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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스터디 가이드/온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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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신앙과 이성이 대립하는 두 세계관 사이의 싸움"

사실/가치의 분리

"보편적이고 불편한 도덕을 믿는 자들과 주관적이고 유연한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 보는 자들이 서로 대립"

문제의 핵심이 도덕의 내용(말하자면, 어떤 행위가 옳은가 그른가)이 아니라 도덕적 주장의 진리 여부에 있음을 주목하라. 도덕은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표준인가? 아니면 단지 주관적인 선호의 문제인가? 이 문제가 문화충돌의 핵심에 놓여 있다.

객관적 도덕관을 가진 자들과 도덕을 주관적 "가치"로 환원시키는 자들 사이에 도덕적 간격이 있다.

객관적 진리/주관적 "신조"

오늘날의 세속주의는, 종교가 주장하는 진리를 시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종교 자체에 아무런 지위도 부여하지 않는다.

과학은 모든 이에게 구속력을 지니는 공적 진리로 간주되는 반면에, 종교는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만 상관 있는 사적인 정서의 문제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사실/가치의 이분법

종교는 더 이상 참과 거짓의 범주로 고려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대답 가능한 범주에 포함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리의 가능성이 있는 후보에도 끼지 못하는 실정이다.

복음을 "문화적 포로 상태"에 빠뜨렸다.

근본주의

복음주의

문화의 변혁/ 정치적 해결

 

기독교가 사적인 "가치"가 아니라 우주적 진리 주장임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1장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_ 창조, 타락, 구속

도덕적 상대주의

성/속 이분법

기독교 대학들 "덧붙이기"

계몽주의는 이성을 진리에 이르는 중립적인 출처로, 곧 모든 철학적. 종교적 신념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했다.

이성의 이름으로 내놓은 주장이 실은 종교적. 철학적 동기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중립적인 지식이란 없다.

"신앙" 대 "이성"

낙태와 생명윤리에 대한 개방적(자유주의적) 견해는 비용-수익 분석에 기초한 공리주의자와 실용주의자 입장이다. 세계관은 대체로 분명한 딱지를 달고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학대 종교, 사실 대 신앙의 문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아래 숨겨진 세계관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유물론, 자연주의, 경험론, 범신론은 각각 무엇이 궁극적 실재라고 주장하는가?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은, 기독교가 신앙에 기초한 비합리적이고 편향된 것이라고 욕하는 반면에, 세속적 신념은 이성에 기초한 공평하고 객관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사고체계는 모두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즉 모든 사고체계는 먼저 어떤 것을 궁극적 실재로 제시하고, 그것에 기초해 세계를 설명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그 안에 함축된 의미를 끌어내고 경험적 근거를 끌어 모으는 등 여러 작업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숨겨진 가정을 밝혀 냄으로써 서로 경쟁적인 세계관들 사이에 공평한 싸움이 진행되도록 할 수 있다.

중립적 이성

기독교를, 작은 진리들의 집합 VS 실재 전체에 대한 진리(Truth)

세속적 영역이야말로 편향되지 않고 중립적이라는 생각은 유럽의 종교전쟁 중에 발생했다.

창조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우주 질서의 근원이다. 즉 도덕적 질서뿐 아니라 물리적. 사회적. 정치적. 심미적 질서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이 교리는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가 된다.

성경적 "소명"의 교리

불신자가 세속적 전제로 인해 보지 못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성경적 관점으로 인해 볼 수 있다.

 

 

2장 다시 찾은 기쁨

이층구조의 정신세계에 사는 신자들은 성경적 관점을 자기들의 직업에 적용해야 할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는 곧 그 자리에 다른 세계관이 스며들었음을 의미한다.

세계관은 단지 학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깊은 영향을 주는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현대 문화에 깊이 관여하려면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내놓아야 하는데, 이는 곧 성경의 진리를 여러 분야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뜻한다. 즉 사업과 경제학에 대한 기독교 철학, 기독교적 과학철학, 기독교적 정치철학을 정립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관은, 우리를 성경에서 우리 시대의 이슈들로 이어주는 다리 같은 역할을 한다.

