취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었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에, 창조세계를 위한 그분의 목적에 신실하실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인 예수님을 통해, 그분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믿었다.

● 성경의 틀로 본 ‘죄’와 ‘유배’

인류와 이스라엘은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는데, 똑같이 그 목적에서 벗어나 그 목적을 왜곡하고 자신들의 소명을 망가뜨렸다.
‘죄’를 가리키는 통상적 그리스어는 ‘하마르티아hamartia’인데 ‘표적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성경이 말하는 이야기에서 인류는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고 이스라엘은 그 목적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는데,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가 되도록, 곧 창조세계의 찬양을 반영하여 창조주께 돌려드리고 창조주의 지혜롭고 사랑 넘치는 청지기직을 세상에 반영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이스라엘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구원하시는 지혜를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부름받았다.
성경에서 ‘죄’—히브리어에는 이를 뜻하는 단어가 다양하다—는 이전의 질병과 불순종이 정점에 달한 것, 곧 예배의 실패를 뜻한다. 인류는 인간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만들어졌기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능력을 유지하고 새로이 해야 한다.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처럼, 나는 창세기 1장 26-28절에 나오는 ‘형상’이라는 개념이 인간이 마주 보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하도록 의도되었다는 뜻이라고 이해한다. 우리가 창조된 것은 모든 창조세계의 예배를 반영하여 창조주께 돌려드리고,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창조주의 현명한 주권을 세상에 반영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자신의 창조주를 예배하는 인류는 제대로 된 세상의 번영을 위해 계획된 핵심이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예배’는 기쁨과 감사와 사랑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에 대한 찬양을 지혜롭고 확실한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배하는 이들은 이 예배로 인해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는 관대하고 겸손한 청지기가 된다. 이것이 본래 세상이 창조된 의도였다.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의 현 상황에서 원래 의도된 목표로 우리를 돌려보내는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이 소명에 실패했다. 그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에 인류가 마땅히 행사해야 할 권력과 권위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한 분 참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예배하고 그 결과 인간의 행위를 왜곡하는 것이야말로 ‘죄’의 본질이다. 신약성경에서 ‘죄’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단순히 ‘잘못된 일을 저지르다’는 뜻이 아니라 ‘표적을 벗어나다’는 뜻이다. 여기서 표적은 예배하고 청지기로 살아가는 현명하고 온전한 인간이다. 우상숭배와 죄는 궁극적으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사랑과 지혜가 풍성하신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나 마찬가지다. 죄를 짓는 인간은 신이 아닌 세력에게 그것들에 어울리지 않는 권세와 권위를 넘겨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이 그분의 창조세계를 구원하고 회복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인간을 대리인으로 사용하려 하신다면, ‘죄’는 반드시 다뤄야 할 문제다. 그것이 인간이 세상에서 해야 할 역할을 찬탈해 간 세력이 힘을 잃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면 이 세력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평범한 일부분에서 왜곡되고 위험한 괴물로 변하게 만들고 자신에게 계속해서 생명을 공급해 주는 산소를 잃고서 죽고 말 것이다.
우리가 이 ‘권세들’(돈, 섹스, 권력)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관여하지 않는 육신을 떠난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것들이 적절하게 기여하는 온전히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다. 이 권세들이 신의 위치에서 내려오면 더 이상 악령이 아니다.
우리가 ‘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어느 정도는 우리가 한 분 참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고 그 대신 창조 질서 내의 사물이나 세력을 예배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포기하고, 문제의 그 ‘권세들’에 마땅히 우리 것이어야 할 진정한 인간의 권위를 내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세계 곧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려면 마땅히 다루어야 할, 다소 복잡하지만 일관성 있는 시나리오다.
인류는 ‘대리인’이 되도록 지음받았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세상에서 그분을 대신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배가 행동을 앞설 때만이 가능하며, 그 심각하고 위험한 왜곡을 피할 수 있다. 창조주를 예배하는 사람들만이 그분의 청지기직을 맡을 만큼 겸손한 자들이다. 이것이 ‘소명 언약’이다. (‘언약’이라는 단어는 그 시점에서는 분명하게 사용되지는 않지만, 인류가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하나님의 목적 의식을 깔끔하게 요약해 준다.) 인류가 이를 거역하고 세상으로부터 명령을 받을 때 잃어버린 것이 이것이다. 이스라엘 전통 내에서 발전된 견해로는, 그것이 곧 ‘죄’가 근본적으로는 한 분 참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예배하고 섬기는 우상숭배인 이유다. 인간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삶을 살도록 지음받았기에 하나님이 아닌 것을 예배하는 것은 곧 죽음과 사랑에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이야기에서 ‘죄’란 인간이 창조세계 전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자신들이 맡아야 할 역할을 거부한 것을 뜻한다. 이것은 소위 윤리적 실패 못지않은 소명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섬기기로 한 이 선택은 생명 대신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성경적 사고에서 ‘죄’와 ‘죽음’이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하게 엮여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죄는 임의적 규칙을 위반한 것이 아니고, 죽음도 임의적 형벌을 부여한 것이 아니다. 죄를 선택하면 곧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선택하면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 사탄의 음성에 순종하면 생명나무에 대한 권리를 몰수당할 것이다.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스겔은 포로기가 본질적으로 우상숭배요, 거기에서부터 비롯된 죄의 결과라고 반복해서 역설한다. 유배는 일종의 국가 공동의 죽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 땅을 떠난 것은 에덴을 떠난 것이고, 무너진 성전을 떠난 것은 생명나무에서 차단당한 것을 뜻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들과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포로기가 원상태로 회복된다면—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든 간에—‘죄 사함’과 (죽음과 반대인) 새 생명이 모두 이루어지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도 회복될 것이다. 사실상의 부활이다. 에스겔 37장은 바벨론에서 구출된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우면서도 다소 끔찍한 모습을 부활로 묘사하면서 정확히 그렇게 주장한다.
서구 문화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플라톤화된 개념—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창조세계의 찬양을 그분께 돌려드리고 세상에 그분의 형상을 나타내어 결국에는 하늘과 땅이 하나 되게 하는 것이라는 성경 개념과는 반대되는—과 너무 밀착되어 있어서, 내 주장을 듣고 이해한 많은 이들도 여전히 이 내용을 예수님과 제자들이 살아 낸 이야기의 일부라기보다는 ‘예화’로 보려 할지도 모르겠다.
이스라엘 성경부터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유배, 죄와 죽음을 단순한 전형이 아니라 인간 곤경의 근본적인 악화로 본다.
그럼에도 프로젝트는 계속된다. 초기 기독교 용어로 예수님이 “성경대로” 죽으셨다고 말할 때 그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이 누가복음 24장에서 친히 말씀하셨듯이 하나밖에 없는 그 위대한 서사가 이제 오랫동안 기다려 온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이스라엘의 죄 문제를 해결해야만 온 세상 죄를 해결하는 문제를 포함하여 창조세계 전체의 회복 프로젝트가 진전될 수 있다. 더 폭넓은 성경 서사는 인류 전체의 운명이 아브라함 일가에서 시작된 구출 작전에 달려 있다고 내비쳤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위험에 처한 듯했다. 그래서 개인적 의미와 국가적・우주적 의미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죄 사함’이었다. 이것은 포로 생활에서 귀환하는 형태를 취할 텐데, 이 귀환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 40-55장의 요점이다. 그러나 이 본문을 살펴보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주제를 찾아볼 수 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 행위와 인격적 임재를 통해 포로기가 끝나고 죄를 용서받고 온 세상이 새 생명을 받을 것이다. 이 믿음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이해에서 핵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