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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13_참된 영성과 기독교 세계관/제4부_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완전한 진리- 낸시 피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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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성품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는가로 평가할 수 있다

_ 성 아우구스티누스




범브란트의 자유

진정한 성화는 고난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시작된다. 우리가 너무나 가혹한 시련을 겪어 이 세상에 대해 영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만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그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이런 경험이 기독교 세계관을 개발하는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사상을 공부하고 그것에 관해 논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죽고 다시 부활하기 위함이다. 이 같은 내면의 영적 실재가 없으면, 우리가 세계관과 관련하여 이제까지 말한 모든 것이 하나의 정신적 운동에 불과한 것이다. 기껏해야 지적인 수수께끼를 푸는 방법이거나, 더 나쁘게는 똑똑하고 아는 것 많은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비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움직이는 세상적인 동기를 떨쳐 버리고, 순전히 우리의 지성을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시키려는 진정한 동기를 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또한 그 지식을 타인을 섬기는 데 사용하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비록 기독교가 총체적 진리임을 논증하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만일 그 진리를 행위를 통해 가시적으로 입증하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을 설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외부인들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기독교를 그저 사적인 은둔처로, 편안한 안식처로,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공상적인 신념 정도로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어떤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을 보면, 그것이 구체적인 삶과 행동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지 않고 순전히 추상적인 개념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타당성 구조", 이는 사상이 구체화 되는 실질적인 맥락을 가리킨다. 교회가 바로 복음이 구현되는 "타당성 구조"인 셈이다. 사람들이 눈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서 사랑과 능력과 선과 같은 초자연적 차원을 목격할 경우에, 성경의 진리를 전하는 우리의 메시지가 비로소 타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언어로 제시되는 기독교 세계관의 메시지는, 우리의 삶으로 그 타당성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그 능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쉐퍼의 위기 

개인적 차원에서 온전한 삶을 살지 않으면, 기독교 세계관이 일련의 죽은 관념이나 인지적 체계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첫 걸음으로 살아 날마다 그 진리대로 살아갈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살려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 자신에 대해 죽을 때 가능하다. 가장 심오한 영적 성장은 위기를 통해 온다는 것을 우리도 어느 순간에 깨닫게 된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사는 타락한 피조물이기에, 우리의 성품이 단련되는 과정에는 흔히 고통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내면의 변화에 이르는 열쇠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오는 세상뿐 아니라 현재의 삶에도 적용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칭의(justification)뿐 아니라 성화(sanctification)의 근거도 된다. 성화란 지금 여기서 신자의 성품이 갈수록 거룩하게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의 우상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상 발생한 객관적 사건임에 분명하지만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객관적 진실이 우리의 칭의의 근거가 된다는 확신을 절대로 포기하면 안된다. 그 다음 단계는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우리 삶의 모델로 삼는 것이다. 이는 특정한 윤리적 교훈들에 따라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소위 도덕주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려는 이른바 신비로운 의미에서 그렇게 하라는 뜻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후에야 그분의 부활의 능력에 동참할 약속이 주어지는 법이다. 우리가 참으로 옛 사람을 포기하기 전에는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 일은 물론 우리가 회심할 때 일어난다. 즉 재판장 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하고 우리를 그분의 가족으로 입양하는 단 한번의 사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후에 우리는 날마다 우리 속에 깊이 뿌리박힌 죄악된 방식에 대해 영적으로 죽음으로써, 죄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인격으로 자라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매순간 우리는 죄와 세상적인 동기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개인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상대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 자체도 무척 어려운 교훈이다. 만일 그것이 어렵지 않게 보인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과 타협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우리가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으며 그 결과 무릎을 꿇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본분을 따라 이 세상의 사악한 체계에 맞서고 있지 않을 확률이 높다.