성/속의 분리는 헬라의 이원론이 남긴 유물로서,

중세의 자연/은총 이원론이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단테의 작품 『군주론』 이다.

"사람에게는 이중적인 목표가 있는데, 이생에서의 행복과 영생에서의 행복이 그것이다." 지상의 목표는 "우리가 가진 이성의 능력을 사용하여"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천상의 목표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영적 가르침 곧 계시된 진리"를 필요로 한다.

결국에는 이것이 하층부에 속한 자연 질서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작동한다는 생각을 낳았고, 그 후 자연주의로 흘러 들어가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잇는 것이다.

자연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작동한다면, 자연은 순전히 이성과 과학으로 이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신학은 적절성이 없는 학문,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많은 교회들이 종교를 치료적 기능에 국한시켜 버렸다.

종교의 사유화 현상.

사상의 역사, 각 철학이 하나의 구체적인 생각-이층적 구분-의 발전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묻는 책이 『완전한 진리』다.

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기독교적 이원론

"구조" 대 "방향"

 

 

3장 종교가 있어야 할 자리

사람이란 자동인형에 불과한 존재, 곧 물리학과 화학법칙에 따라 상호작용을 하는 "유생분자(biomolecules)로 가득 찬 큰 가죽가방"일 뿐. " 자녀를 볼 때, 억지로 노력하면…….그들을 기계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나의 무조건적 사랑을, 합리적 분석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한 사랑을 준다."

"나도 일관성이 없는 신념을 양손에 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세속적 이원론이며, 데카르트와 칸트 및 여러 현대 사상가들을 통해 그 출현 되었다.

세속적 세계관은 과학적 자연주의-자연이 존재하는 전부다-라 부를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은 컴퓨터, 곧 복잡한 자료 처리용 기계에 불과하다. 실험실용 이데올로기. 하지만 실제 생활을 할 때는 전혀 상반된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들의 지적인 체계 속에서는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그런 패러다임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의지의 자유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그것은 과학적 자연주의에 의거할 때에만 거짓일 뿐이다.

세속적 '신앙의 도약', "포스트모던 시대의 비극"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했다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모더니즘(근대주의) 시대를 뒤로 하고 포스트모더니즘 속으로 진입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적실성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상 전후관계에 있는 것으로 오인한 데서 온 것이다. 사실, 이 둘은 옛적 헬라시대 이래 서구사상을 특징지어 온 두 갈래의 분열현상 속에서 상호 공존해 왔다. 모더니즘은 여전히 하층부-자연과학.정치.재정.산업세계-에 대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아무도 포스트모더니즘 원리로 비행기를 고안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변형일 뿐이다.

오늘날 하층부에는 모더니즘이 갈수록 더 물질주의와 환원주의적인 양상을 띤다. 오늘날에는 제거적 유물론이라고 불리는 학파까지 생겼는데, 그들은 의식의 실재를 부인하고 인간을 "좀비'와 같은 존재로 환원시킨다. 동시에 상층부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더욱 주관주의와 상대주의적인 양상을 띠며 비합리적(non-rational)인 것이 마치 해방인 양 경축하는 분위기다.

기독교를 문화적 포로 상태에서 해방한다는 것은 이런 이분법 자체를 완전히 버리고, 그것을 여러 유형의 진리를 인정하는 다면적인 지식 개념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다차원 진리 개념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양한 세계를 아는 데 "여러 방식"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속주의자는 흔히 "이성"을 유물론이나 자연주의와 동일시한 나머지, 기독교를 당연히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그것은 애초에 그들이 이성을 정의 내릴 때 일련의 세계관적 전제를 그 속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신학적 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영성

성경적인 신앙 개념과 근대적 신앙의 도약

 

 

4장 영적 황무지에서 살아남으려면

안락사 문제의 핵심은, 단지 인류의 일원이라고 해서 고유한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사람됨"에 관한 이론이다. 즉 어느 정도의 자율성과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능력 등 일련의 추가적인 판단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온전한 인지 능력이 없는 자는 누구나 "사람이 아닌 존재"(non person)로 간주된다. 태아, 신생아, 정신에 손상을 입은 자들이 거기에 포함된다. 많은 윤리학자들이 "사람이 아닌 존재"는 연구와 실험, 신체기관의 채취, 혹은 여타 공리적인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층적 분리를 인간에게 적용한 인물은 르네 데카르트였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몸은 영화롭게 된 기계인 반면에 정신은 어떤 면에서 몸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자율적인 능력이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낙태, 안락사, 유전공학, 생명에 관한 다른 사안들과 관련해 그 저변에 깔린 세계관이 되었음에 주목했다.

