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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혁명이 시작된 날-톰 라이트

06. 하나님의 임재와 죄 사함 / II. "성경대로": 이스라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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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라는 개념은 이야기로 나타난다.

● 임재와 영광

‘언약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인 율법의 돌판을 담아 둔 특별한 상자였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연합 곧 이스라엘을 향한 그분의 목적을 말해 주고 상징하는 물건들을 이 언약궤에 보관해야 했다.

언약궤는 무엇보다도 만남의 장소였다. 출애굽기 25장 17-22절은 이 궤 위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을 만나실 것이라고 말한다. 양 끝에 새긴 천사가 있는 덮개인 이 속죄소(‘카포레스kappōreth’, 그리스어 ‘힐라스테리온hilastērion’)는 십자가에 대한 초기 기독교 해석의 한 갈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자기 백성을 만나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희생제사 제도 전반에 대한 배경을 제공했다. 예배를 위한 기쁨의 제사, 정화를 위한 필수 제사(부정한 것은 아무것도 하나님의 임재에 접근할 수 없었으므로), 죄를 위한 필수 제사 모두가 이 의도를 드러낸다. 신약성경에서 언약궤와 이런 희생제사들을 언급할 때는, 그 자체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세상이라는 더 큰 이야기의 일부인 하나님과 성막(혹은 성전)이라는 더 큰 이야기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첫째,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는 책임을 맡을 것이다. 둘째, 다윗의 궁극적 아들은 (특별하면서도 불특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후대의 해석, 특히 예수님의 부활로 발생한 초기 기독교의 해석(“내가… 네 씨를… 세워”가 이전에는 전혀 상상해 본 적 없는 의미를 갑작스레 지니게 된다)의 희미한 가능성에서는 솔로몬이 지을 건물은 다윗의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대답을 가리키는 표지에 불과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영원히 머무신다면, 벽돌과 회반죽으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다윗의 궁극적 자손인 한 인간 안에서, 한 인간으로 계실 것이다. 성전에 대해,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의도에 대해 생각하고 경축한 모든 내용은 다윗이 계획한 ‘집’이 인간으로 드러났을 때 전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시대와 그 이후의 독실한 유대인들이 언젠가는 구원이 임하리라는 기대를 품고 계속해서 이 오랜 시들을 노래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들은 언젠가는 진정한 왕이 오시리라고, 언젠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온 세상에 책임을 물으시고 자기 백성과 영원히 사시기 위해 돌아오시리라고 기대했다. 어떻게 이 일을 하실지, 언제, 어디서, 누구를 통해 이 일을 하실지는 불분명했다. 성경이 약속하는 것은 그분이 이 일을 하신다는 사실뿐이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수천 마리 동물로 희생제사를 드려 화려하게 봉헌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임하셨다. 열왕기상 8장이 그 장엄한 광경을 묘사하는데, 제사장들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었다.11절 이 장면은 광야에서 성막을 지어 봉헌한 때를 떠올리게 한다.출 40장 세상의 창조주가 이 왕가에 한 약속을 성취하시려고 이 건물에 거하기로 하셨다. 여기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자리였고,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리라는 궁극적 의도(시 72:19)에 대한 표지로 ‘작은 세상’이 탄생했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 곧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과 같은 영광을 보았는데, 은혜와 진리로 가득했다.”1:14 여기서 ‘사셨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에스케노센eskēnosen’ 곧 ‘장막을 쳤다’는 뜻이다. 요한은 예수님 안에 새로운 장막, 새로운 성전이 지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이 마침내 돌아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체가 되셨다. 이 영광을 담은 수단이 ‘아버지의 외아들’이다. 이 복음서 기자는 사무엘하 7장과 관련 시편들을 가져다가 고대의 약속과 오랫동안 기다려 온 소망이 이 메시아, 이 예수, 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문구가 성막처럼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기로 계획된 건물이었음을 어렴풋이 볼 수 있다. 독자들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의 말씀이 이사야의 약속대로 인간으로 오셔서 열방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보라는 초청을 받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으라는 인간의 목적을 이해하기만 하면, 일부가 가정했듯이 이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요한복음이 진행되면서 우리는 그 영광이 온전히 드러날 때가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임을 깨닫는다. 이것이 바로 요한의 극적이고 혁명적인 십자가 신학의 일부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언자들의 예언과 시편의 노래, 족장들에게 주신 옛 약속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대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현세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현세 속에서 구원받고 새로워지기를 기대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쇠퇴를 거듭하며 바닥까지 내려가겠지만,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오셔서 새 일을 행하실 때가 올 것이다. 이 새 일을 통해 이스라엘만 포로기의 ‘죽음’ 곧 우상숭배와 죄의 피할 수 없는 결과에서 구출받는 것이 아니라, 열방이 창조주 하나님이 계획하신 새로운 창조세계로 나아올 것이다. 포로 생활에서 구출되어 성전을 재건하고 여호와가 다시 돌아오시는 이 소망 전체를 표현하는 핵심적이고 중요한 방법이 곧 ‘죄 사함’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배는 죄의 결과였다. 신명기,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시편을 비롯한 많은 성경 저자가 주장했듯이, 포로기가 끝나려면 죄를 용서받아야 할 것이다.
‘죄 사함’은 한 사람의 인생과 세상을 뒤바꿔 놓는 거대한 현실이었다. 사람들은 오래전에 약속된 이 죄 사함을 오래도록 기다렸다. 죄 사함은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회복이 성취된 것인데, 그들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온 인류에 새날이 오리라고 생각했다.
이 그림에서 세 가지 추가 요소가 관심을 끈다. 첫째,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돌아오실 때 왕으로 오신다고 선언했다. 두 번째 주제는 최후의 구속이 단순히 그 백성을 위한 극심한 고난이라는 맥락에서가 아니라, 그 고난이라는 수단으로 성취되리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셋째로, 이 모두를 관통하는 압도적인 주제는, ‘죄 사함’과 ‘포로기의 종말’과 이 둘과 연관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의 극적 표현이 되리라는 것이다.
이 세 요소 각각은 유대인의 소망을 담은 기독교 이전의 다양한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각각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세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그 놀라운 사건과, 이 사건이 오늘날과 이후로도 미칠 지속적 영향에서 핵심을 형성한다.

● 하나님 나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