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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12_ 여성은 어떻게 문화전쟁을 시작했는가/제3부 복음주의는 어떻게 지성을 잃어버렸는가/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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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는 사회생활에 새로운 이분화를 불러온다.

그 이분법은 공적 영역에 있는 거대하고도 굉장히 강력한 제도와

사적 영역 사이의 분리다.

_피터 버거



여성과 대각성운동


가정이 곧 일터였던 시대


공동체적 남성다움

"공적인 유용성"


피난처로서의 가정


남성들은 왜 가정을 떠났을까


정열적인 남성

남자들이 험하고 경쟁적인 상업과 정치의 세계에 싸우러 나가게 되면서, 남성다운 성격 자체도 도덕적인 둔감, 경쟁심, 공격성, 자기이익 추구 등을 중심으로 재정의되었다.


남자 길들이기

길게 보면 이처럼 남자의 성품을 "탈(脫)도덕화" 시키는 것이 여성에게 최고의 유익을 안겨다 주지는 못했다. 또한 남성에게도 유익하지 못했는데, 사실 그들로서는 남성다움을 거칠고 경쟁적이며 실용적인 모습에서 찾는 편협한 정의에 만족하게 되고 그로 인해 그들의 도덕적.영적 열망이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여성화 현상

교회가 문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방어적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많은 성직자가 공적 영역에서 변호될 수 있다는, 종교에 대한 인지적 주장을 펴는 데서 후퇴하고 말았다. 그 대신, 그들은 신앙을 경험과 감정이 속한 사적 영역으로 옮겼으며, 따라서 그것은 여성의 관할구역 아래로 들어갔다. 종교가 완고한 남성이 속한 공적 영역에서 도망하여 부드러운 가슴의 여성이 속한 사적 영역으로 물러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종교와 도덕을 여성의 관할 구역으로 바꾸었다. 긴장과 부담을 동반한 그 무엇이 아니라 부드럽고 격려가 담긴 어떤 것으로 변모시키면서 말이다. 지적 허약성-그것을 "남자답지 못한 성격"이라 부르면서-에 대해 불평했는데, 이는 많은 이들의 의견을 대변한 것이었다.


도덕과 자비 

여성이 가정의 도덕적 수호자라면, 사회의 수호자도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었다. 결국 많은 여성들이 사적인 삶을 공적 생활로부터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표준과 남성의 분노

용기와 사심 없는 공적인 의무같이, 한대 주로 남성적 자질로 이해되던 덕의 개념이 이제는 주로 성적 순결을 중심으로 한 여성적 자질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남자다운 남성

하지만 궁극적으로, 여성을 남성의 도덕적 개혁자로 만들려는 시도는 자기 파괴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는, 덕이라는 것이 인간의 자질이 아니라 여성의 자질로 정의될 경우, 남자에게 덕스럽게 되라는 것은 결국 여성적 표준을 강요하는 셈이며 그런 표준은 남자의 본성에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덕스럽다는 것은 남자답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으로 되는 것을 의미했다.

지나치게 교화된(overcivilized) 

길들이지 않은 야성적인 남성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경향이 생겨났다. 남성적 덕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부분적으로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만일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서 진화했다면, 동물적 본성이 우리 존재의 핵심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사회적 다윈주의의 발흥으로 "원시적 투쟁에서 남자가 남자를 이기고 승리하는 것"이 높이 칭송되었다.

근육질의 기독교


놀이방 아빠

오늘날 많은 여성이 직면한 개인적 차원의 문제는 남성의 지배현상이 아니라 남성의 포기현상이다.


페미니스트의 격분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들이 자선의 제국을 확장하던 무렵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상당히 많은 분노와 시기심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남자 개개인에 대해서라기보다는 공적 영역에서 남자가 누리는 많은 기회를 향한 것이었다.

페미니스트가 보기에 문제의 발단은 가정에서 일을 빼앗기면서부터였다. 따라서 해결책도 자명했다. 여성이 일을 좇아 공적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진화론


여성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도덕적 재무장

오직 남성들 스스로 좋은 남편과 아버지가 되는 것이 남자다운 모습이라고 확신할 때에만 남성들이 가정생활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이 사실이다. 즉 부모로서의 의무와 희생이 남성적인 가치라는 것, 부부간의 사랑과 정절이 바깥에서 남성에게 강요된 여성적 표준이 아니라 남성적 성품의 불가결한 측면-하나님이 창조한 본래의 그 무엇-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중 잣대는 없다





가정을 개조하는 것

가정에서 전통적 기능을 모두 제거하는 추세에 도전하는 일일 것이다. 개념적 차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 경제학자가 현대 경제학을 그 토대로부터 재고하고 성경적인 경제 철학을 창의적으로 정립하는 일이다. 가정과 경제 기관들의 고유한 기능은 무엇이며, 그것들이 주님 앞에서 각 영역의 고유한 소명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어떻게 상호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미국의 기업문화에 자리한 "이상적인 근로자"라는 표준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고용인에게 사생활과 가정생활에 방해받지 말고- 가정생활 가정주부인 배우자에게 모두 넘겨주었으니-전임으로 (심지어는 근무시간을 초과하여) 일 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아내와 어머니들이 가정에 머물러서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공백을 메워 줄 때에도 이상적 근로자의 표준은 제대로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기독교 단체들이 앞장서서 이상적 근로자의 표준이 가정에 해로운 것임을 폭로해야 한다. 그들이 누구보다 먼저 가정에 대한 책임과 수입을 버는 노동을 재통합하기 위한 실제적인 대안들을 제시해야 한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 근로 혜택을 제하지 않는 시간제 업무, 유동적 근무제, 자택 근무제, 온라인 원격 근무 등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정에 바탕을 둔 사업. 가정에 바탕을 둔 일이 지닌 또 하나의 유익은 자녀들도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인데, 그런 기회를 통해 산업화 이전의 가정에서처럼 부모가 자식에게 기본적인 기술과 가치관을 전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소득이 있는 일만이 여성에게 존엄성을 부여한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이처럼 만연된 성공 이데올로기에 도전해야 한다. 자신의 일에 소명감을 느낄 때-수입이 있든 없든-가장 성취감과 보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는 자기보다 더 큰 무엇, 더 커다란 선, 이 세상 속 하나님의 목적에 기여하고 있음을 간절히 느끼고 싶어한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남성과 여성 모두가 일과 예배의 통합을 어느 정도 회복하면서 간격 그 자체를 좁히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리라.


삶의 청사진

새로운 생각이 우리의 실제 생활방식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한된 가치밖에 없을 것이다. 날마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방식, 우리가 소속된 기관을 운영하는 방식 등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말이다. 결단하고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의 진리에 의거해 삶 전체를 재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