오늘날 낙태 옹호론자들은 태아도 생리학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점에 기꺼이 동의하지만, 그 사실이 태아의 도덕적 지위와는 상관이 없고 법적 보호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결정적인 요인은 자율성이나 선택의 능력이란 견지에서 규정되는 "사람됨"의 정의에 있는 것이다.

 

생명문제에 대한 이층적 접근

 

사람됨

법적인 보호가 보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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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학적으로는 사람

도덕적 지위와는 상관 없음

 

성에 대한 자유주의적 접근에도 이와 비슷한 이원론이 깔려 있다. 거기서 몸은 자율적인 자아가 쾌락을 주고받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로 취급된다.

사실, 요즈음의 최신 사조는 성(gender)이란 사회적 구성물이므로 해체될 수 있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생각을 따른다. "사람들은 어느 상자에든-게이. 이성애. 레즈비언. 양성애-끼워 맞추는 것을 원치 않으며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바꾸고 싶어한다."

"이런 변화는 '이것이 바로 나다, 끝'이라는 식의 근대적 사고방식에 도전해서 '이것이 지금 현재의 나다'라고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향해 가는 하나의 움직임인 것 같다." 모든 형태의 성적 정체성이 선택의 문제로 취급되고 있다.

"이는 문화적으로 '부여된' 어떤 정체성을 수용하기보다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몸은 자율적인 자아가 고통과 쾌락을 실용적으로 계산하여 제멋대로 사용해도 괜찮은 하나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자율적인 자아

원하는 대로 몸을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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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나 쾌락에 사용되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메커니즘

 

선택을 우상화하는 것이 결혼의 위기를 초래한 핵심 요인이기도 하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인간의 본래 상태는 "자연 상태"로서 결혼도 가정도 시민사회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원시 상태에서 우리는 서로 분리된 존재이며 원자론적이고 자율적인 개개인일 뿐이다.

만일 이것이 우리의 자연 상태라면-우리가 본래 자율적인 개개인이라면- 결혼과 같은 관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들의 답은, 그런 관계는 선택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 한다. 만일 우리의 선택으로 결혼이 창조된 것이라면, 당연히 선택에 의해 재창조도 할 수 있는 법이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다시 정의를 내려도 무방하다.

 

삼위일체-기독교 사회이론의 초석

헬라철학이 인간의 딜레마를 도덕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인간의 본성 문제(타락)를 도덕적 견지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견지에서 규정하고 있다.

 

 


5장 다윈과 베렌스타인 곰의 만남

다윈주의는 거의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변화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어 새로운 구조(팔다리와 기관들)를 만들고 결국에는 새로운 종이 출현한다는 식이다.

그 과정이 너무나 긴 세월에 걸쳐 일어나서 관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이론은 외삽법(外揷法, extrapolation), 곧 오늘날 관찰할 수 있는 변화에 기초하여 거꾸로 과거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하는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변화 패턴과 상반된다. 작은 규모의 변화들이 그 이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축적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다윈주의를 우려하는 이유는, 그 사상이 기독교를 상층부에 위치시켜 판타지나 요정 이야기와 나란히 놓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령이나 요정이나 부활절 토끼, 혹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다윈주의는 종교를 막연한 희망의 성취 정도로 취급하지만, 창조는 통일된 진리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기반을 제공해 준다.

두 층의 은유는 어떤 관념의 진리성 여부를 가늠하는 일종의 그림 언어다. 기독교를 상층부에 갖다 놓는다는 것은, 그것이 진리 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필요, 신화와 상징, 믿고자 하는 의지, 혹은 문화적 전통과 같은 것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신학은 더 이상 참이나 거짓의 문제로 여겨지지 않고 그저 문화적 관습 내지는 개인별 선호로 간주되고 있다.

