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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부록 3_ 유물론과 기독교 사이의 기나긴 전쟁/완전한 진리- 낸시 피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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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는 원자가 때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일탈한다"고 추정함으로써 물질세계 안에 있는 우연의 요소를 설명했으며, 그것을 자유의지에 대한 신념을 뒷받침하는 물질적 기반으로 제시했다.

실용주의는 고대 헬라인에서 시작된 유물론과 기독교 사이의 기나긴 전쟁의 한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헬라사상에는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투스(그리고 나중에는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로 표현되는 또 다른 흐름도 있었다. 그들은 고대의 유물론자였는데, 우주가 오직 움직이는 원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그 원자들이 순전히 우연에 의해 합쳐지고 다시 합쳐지는 과정을 통해 생물을 형성하게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생물들이 "원자들의 목적 없는 회합과 합체"에 의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이미 옛날에 에피쿠로스는 유물론에 기초한 하나의 완전한 세계관을 그려냈다. 첫째, 물질이 존재하는 전부라면, 우리는 경험론자가 되어 마땅하다. 즉 지식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 알고 있는 것(원자들이 우리의 감각기관에 부딪히는 것)에 제한된다는 말이다. 둘째, 도덕도 감각에 기초해야 한다. 즉 선과 악은 쾌락과 고통의 감각에 따라 정의된다는 말이다. 유일한 도덕적 원천은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것인데, 이것이 곧 쾌락주의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 고삐 풀린 탐닉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쾌락 뒤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이유로 중용과 심지어는 금욕주의를 권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도덕이 지닌 주된 특징은 그것이 어떤 초월적인 절대선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감각에 대한 우리의 자연스런 선호에 기초했다는 점이다.



헬레니즘 시대(에피쿠로스가 살았던 때)가 지나가고 다시 한번 고전사상(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 철학계를 휩쓸었는데, 그 추종자들은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들의 주장은, 만일 세계가 정말 원자들의 우연한 배열로 구성되어 있다면, 지식은 불가능하리라는 것이었다. 감각을 통해 우리 정신에 유입되는 끊임없는 인상의 흐름은, 그 어떤 이성적 패턴으로도 정돈할 수 없으며 순전히 시각.청각.미각.촉각 등의 무의미한 산발작용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 알 수 있는 이유는, 실재라는 것이 무작위한 원자들의 흐름이 아니라 이해 가능한 패턴으로 정돈될 수 있는 것-형상(Forms) 또는 이데아(Ideas)라고 불리는-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의 정신이 포착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성적인 질서다. 생물체는 원자들의 우연한 합병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 가능한 형상으로 정돈된 물질로 구성되는데, 이를 라틴어로 종(species)이라 한다.

더 나아가, 고전 학자들은 이런 이성적 질서에 목적이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즉 어떤 목표나 목적(헬라어로 텔로스)에 의해 지도된다는 말이다. 그 발전과정은 그 안에 담긴 계획이나 목적에 따라 지도를 받아 펼쳐지는 과정이다. 최종적인 목표나 형상은 완전히 자란 나무 혹은 다 자란 암탉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요즈음 유전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꽤 명료한 상식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다.)

