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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부록 4_ 라브리의 실제적 변증 사역/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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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퍼의 변증법- 상식적 실재론과 네델란드의 신칼뱅주의를 독특하게 결합.

어떤 진리 주장을 시험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 혹은 쉐퍼의 표현대로 보편적인 인간 경험에 견주어 보는 것이라고 쉐퍼는 주장했다(상식적 실재론). 그러고는 기독교만이 선(先)이론적 경험으로 알고 있는 바를 이론적으로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애썼다(화란의 신칼뱅주의). 우리가 경험으로 아는 진리들은 "하나의 전제를 찾고 있는 결론들"이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설명해 주는 "전제" 또는 체계적인 세계관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생존용 기계?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특히 인지과학의 분야에-환원주의와 결정론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정신은 "예정된 선택을 하는 생존용 기계"이며 자유의지는 주관적 환상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정통설이다.

"인간의 행위 배후에 있는 인과관계는 결정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

자유의지는 일종의 자기기만이며, "우리는 자신이 이상적인 행위자인 듯 스스로를 속이는 데 명수민데 ......자아가 운전사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의식 자체를 하나의 환상으로 치부한다. 우리의 뇌는 복잡한 컴퓨터일 따름이기 때문에 우리는 로봇에 불과하며, 로봇이 그렇듯 우리도 주관적 인식(우리가 정신. 영혼. 의식이라고 부르는) 없이도 완벽하게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살아있는 시체(좀비) 같은 존재라고 결론을 내린다. 살아 있는 시체란 영화에 나오는 괴물이 아니라 "철학자의 좀비", 곧 인간의 행위를 모두 보여주지만 의식이 전혀 없는 피조물을 일컫는다.


결정론은 경험 자료와 모순된다는 반론이 있었다. 우리 모두는 대안적인 행동 방안이 필요한 상황이 오면 그것을 즉각 인지하고 여러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이것은 종종 마음을 들뜨게 하며 어떤 때는 고뇌를 동반하지만,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점을 실제로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과 행위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자유롭고 책임 있는 존재임을 도무지 믿지 않을 수 없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의 궁극적 책임이 내게 있다는 것, 곧 비난과 처벌, 칭찬과 보상을 정당하게 하는 책임이 내게 있음"을 믿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모든 역사와 시대와 문화 속에서 우리는 이런 신념을 증언하는 문학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 경험의 일부이다.

결정론자가 일관성을 유지하려 한다면 이런 경험의 증언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세계관 경쟁에서 바람직한 처신이 아니다. 세계관을 제시하는 목적은 경험의 자료를 부인하는것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미치지 못하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결정론을 초래하는 철학은 어떤 것이든 거짓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그대로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 논점을 달리 표현하면, 아무도 결정론적 세계관에 기초해서는 일관되게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무엇을 믿든 간에 자유와 선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가정에 기초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는 불신자에게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자유에 대한 확신은 우리의 경험 속에 내장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을 도무지 포기할 수 없다. 설사 포기하고자 시도하더라도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가 '좋다, 나는 결정론을 믿는다'라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우리가 음식점에 가면 무엇을 주문할지 결정해야 하는데, 이는 자유로운 선택에 다름 아니다."


이와 반대로, 기독교는 인간 경험과 완전히 일치한다.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 형상의 한 측면임을 이성적으로 일관되게 설명한다.

만일 궁극적 실재가 의지와 선택 능력을 지닌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면, 인격을 지닌 인간도 더 이상 결정론적 세계에 사는 부적응자가 아니다. 기독교는 자유뿐 아니라 자유에서 유래하는 인간의 다른 측면들-창의성, 독창성, 도덕적 책임, 사랑-도 설명해 준다. 인간 인격의 전반에 대한 설명이 기독교 세계관으로 가능한 것은, 바로 인격적인 하나님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 본성의 최고 이상을 확증할 목적으로 상층부로 비이성적 도약을 시도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이상들은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 논리적으로 확실하게 일관되기 때문이다.


실재에 부딪히는 경험

주관주의는 어떨까?

실재는 우리의 주관적 욕망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이는 성인들조차 고통스럽게 배우는 교훈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관주의를 초래하는 철학적 입장을 모조리 자신 있게 거부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주관주의는 일상의 경험이 날마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설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험의 자료와 상충한다는 말이다.

이와 반대로, 기독교는 진리를 객관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그 이유도 설명해 준다. 즉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이지 나의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창조교리는, 본래의 구조와 설계를 지닌 객관적이고 외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우리의 신념을 뒷받침해 주는 논리적 근거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창조주는 침묵하지 않는다. 그분은 성경이라는 신적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내용은 객관적이며 믿을 만한 지식의 토대가 된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말하듯이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언어란 언어로 표현된 신념체계를 뜻하는데, 그들은 그것이 역사와 문화적 진화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본다. 기독교는 이런 과격한 역사주의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셨으니 초역사적인(transhistorical)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 한다.


그건 불공평해

현대문화의 특징적인 요소 하나는 도덕적 상대주의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공격하기 쉬운 "주의들" 가운데 하나다. 왜냐하면 본인이 무엇을 믿는다고 말하든, 정말 잔혹한 것을 직면한 자는 더 이상 도덕적 상대주의자로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은, 인간은 어떻게든 불가피하게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데, 비성경적 세계관들은 그에 필요한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불신자가 자신의 도덕적 본성에 따라 어떤 것을 옳거나 그르다고 선언할 경우, 그는 자신의 철학에 모순된 행동을 하는 셈이고 실은 그것을 비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객관적 도덕에 대한 유일한 근거는 거룩한 하나님의 존재인데, 그분의 성품이 도덕적 표준에 대한 궁극적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왜 우리가 도덕적 피조물인지를 설명해 주며, 우리의 도덕의식이 타당함을 확증해 준다.

쉐퍼의 변증법은 인간 공통의 경험을 시금석으로 삼는 것이었다. 세계관의 목적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는 것이며, 각 철학은 이 작업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냐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이 기준에 따라 기독교를 시험해 보면, 기독교가 가장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경험을 설명해 주고 그 의미를 밝혀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개인전도나 전문직을 통해 공적 영역에 신앙적 관점을 도입하고자 애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