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 서적/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11_ 이층적 진리를 받아들인 복음주의/제3부 복음주의는 어떻게 지성을 잃어버렸는가/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종교 세력은 노동의 분업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거기에 갇히고 말았다.

_마틴 마티

 

복음주의 운동에는 대중적 분파와 학문적 분파가 있었다.

 

상식적 실재론

상식적 실재론의 창시자인 Thomas Reid는 "서구 대학의 근대철학 과목에서 사용되는 정규 도서목록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18세기의 마지막 10년에서 19세기 대부분의 기간에 걸쳐, 그는 영국과 북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철학자인 듯했고 유럽 대륙에서도 상당한 대중성을 구가한 인물이었다"

상식적 실재론은 스코틀랜드 철학자 토마스 리드가 스코트랜드인 동료 데이비드 흄의 급진적 회의주의에 대응하여 만든 철학이었다.

상식적 실재론의 핵심 주장은, 이처럼 부인할 수 없거나 자명한 경험적 진리들을 확고한 토대로 삼아 지식의 체계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리드가 말하는 "상식"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듯이 실용성이나 생활 상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경험으로 알게 된, 곧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진리를 뜻한다.) 19세기 사상가 대부분은 자명한 진리에 하나님의 존재, 그분의 선함, 그분의 세계 창조 등과 같은 기독교 기본 가르침을 상당수 포함시켰다. 이런 것들이 이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존 로크로 시작되는)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연역적 방법을 옹호하는 (르네 데카르트로 시작되는) 대륙의 합리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동료 영국인 프란시스 베이컨의 귀납적 방법을 옹호하려는 경향이 짙다.

 

성경이라는 과학

 

캠벨의 이성주의적 접근

회복운동

 

현대인을 위한 옛날 책들

복음주의자가 베이컨 해석학을 수용한 결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영향은? 베이컨의 해석학에는 몇 가지 심각한 단점이 있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읽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에게 "과학적" 성경주석이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가 그 시대의 문화에 어느 정도 타협한 결과 생겨난 것이다. 복음주의는 가장 유행하는 당대의 과학이론을 포용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신학에까지 적용함으로써 각 시대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비판적 거리를 거의 상실해 버린 셈이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베이컨주의가 역사를 적대시한 것이었다.

 

오직 성경?

복음주의자들이 공유했던 가장 독특한 원칙은 "신조가 아니라 성경"이었는데, 이는 확실히 종교개혁의 입장(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 "오직 성경"은 성경이 최종 권위라는 의미였지, 신앙의 역사나 신앙의 공동체적 고백을 전부 배격한다는 의미는 분명 아니었다.)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허공에 바탕을 둔 시각

더 근본적인 문제는, 베이컨이 표현한 것처럼 우리의 "의견을 말끔히 씻어 낸" 지성이란 생각 자체가 계몽주의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결국 거부되었다는 점이다. 베이컨의 방법론에는, 모든 형이상학적 신념을 벗고 우리가 속한 제한된 역사와 문화 바깥 편에 서서 어떤 철학적 틀에서도 자유로운 순수한 "사실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이 같은 가상의 입장은 때로 "하나님의 관점" 또는 "허공에 바탕을 둔 관점"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마치 개개인이 시공간상의 자기 위치를 초월해서 우주적 관점에서 실재를 볼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과 같다.

옛날 책을 읽으라는 루이스의 충고를 거부하는 모습에서 복음주의적 특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마음을 품은 복음주의

 

의무의 과학

도덕철학이란 합리적 방법을 통해"도덕법칙"을 조사하는 "의무의 과학"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결과로 복음주의 학자들이 세상에 제시한 것은 기독교 세계관에 확연한 기반을 두지 않은 윤리였다.

그들은 완전한 (자연이 존재하는 전부라고 보는) 철학적 자연주의로 가는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철학을 포용한 학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열려진 그 문을 통과해 지나갔다. 그들은 도덕철학에 관련된 과목들을 폐지했고, 자연주의적 인간관의 함의를 충분히 설명해 주는 실험심리학과 사회학에 관련된 경험론 중심의 과목들로 대치했다. 미국의 대학은 세속화의 길로 걷고 있었던 것이다.