우리가 기독교를 진리라고 주장하려면, 그에 앞서 기독교가 참이나 거짓으로 판별될 수 있는 범주에 속한다는 입장을 확실히 세워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실/가치의 분리에 굴복하고 말았다.

일반 학문 세계에서는, 신학이 과학적 발견에 적응하기를 기대하지 거꾸로 과학이 신학에 적응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만일 당신이, 과학은 신학적 진리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한다면 당신은 학문의 정통 규범을 침해한 자로 비난받을 것이다. 신학이 자연주의적 과학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영적인 색채를 살짝 가미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야기 자체를 바꾸는 것은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대로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고전적 다윈주의와 단속평형설

철학적 자연주의

지적 설계

당신은 기독교에 관해 이야기할 때 주로 감정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신앙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어떤가?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신념들이나 위로와 위안에 대해서는 어떤가? 그것은 마치 세속주의자에게 백기를 흔들면서 우리를 진지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표현하는 것과 다름없다.

 

 

6장 상식에 기초한 과학

지적 설계를 지지하는 과학적 논증

"DNA를 검사한 결과, (생명)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복잡한 배열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로써 지성이 관여했음이 입증되었다", "증거가 어디로 이끌든지 그 길을 좇으라."

흔히 지적 설계론을 과학의 옷을 입은 종교라 치부한다.

지적 설계를 지지하는 증거의 무게는 그 자체로 달아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지적 설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논쟁을 가르치라"다.

학생들을 제대로 교육한다는 것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접할 수 있는 모든 세계관- 세속적 세계관뿐 아니라 종교적 세계관-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오직 세속적 관점에서만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지 못하게 함으로써 비판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막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옛날 식으로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생각은 모조리 금지하는 실수를 범하기가 너무 쉽다. 그러나 문제를 은폐하는 것이 비판적 사고를 배우는 길은 아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형상으로 지어진 비판자들을 존중하는 자세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의 생각을 진지한 자세로 대하는 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 "정직한 질문에 대해 정직한 답변을 해야" 한다.

국공립학교 시대인 이때에 교육에 있어 다원주의와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을 개진해야 할 사람도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비판가들은, 과학은 당연히 자연적인 원인들만 고려하도록 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지적 설계가 그런 규칙을 깨뜨린다고 비판한다.

 

 

7장 다윈주의의 보편화 현상_ 오늘은 생물학, 내일은 세계

종교 자체도 "진화의 산물이다." 종교는 "집단들로 하여금 적응을 잘 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믿고자 하는 성향이 진화의 역사에서 선택되었다고 한다. 현재 급성장하고 있는 진화심리학은 자연주의적 진화를 포괄적인 세계관으로 확대시켜 인간의 모든 경험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이론을 옹호하는 자들은 한결같이 세속적인 신앙의 도약을 감행하는 것으로 끝난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지적인 필요도 포함해서-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제외한 어떤 세계관도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그대로 이 세계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성경의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세계관은 모두 모종의 환원주의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보다 못한 그 무엇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신이 궁극적인 실재로 제시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다른 모든 것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범주들을 제공한다. 유물론은 모든 것을 움직이는 분자로 환원시킨다. 과학적 자연주의는 모든 것을 자연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환원시킨다. 범신론은 모든 개체의 존재를 저변에 깔린 영적인 통일성으로 환원시킨다. 각 세계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너무나 다양하고 다차원적인 세계를, 창조세계의 일부를 절대시하는 제한된 패러다임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성경적인 세계관 외의 모든 세계관은 실재 전체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작다".

비성경적인 세계관은 너무 좁아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실재 전체를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세계관을 믿은 자들이 그런 신념체계에만 입각해서는 살 수 없다. 자신의 세계관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긍정하기 위해 신앙의 도약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

일관성 없는 그 지점이 바로 당신의 출발점이다.. 온유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성찰하도록 이끌어주라. 그래서 자신이 고백하는 세계관에 기초해서 일관성 있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도록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관에 대해 듣게 할 수 있다. 이 세계관은 창조세계의 일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 설명이 가능하다. 불신자 그들의 세계관이 그들 스스로 경험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 줄 수 있다. 기독교만이 실재에 대한 온전하고 일관된 설명을 제공한다는 점을 입증해줘야 한다.