고전사상에 따르면, 이와 같은 목적론적 추론이 도덕에도 적용된다. 도덕은 에피쿠로스 학파의 주장처럼 감각(쾌락과 고통)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선과 정의 같은 초월적인 형상에 기초해 있다. 이런 형상들은 인간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목적이나 이상을 표현하고 있는 만큼 목적론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더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가 되려고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고대의 지적 세계는, 기독교가 무대에 등장하기까지는 이처럼 경쟁적인 세계관들(이 밖에도 여럿 있었다)이 서로 싸우는 전쟁터였다.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은 당시 진행되던 논쟁을 조사하고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 가능한 형상이란 개념은 "하나님의 마음 속 생각", 곧 세계를 창조할 때 그분의 계획이나 설계로 재해석되었다. 그 결과 일종의 기독교화된 고전주의가 탄생하여 고대 후반에서 중세 전체와 그 후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지배적인 철학적 입장이 되었다. 반면에 에피쿠로스는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후 과학혁명이 동틀 무렵에, 큰 지각변동이 있었다. 근대 초기의 과학자들 가운데 일부가 새로운 자연철학을 정립하려고 애쓰던 중,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조심스럽게 재고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에피쿠로스에 대해 부정적인 판단을 내린 초대 그리스도인 변증가들과 결별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았다. 이런 과학 사상가들은, 원자론을 그 유물론적 철학의 맥락에서 뽑아내어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 가능하다는 낙관론을 품고 있었다. 피에르 가세딘, 로보트 보일, 아이작 뉴턴 등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과학 분야에서 소생시킨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철학 영역에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이 들어오는 문을 열어 놓은 셈이었다. 곧이어 유물론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결국에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유물론이 서구사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다윈은 이해 가능한 형상(형상이 라틴어로 종(種)임을 상기하라)의 개념을 내던져 버리고, 자연에는 종이라는 게 없으며 오직 계속해서 변하는 개체들의 흐름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종이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진화의 변화가 너무 더디기 때문인데, 이는 마치 지구 표면의 곡선이 너무 완만해서 지구가 평평한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윈의 책제목이 「종의 기원」이라고 붙여진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의 목적은 사실 종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분류학적 범주들을, 우리가 자연의 흐름에 부과하는 유용한 정신적 구성물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했다. 유기적 세계의 궁극적 구성요소는 계속해서 변하며 우연한 상호작용 중에 있는 개체들이다. 다윈주의야말로 현 시대에 와서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승리한 것을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자연 속에 종이나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이나 형이상학 어디에도 진.선.미 같은 영원한 이상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한 걸음 더 나아간 자들이 바로 실용주의자들이었다. 다윈이 종에 대해 한 일을 그들은 사상에 대해 행한 것이다. 그들은 형상이나 이데아의 개념을 내던지고, 우리가 아는 것은 오직 계속해서 변하는 경험의 흐름뿐이라고 결론지었다.  

이해 가능한 형상에 의거해 사물을 설명하려는 고전적인 헬라식 접근법을 버리고 "유전적이고 실험적인" 지식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역사적 과정("유전적")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 과정은 경험적 조사("실험적")로 알 수 있다고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실용주의는 도덕의 기초를 인간 본성(하나님이 태초에 우리를 창조할 때의 모습인 그 본래의 이상적 형상)에 두지 않고,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적 과정으로 생긴 그 무엇으로 설명한다. 인간이 실험삼아 다양한 행위를 해보던 중 만족스런 결과를 낳는 행위가 뇌 속에 새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진화에 따르면, 모든 시대와 장소에 규범이 되는 본래의 이상적 인간 본성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도덕적 관행은 긴 역사에 걸쳐 환경의 압력에 대한 반응으로써  생긴 것이며, 편의와 실용적 결과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계속 보존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화가 계속되고 조건이 변함에 따라 도덕적 관행도 변해야 마땅하다. 중요한 것은 영구적, 규범적 원칙을 밝히는 일이 아니라 변화에 대처할 전략을 배우는 일이다.

"그 사회의 최고 지성이 그린 청사진에 따라 주의깊게 설계된 과정에 의해 질 높은 인간" 생산을 요청했다.

"인간 본성이란 개념 자체가 신다윈주의에서는 사라져 버리고 생명은 일련의 부품들, 곧 이리저리 옮길 수 있는 일용품이 되고 만다"

유전자들은 이리저리 바꾸면서 편리한 방향으로 생명의 형태를 조작해서는 안될 이유가 있을까? 

다윈주의를 둘러싼 논쟁을 먼 과거인 에피쿠로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보다 큰 맥락 속에서 그 이론의 위치를 찾아볼 수 있다. 다윈주의는 여러 면에서 고대 에피쿠로스주의의 부활이다. 에피쿠로스 유물론은 초대 기독교 변증가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뒤, 1500년 동안 잠자고 있다가 근대에 들어와 다시 깨어 기독교와 싸움을 붙은 것이다.

고대의 에피쿠로스 철학을 부활시킨 이들은 과학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홉스, 로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생각해 보라. 모두가 "자연상태"에서의 원자론적 개인주의를 전제로 삼고 있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사회에 적용한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덕철학자들(공리주의자인 제레미 밴담과 존 스튜어트 밀)도 도덕을 고통과 쾌락의 견지에서 규정하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에피쿠로스에게서 온 것이다. 공리주의는 도덕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정의했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원자론적 사회관과 양립 가능한 윤리체계를 세우려는 시도였다. 그에 따르면 각 개인의 이익은 동일한 무게를 지니기 때문에 자율적인 개개인이 합쳐진 고통/쾌락의 비율을 표로 만들어 내어 만인의 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용주의자는 다윈주의를 지성의 영역에 적용했다. 따라서 실용주의는 유물론과 기독교 사이의 기나긴 전쟁의 한 단계를 대표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