 

천상의 수학자

자연세계는 과학이라 알려진 내재된 자연법칙에 의해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반면(하층부), 초자연적 세계는 비가시적인 영적 영역(상층부)에 국한되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분열적인 하나님"

"지적인 확신은 기술자인 신에게서 왔고", "개인적인 종교 체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상정했다." 하지만 양자의 관계가 전혀 동등하지 않았던 것은, 과학이 참 지식의 유일한 근원으로 규정된 반면에 종교는 주관적 느낌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결과적으로 "인격적 하나님은 실체가 없는 영적 세계로 물러가게 되었다."

만일 기독교 철학이 과학에 통제신념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거짓된 철학-자연주의와 유물론-이 그 공백을 메울 것이다.

"자유로운 탐구"의 이상은 전통적 종교를 폐기하고 과학 자체를 "새로운 정통교리"로 격상시키기 위한 전술이 되어 버렸다.

 

베이컨에 눈먼 복음주의자

복음주의자들 대다수가 우주를 열린 체계로 보는 과거의 자연철학 속에 다윈이 새로운 가정을 삽입했다는 사실 받아들였을 뿐, 바로 그 과거의 철학이 공격을 받고 있다 점은 인식하지 못했다.

 

과외활동으로 전락한 종교

비극적인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의 종교적 중립성을 주장한 베이컨의 견해를 받아들였고 그 결과 종교가 사유화되는 데에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지성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지적 설계 운동을 좇아 모든 분야에서 자율적.중립적 지식을 내세우는 베이컨주의 모델에 도전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붙잡는 것은 "편견"으로 치부되는 반면에 철학적 자연주의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입장으로 무사통과 되는 관행을 거부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를 상층부의 사적인 경험으로 축소시키는 이층적 구분으로부터 기독교를 해방시켜야 하며, 기독교 본연의 객관적 진리로서의 지위로 복권시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리드와 로마서 1장

증거주의 변증론- 워필드파

전제주의 변증론- 카이퍼파

프란시스 쉐퍼는 실제 복음전도에서 증거주의와 전제주의가 어떻게 어깨를 같이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불신자와 대화할 때 우리의 목표는, 기독교야말로 우리가 선이론적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진리들을 설명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이론적 체계임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어디에서 발견되든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 하지만 그런 진리들은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4)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로마서 1장 19-20절)

복음전도는 불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념과 실제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비일관성을 정직하게 직면하도록 돕는 데서 시작한다. 우선 불신자의 세계관이 경험 자료에 대해 "타당성 잇는 설명"을 제공할 수 없음을 보인 연후에야, 기독교가 일관되고 논리적인 답을 주는 유일한 세계관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논쟁의 방향을 역전시켜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세계관이 상직적 경험과 모순된다면 결코 진리일 수 없다는 점을 보게 도와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경험은 "선이론적 자료"인데 "이 자료를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 경험에 관한 철학이론은 오류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광기인 것이다.

 

색깔과 모양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적합한 근거는 성경의 가르침, 곧 창조주가 있어 그분의 창조세계에서 우리의 정신적 역량이 믿을 만하게 작동하도록 설계하셨다는 것이다. 창조교리는 우리 인간 기능의 체질 자체가 물리적 세계의 구조와 잘 부합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인식론적 차원의 보증이다. 우리 감각의 인식작용을 신뢰하는 것은 "인간 설계 계획"의 일부다. 우리의 인식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그 기능이 설계된 의도와 부합하는 환경에서 작동할 경우,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색깔과 모양이 실재 세계에 있는 실재 대상을 재현하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

 "범주상의 연속성"

창조 설계의 교리를 떠나서는 내 머릿속의 생각이 바깥 세계와 상호 연관이 있음을 신뢰할 만한 근거가 없다.

 

습관에 불과하다?

불신자의 경우, 이 세계에서 활동하려면 귀납적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세계관은 원인과 결과의 규칙성을 믿는 데 필요한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현실세계에서 살아가려면 그는 자신의 모순된 세계관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

세계관의 목적은 경험의 자료를 설명하려는 것이지 그것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개인의 자아감에 대해 타당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는 철학체계는 부적절한 것으로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여기에는(비인격적 영적 세력에 입각해 실재를 정의하는) 동양사상과 뉴에이지 사상뿐 아니라 (비인격적인 자연 세력에 입각해 실재를 정의하는) 과학적 유물론도 포함된다. 비인격적 세력에서 시작하는 체계는 어떤 것이든, 결국 무의식적인 존재라는 순열의 구성요소로 인격을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인격적인 창조주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축소될 수 없는 인격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형이상학적으로 적절하게 설명해준다. 기독교가 유일하게 경험의 원재료를 포괄적인 세계관으로 묶어 제대로 설명해 낸다. 인간이 기계 부품으로 취급되는 비인격적인 대규모 제도가 있는 현대세계에서, 기독교의 메시지는 참으로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궁극적 실재는 기계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인 방식으로 사랑하고 그에게 이야기하는 인격적 존재(personal Being)다.