 

 

8장 철학적 다윈주의

사회 구성주의. 지식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다는 생각이다. 실용주의 철학자들이 진화를 사고의 영역에 적용했을 때, 초월적이고 불변하는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모든 생각은 사회적 구성물이요 진화론적 발전에 종속되는 것이다.

지식에 관한 이론을 인식론이라 부른다. 진화론적 인식론이 교과과정 전반에 걸쳐 상대주의를 낳는다.

도덕 이론의 경우, 존 듀이는 진화론적 접근을 하려면 개인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도덕 교육은 학생들에게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확실히 인식한 다음, 그 가치관에 적합한 결과를 가져올 행위를 결정하도록 여러 대안을 비교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이런 자연주의적 접근법이 오늘날 미국 공립학교 도덕 교육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옳고 그른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실효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만 있을 뿐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과 절대적으로 그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은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화론적 인식론 도덕 교육이다.

그리스도인 학생의 경우도 비판적인 세계관 틀을 배우지 않으면 이처럼 상대주의적이고 실용적인 도덕관에 빠져들기 쉽다. "젊은이가 입으로 고백하는 것과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 사이에는 굉장한 간격이 있다.

도덕은 언제나 파생적인 성격을 띤다. 즉 세계관에서 흘러 나온다.

과정신학

합법적 실용주의

구성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윈의 진리를 제외한 모든 객관적 진리를 부인한다.

우리가 일터나 학교 혹은 정치 영역에서 마주치는 관념에는 자연주의적 가정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9장 복음주의는 무엇이 좋은가_ 제1차 대각성운동

10장 미국과 기독교가 만나 누가 이겼을까_ 제2차 대각성운동

교회와 관련해 문제라고 느껴 온 것들은 감정주의. 반지성주의. 유명 인사 위주의 리더십 등이 그것이다.

복음주의

초기 복음주의 역사에서, 건강한 교회는 영감제도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교회.

대다수의 개혁운동은 보다 깊은 영적인 실재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주도했는데, 그들은 제도권 교회가 텅 빈 의식주의와 죽은 정통을 붙들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어떤 개혁이든 장기적인 영향을 주려면 제도의 옷을 입지 않을 수 없다. 체계적인 가르침(신학)을 개발하고, 공동의 신앙 진술(신조와 신앙고백)을 선포하며, 예배의 형식(의식과 찬송)으로 표현하고, 다음 세대를 가르치고 그들에게 전수하는 일(교회, 학교, 신학교)이 필요한 것이다. 교회 제도적 측면은 마치 속에 생명의 물을 나르고 보호하는 파이프 라인과 같다.

복음주의가 기존 교회 내부의 개혁운동으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제도가 주는 유익을 당연시하는 한편 영감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그러나 복음주의 그룹이 따로 떨어져 나가 독립적이 되자 영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바로 그런 시기에 반지성적. 반역사적. 개인주의적. 유면인사 중심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 출현 하는 교회"는 제도권 교회의 실패에 대항해 영감에 초점을 맞추는 운동들과 맥을 같이 하는데, 이에 대한 바람직한 반응으로는 프란시스 쉐퍼가 당대의 반문화 운동에 대해 보였던 균형 잡힌 자세를 추천하고 싶다. 그는 젊은이 문화의 위험(예, 마약)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은 물질주의적이고 시장 중심적인 부르주아 사회에 항거하는 현상이라고 칭찬했다. "1960년대 히피들은…….바람직하게도 플라스틱 문화를 대상으로 싸웠는데, 사실 교회도 그렇게 싸워야 했다". 쉐퍼는 일부 과도한 반문화 운동에서도 그 저변에 흐르는 희망과 의미를 향한 굶주림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새로운 공동체(새로 출현하는 교회)에도 마찬가지로 과도한 면이 있다. 많은 경우에, 부실한 성경관,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 수용, 종교적 소비주의처럼 보이는 절충주의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저변에 흐르는 초월성과 진정한 공동체를 향한 목마름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주류 복음주의의 상당 부분이 번지르하게 포장되어 값싼 상업주의에 빠진 현상에 반기를 드는 것은 옳다. 알맹이 없는 진부한 문구로 가득한 찬양, 대량판매 기법에 의존한 비인격적인 교회성장 프로그램, 기업체에서 빌어온 홍보 및 경영 기법 등이 그것이다.