세상적인 체계들에 대해 죽어야 한다는 원칙은 자명한 죄악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과 같이 크기.성공.영향력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문화에서는, 이런 세상적인 가치들에 대해서도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물질적인 풍요를 최고로 받드는 문화에서는, 더 좋은 집, 더 멋진 차, 더 부유한 동네, 더 인상적인 사역 등을 향한 탐심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사람들을 평판과 업적으로 판단하는 문화에서는, 전문가로서의 인정과 승진을 겨냥해 살고 싶은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그러한 것들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들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고 우리의 동기가 될 경우, 하나님과의 관계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우리에게 죄가 된다는 뜻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죄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신앙을 가로막고 우리가 거룩하게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우상들"(에스겔 14:1-11)


1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3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4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로 가는 모든 자에게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하리니 
5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이 마음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라 
6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7    이스라엘 족속과 이스라엘 가운데에 거류하는 외국인 중에 누구든지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가는 모든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 
8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을 놀라움과 표징과 속담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에서 끊으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9    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를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거니와 내가 손을 펴서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그를 멸할 것이라 
10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 
11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시는 미혹되어 나를 떠나지 아니하게 하며 다시는 모든 죄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게 하여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 함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에는 그 자체로 보면 완전히 옳고 바른, 진정한 필요들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런 필요들이 연관될 경우에는 이 원칙을 지키기가 절말 어렵다. 우리의 자연스런 필요가 분노와 비통함을 불러일으킬 때 혹은 타인을 억압하거나 공격하게 만들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도 "아니오"라고 말해야 마땅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분노와 두려움과 통제 욕구를 내어 드릴 때에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정신을 개발하여 효과적으로 다른 사람과 맞대면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심지어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 궁극적 목적은 다른 이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우리를 구비시키기 위함이다.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죄와 상처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순간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런 시련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에 연합시켜 달라고 구해야 한다. 그 결과 우리는, 다른 이들을 회개시키고 새롭게 하는 일에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 신학

"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2-23)

우리가 아직 죄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이상, 각기 어떤 식으로든 배척을 당하고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영광의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 신학을 포용한다. 우리의 신비로운 구원은 예수께서 영웅적인 정복자가 아니라 고난받는 종-조롱 당하고, 매 맞고, 십자가에 달린 종-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참 지식에 도달하려면,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으려는 꿈을 기꺼이 포기하고 십자가에 달린 그분과 동일시되고자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의 죽음을 사용하신 것처럼, 우리의 성화를 위해 이 "십자가들"을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기에 참으로 선하신 분인 것이다.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요셉은 서슴없이 자기 형들의 행위를 악하다고 불렀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도 악한 동기를 품은 자들에게 배척을 당할 것이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불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선하게 바꿀 수도 있는데, 고난이야말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걸어가신 여정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영적 여정이 되어야 한다. 배척받고 (영적으로) 죽임을 당하고 나서 마침내 다시 살아나는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배척받고, 죽임당하고, 살아나는 것

우리가 진정 무엇을 우리 인생의 토대로 삼고 있는지를 보게 하는 방법은, 그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이나 가족, 일이나 평판을 잃을 경우, 우리의 삶은 무너지고 극동의 상실감과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목적의식과 정체감이 얼마나 깊이 그런 것과 연관되어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들을 앗아가시도록 기꺼이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죽고 싶어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비록 고통이나 값비싼 대가가 따르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배신이나 억압으로 우리의 마음이 찢어질 때 그분께 울부짖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거나 원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품게 하거나 혹은 타인을 공격하게 한다면, 꽉 움켜쥔 손을 펴서 내놓는 것이다. 불가항력의 악을 직면해서도 순전히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본-배척받고, 죽임당하고, 살아나는 것-에 스스로를 굴복시킬 때, 그분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시리라고 속삭이는 조용한 기도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것에 대해 내적으로 죽는 것을 뜻한다.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 무엇이든, 바로 그것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죽임을 당하게 해야 한다. 그럴 경우에만 우리는 내적인 강박감에서 풀려나,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는 참 자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고후 5:14).