 

단순한 화학작용?

환원주의자들은 "사랑"의 감정이 뇌 속의 화학작용의 결과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한 인지과학은 신경계의 활동으로 인한 환상이라고 한다.

인간의 가장 고상한 열망을 지지하는 유일한 세계관은 기독교다. 기독교는 사랑이 참되고 실재한다고 믿을 만한 근거를 제시하는데, 바로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우리의 진화적 생존을 증진시키기 위해 유전자가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니라, 궁극적 실재의 근본적인 구조를 반영하는 인간 본성의 한 측면이다. 더구나,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순응하여 그분의 자녀가 됨으로써 그 영원한 사랑에 참여할 놀라운 가능성을 얻게 된다.

 


그릇된 정보를 전하는 장관

 

경험 진리들이 자명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자료에 불과하며 반드시 어떤 포괄적인 세계관의 틀로 설명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장하는 바는, 오직 성경에 기초한 세계관만이 우리에게 어떻게 과학적. 도덕적. 수학적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일관되고 온전하게 설명해 준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우주의 자물쇠를 푸는 열쇠다.

기독교 이외의 다른 세계관은 맞지 않는 열쇠이므로, 불신자와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들의 세계관이 그들의 아는 것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불신자들은 그들의 세계관에 기초해서 일관성 있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인지적 부조화의 상태가 초래되고, 이처럼 긴장이 고조된 지점에 복음의 문이 열릴 수 있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경험으로 아는 것과 신념으로 고백하는 것 사이의 갈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할 수 있다. 이 갈등이야말로 그들의 신념에 무엇인가 오류가 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징표이기 때문이다.

복음전도에서 우리의 목표는 그런 인지적 부조화를 부각시키는 것, 불신자의 세계관이 현실과 어긋나 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기독교만이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진리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

 

철학적 "속임수"

 

서구의 인간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높은 견해는 기독교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다. "세속적 세계관은, 하나님을 제외시킨 세계를 기독교적으로 모사한 것"

"인본주의는 종교적 신념의 대안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이 주지중에 변질된 변형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속임수"를 멈추고 자신의 신념체계가 파산 상태에 있음을 정직하게 직면하도록 밀어붙여야 한다. 포스트모던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필요를 자각하게 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성경의 대답에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상실감"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지성적 삶의 표지들

 

"인간은 특정한 설계 계획에 따라 조성된다"

개혁주의 인식론

 

상자에 갇힌 신자들

19세기에 미국의 종교가 "노동분업을 수용했다" 한편으로 "종교는 삶의 개인. 가정. 여가의 영역[사적인 차원]에 한해서 관여하라는 직무할당에 묵묵히 동의했다" 다른 한편으로, "공적 차원-정치.사회.경제.문화-은 자율적이 될 수박에 없었으며" 마침내 비기독교적 이데올로기에 점령당했다.

"교회는 세속세계와의 지적 대면에서 뒤로 물러섰고, 종교가 지적인 경험을 포함한 삶의 일부라는 삶을 포기했고, 이성적 연구는 과학의 영역이라는 가정 아래 종종 단념해 버렸다."

첫째, 교회와 신학교가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삶에 관심을 국한시킴으로써 세속세계와의 지적 대면에서 뒤로 물러섰다.

둘째, 그들은 기독교가 삶과 학문 전 영역을 해석하는 포괄적 틀을 제공한다는 생각을 포기했고, 기독교가 상층부에 가둬지는 것을 허용했다.

셋째, 그 과정에서 그들은 지적 탐구의 전 영역을 하층부로 단념해 버렸다. 그들은 학문 분야가 종교적. 철학적으로 자율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에 굴복했는데, 그것이 실증주의와 자연주의 같은 새로운 철학을 도입하기 위한 위장전술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생각은 추상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사람들이 사회와 제도를 세우는 구체적인 방식에 영향을 준다. 근대의 분열은 단지 종교에 관한 일련의 생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고 조직하는 방식에 심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그것은 일터, 가정, 남녀관계 등 여러 구조에 영향을 주는 사회 개편 과정의 일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