"왜 그토록 많은 목회자들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도록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에 적합한 원리를 사용하는 것일까?" "현대의 경영이론은 개개인의 안녕이나 영적 성장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보통은 그와 반대로 그들의 목적-조직(이 경우에는 교회)을 더 키우는 것-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

거창한 사업과 거대 정부에 이제는 거창한 사역이 합류한 것이다. 이제 교회와 기독교 단체는 한결같이 거대한 예산과 대단한 프로그램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영적인 권위라는 것이 약삭빠른 사업가나 강력한 정략가가 아니라 깨진 세상과 교회의 영적 파산 상태를 보고 주님 앞에 눈물을 흘리는 자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종교집단이 주변문화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을 때 가장 빨리 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늘날은 존재론적 개인주의가 아주 멀리까지 진전해서 가장 친밀한 관계마저 깨지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 되어 버렸다. 그로 인해 교회 내에서도 진정한 공동체를 바라는 갈망이 생기게 되었다.

 

 

11장 이층적 진리를 받아들인 복음주의

서구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세계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풍성하게 얽힌 장으로 해석되어 왔다. 역사학자는 역사적 사건에서 도덕적 교훈을 끌어내도록 기대되었다. 과학자는 자연 속에서 창조주의 정교한 "장치"를 발견하고 그분을 찬양했다. 예술가는 덕과 고상한 성품을 높이려고 애썼다. 경제학자는 이기적인 개인들 간의 경쟁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대한 청지기직과 올바른 자원 활용에 대해 이야기했다. 식민지 미국의 교육 입문서에는 ABC와 함께 "아담이 타락할 때, 우리 모두가 죄를 지었다."는 종교적 가르침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복음주의 학자들이 장차 이 도덕적 우주를 파헤치는 데 기여할 지식 개념을 받아들였다. 하층부를 종교로부터 중립적인 것처럼 취급하는 이층구조를 도입한 것이다. 이 접근법의 근간에는 상식적 실재론이 있는데, 이는 철학적 틀이 없어도 학문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전제한 사조였다. "경험적 관찰에서 귀납한 것이면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동의를 얻을 것이다"라고 보았다.

복음주의자들이 중립적 지식의 이상을 포용하면서, 하층부의 학문연구를 지도할 기독교 세계관을 명시적으로 정립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 대신 이성의 자유로운 탐구로 발견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결국 성경의 가르침을 지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신앙과 학문의 수렴(convergence) 모델이라 부른다. 이성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성경의 가르침으로 수렴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성과 신앙이 서로 수렴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과학이나 역사 혹은 심리학의 견해가 성경과 상반될 경우에는? "과학"과 "자유로운 탐구"의 깃발 아래에는 그 결과를 왜곡시키는 어떤 주의(ism)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학문과 성경의 가르침이 수렴되지 않는 경우에는, 우리의 성경해석이 잘못되었거나 학문연구가 어떤 세계관을 전제로 해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중립적인 학문과는 거리가 멀다. 경제학을 보자. 서구역사를 통틀어 그리스도인 사상가들은 경제학 관련 문헌을 풍성하게 집필했다(전통적으로 그것은 도덕신학의 일부였다). 그런데도 대학의 경제학 교재들을 조사해 본 결과, 종교적. 철학적 견해를 폭넓게 가르치는 내용은 별로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대신 한 가지 견해, 곧 신고전주의 경제이론만 가르치고 있다. 신고전주의 경제론은 유용성을 극대화하는 이기적인 존재로 인간을 규정하며, 원자와 같은 개인들이 희소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장을 경제 영역으로 묘사한다.