생명을 낳는 기계

우리 마음의 우상들을 바치는 것은 긴 여정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 다음 단계는 영적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속에 깊이 뿌리박힌 반복되는 죄에 굴복할 때마다, 우리는 사탄이 거기에 발판을 마련하도록 허용하는 셈이며 영적으로 사탄의 노예상태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몸은 "불의의 연장"(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이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사탄에게 좌지우지되어 그의 수종을 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세력과 마귀의 세력 사이에 벌어지는 영적 전투에는 중립지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삶의 어떤 영역이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지 않는다면, 사실 그곳은 사탄의 통제 아래 있는 셈이며 하나님께만 바쳐야 할 충성을 그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그리스도께 구원받은 자라도 일상의 말과 행위로써 생명을 낳든지, 아니면 죽음을 낳을 수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낳을 수 있는 기계"

"우리 자신을 사탄에게 굴복시킨 채 우리 소명에 거슬러 삶으로써 이 가련한 세상에서 죽음을 낳는 기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삶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드러내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사람들이 당신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는가,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지는가? 당신이 타인을 대하는 모습을 볼 때, 그들의 눈에 복음의 신뢰도가 높아지는가, 아니면 낮아지는가? 이것이 우리의 행동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행위와 성품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이른바 "생명을 낳는 기계"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불신자들이 사역과 교회와 기독교 기관 안에서 그런 가시적인 사랑을 보지 못할 경우에는, 결국 우리의 메시지는 신빙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매체가 곧 메시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체에 해당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잃어버린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세우신 전략은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입증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방법 

그리스도인들이 세계관에 입각한 메시지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경우, 그것은 흔히 당대의 "주의들(isms)에 맞서 설득력 있게 논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질문에 응답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영역에서 성경적 원리에 따라 사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뿐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세속적 세계관에 전염될 소지가 있다.

기독교 사역이 메시지는 성경적이지만 방법은 비성경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전하는 내용뿐 아니라 전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진리를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양 측면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으로 수긍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실제로 활동하는 것이다.

날마다 그들이 내리는 선택은, 보이는 세계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세계가 실재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5-17).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면서 인류 역사에 활발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모든 결정을 내리도록 부름받았다.

때로 우리의 행동이 자연주의자의 의자에 앉아 물리적 세계만을 보는 이들에게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얻는 것이 세상적인 관점에서 잃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우리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면서도 옳은 것을 행하고 있음을 뜻한다.

서글픈 현상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자연주의가 옳은 것처럼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일을 인간적인 방법과 인간의 지혜로만 이루어 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주님의 일이 아닌 것이다.

교회가 불신자들과 관련해서 진정한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설명할 수없거나 자연적이고 실용적인 수단으로 복제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즉 초자연적 차원을 개입시키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다.


금과 은과 보석 

만일 그리스도인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전쟁에서 이긴다면, 실은 전쟁에서 진 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 인본주의적 기술적 방법에 의존해 이루어졌다면, 실은 비가시적 세계에서는 거의 가치 없는 성과를 거둔 셈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무기를 사용한다면-우리의 재능을 그분 발 앞에 내려놓고, 우리의 자만심과 야망에 대해 죽고, 성경의 도덕적 원칙에 순종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을 따른다면-설령 외적인 표준으로는 우리가 패배한듯이 보일지라도 사실은 승리한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삶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드렸고 현재 그분의 인도를 받고 있다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말씀을 어렵게 체험적으로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고 한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좋은 것이라도 우리의 속 깊은 굶주림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다. 

우리의 자연적 열정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벼랑 끝으로 데려가기 위해 더 큰 위기를 허락하실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소망의 근거로 여겼던 모든 것에 대해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이 참된 진리임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과 능력을 우리의 일에 쏟아 부으시는 것이 가능하다.

인생이 끝나고 고린도전서 3장에 묘사된 것같이 신자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이룩한 가장 성공적이고 화려한 업적 일부가 나무와 풀과 짚에 불과한 것으로 증명되어 불에 타 버릴 수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여 그분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힘입어 행한 활동은 가시적인 결과를 낳았든 낳지 않았든 간에 금과 은과 보석으로 반짝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우리의 하늘 면류관에 달 보석으로 삼으실 것이다.


보증된 결과 

"복음주의의 내적 근대화"

우리가 신학에 있어서는 근대주의를 거부했으나 실천에 있어서는 전반적으로 근대주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주님의 일을 주님의 방법으로 한다는 것은, 한 기관을 운영하는 실무에서도 자연주의적인 전제에 기반한 기계적 공식에 의존하지 않고 성경적 관점을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주의를 하나의 철학으로 거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이 세상에서 배운 합리화된 방법으로 추진된다면,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고 주장하든 실제로는 자연주의자인 셈이다.

"우리 시대의 중심 과제는 자유주의나 근대주의가 아니다." 교회가 당면한 일차적 위협은 "주님의 일을 성령이 아닌 육체의 능력 안에서 하려는 경향"이다.


메시지를 마케팅하기


더 많은 돈, 더 많은 사역

"3 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르리라"(슥 13:3).

우리는 초자연적인 것이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연주의자의 의자에 앉아 하루하루 활동하고 있다.


기독교 기관의 운영방식


좋은 단계에서 위대한 단계로

최상의 기관은 종업원들을 양육하는 것을 영적인 사명으로 여긴다. 섬기는 리더십이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완전히 실천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품는다는 것은 성경적 원리들이 타당성을 지닐 뿐 아니라, 온갖 문제 투성이인 현실세계에서 더 실효성이 있음을 전적으로 확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원리들은 현실세계에도 타당성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회사의 생산성을 높이는 면에서도 더 실효성이 있는 것이다.


아이디어와 글을 도용하는 것 

"8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 16:8).

우리는 "사업하는 방법 속에 죄를 조립해 넣고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축복해 주시기를 기대할 수는없는 노릇이다.


작은 사람이란 없다

하나님은 목자들에게 양떼를 강탈할 것이 아니라 먹이라고 명령하신다.

"2    목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3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4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5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6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겔 34:2-6).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청지기답게 사용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정당한 공로를 인정하는 것은, 보다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은사들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다.





섬기는 지도자


기독교적 리더십 전략- 아래로부터 섬기는 리더십(servent leardership) 

섬기는 지도자란, 사람들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들을 세워 주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세우면서 그들을 이용하고 있을 뿐인가?" 하고 스스로 자문하는 것이다. 섬기는 지도자는 "투명한" 분위기를 만들어 모든 적절한 정보가 자유로이 공유되고, 따라서 누구나 책임있는 결정을 내릴 기회를 갖게 한다. 끝으로, 섬기는 지도자는 명령과 통제 중심의 방법을 버리고, 모든 사람이 지도자로 자라며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힘껏 활용할 수 있는 문화를 창조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적 원리가 단지 추상적 의미에서 참될 뿐 아니라, 우리의 일과 사업과 개인적인 삶의 현실에서도 타당한 것임을 똑같이 확신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역이나 사업이 성경의 원리에 위배된다고 느낄 때면, 우리는 그 일을 속히 멈추고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일깨워 주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그에 따르는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라도 말이다. 동료 그리스도인은들은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는 자들을 지원할 준비와, 그로 인한 대가를 지불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도덕적 용기 때문에 생계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할 준비까지 해야 한다.

비성경적 관행에 타협하며 사는 삶은 잘못일뿐더러 무정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불의한 상황을 묵인하는 것은, 사랑에서가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을 두려워하는 데서 나온다. 우리가 타인에게 경건하고 거룩한 사랑을 베풀고 싶다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초자연주의자의 의자에 앉을 때에야 비로소, 대가를 치르고서도 옳은 일을 할 용기를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잘못함"으로써 바로잡다


참된 영성

거짓과 허풍이 판치는 세상에서, 포스트모던한 세대는 무엇인가 참되고 진실한 것을 절실히 찾고 있다. 우리 교회와 기독교 단체가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또한 상호관계 및 생활방식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참된 공동체가 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진리를 말하는 방식은, 현대적인 선전 기법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에 어울리는 소박함, 진지함, 현실성이어야 한다. 교회는 참으로 사랑과 하나됨을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름받았다. 각 시대마다 복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는 말이나 논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말과 행위를 통해 서로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그들의 상호관계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반영해야 한다는 말이다.

배척받고, 죽임당하고, 살아나는 기독교 영성은, 기독교적 지성을 개발하는 일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의 삶 전반에 걸쳐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협력하여 죄와 자아에 대해 죽을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마음[지성](고전 2:16)을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