가정경제학 교재에 대한 조사에서도, 결혼과 성 같은 도덕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룰 때 의무. 책임. 원칙 같은 전통적인 도덕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발견되었다. 대신 자존감(self-esteem)의 언어를 무비판적으로 채택해 학생들에게 스스로 자기 가치관을 택하라고 거듭 촉구한다.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오직 당신만이 최선의 대안을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으로부터 무슨 혜택이나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자문해 보라. … 그러고나서 최소의 불이익과 함께 최상의 것을 선사해줄 대안을 선택하라.

도덕적 결정은 여러 행위의 결과를 각각 견주어 보고 가장 실효성이 큰 것을 계산하는 이른바 비용-수익 분석의 문제로 취급된다.

중립적 지식이란 이상 때문에 대학에서 전적으로 세속적인 견해를 가르치는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은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19세기가 시작되면서 복음주의자도 사업. 경영. 재정. 마케팅 같은 분야에서 공리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 단체가 성경의 메시지를 전할 때 세속적인 성공 개념에 입각한 의심스런 방법에 의존하는 현상에서 그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기독교 진영을 보면 윤리적인 타협이 흔히 "사역을 위한 것" 이라는 명목으로 합리화되곤 한다. 이층적 사고가 영적인 옷을 입은 공리주의(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한다)로 그리스도인의 눈을 멀게 할 수 있다.

"베이컨의" 해석학

증거주의와 전제주의

사람들은 자기가 품은 전제가 낳는 논리적 결론을 피하기 위해 철학적 "속임수"를 쓸 때가 많다.

 

 

12장 여성은 어떻게 문화전쟁을 시작했는가?

 

 

13장 참된 영성과 기독교 세계관

우리에게는 위대하고 고상한 목적을 위해 살고 싶은, 하나님이 주신 갈망이 있다. 그 까닭은 삶이 더 커다란 이야기-하나님이 친히 들려주시는 이야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적 드라마에 귀가 멀고 눈이 어두워질 때가 종종 있다. 우리는 물질의 영역이 전부라고 쉴새 없이 쏘아대는 세속문화에 잠겨 있다. 그래서 가시적인 영역의 지평 너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지극히 힘들다. 날마다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다 큰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주도하는 것으로 보기보다, 자연적 인간관계 곧 기계적 필연성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보기가 쉬운 것이다.

영웅이 죽음을 지나 부활에 이르도록 하는 사건의 연속이다.

서사시 같은 이야기는, 그리스도가 신적 특권 곧 하늘 영광을 제쳐두고 스스로를 비워(빌 2장)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위에 있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사랑 이외의 모든 것을 벗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는 사탄의 시험과 시련을, 주변 사람들의 조롱과 오해를 모두 견뎠다. 그는 "고난을 당함으로써 순종을 배웠고"(히 5:8)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을 먼저 사셨다. 인류 역사의 절정에 이르러, 그는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해 죽으셨고 우주에 전무후무한 지극한 상실감과 비극을 맛보아야 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러나 죽음은 생명의 창조자를 가둬 둘 수 없었다. 불현듯 눈부신 에너지를 발산하며 예수는 무덤을 열어 젖히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려 버렸다. 희생을 통해 그는 이제 자기 백성을 위해 중보하는 대제사장으로 계신다. 주일학교에서 거듭 듣다가 둔해진 정신을 벗어 버리고 열린 귀로 들을 수만 있다면, 그 이야기는 우리를 사로잡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이야기를 넘어섰다. 그 이야기는 예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도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로 펼쳐지도록 되어 있다. 성화(sanctification)는 우리 속에 새겨진 잘못된 메커니즘, 우리가 품은 세상적인 성공 개념, 잘난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 등 옛 사람에 대해 죽는 과정이다.

이 과정의 절정에는 종종 깊은 상실감, 막심한 후회, 불의가 있어서 오랜 습관에 물든 우리를 사망의 골짜기로 내던진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때 비로소 그분의 부활의 능력에 참여할 약속이 주어진다.

기독교 세계관은 생각과 논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지적인 활동을 포함해서-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 곧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우상에 대해 죽은 것에서 시작된다. 당신의 숨겨진 동기를 깊이 성찰해서, 마음속 우상을 발견하고 하나님만을 자유로이 섬길 수 있게 해달라고 그분에게 도움을 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