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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10_ 미국과 기독교가 만나 누가 이겼을까 제2차 대각성운동/제3부 복음주의는 어떻게 지성을 잃어버렸는가/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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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수중에 있다.

_토마스 페인(Thomas Paine) 


복음주의자들도 대부분 "인식론적 위기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미국의 정신을 그대로 흡수했고, 어떤 면에서는 반권위주의적.반역사적.개인주의적 관점을 주도하기까지 했다. 이는 기독교 지성에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교회로 들어온 민주주의


성직자가 있어야 할 곳에 정치인이 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당시의 정치문화에 대해 독특한 성경적 관점을 제시하기보다는 정치적 자유와 영적인 자유를 동일시했다.

"성직자를 발견하리라고 기대했던 곳에서 당신은 정치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_토크빌.


우리 자녀를 위한 족쇄?

정치에서 자치의 개념을 가져다가 종교에서 개인적 자율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차용했다.

"우리는 자유롭게 될 것이고, 스스로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기독교가 문화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기독교를 좌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정치 영역에 뿌리를 내리면서 그것이 무비판적으로 교회에 적용되어 고도의 개인주의적이고 민주적인 교회론을 낳았다. 자율성과 국민주권 같은 근대적 가치들이 복음주의 교회에서 당연 시 되었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반쪽 혁명?

민주주의와 성경의 주제들이 서로 너무 깊숙이 얽히는 바람에 어떤 실질적인 정치 분석도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즉석 구원

많은 이들이 역사적 교회와 고대의 신조와 신학 지식을 거부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각 사람이 스스로 판단할 권리를 선포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중적 복음주의 진영에서 개인주의적.원자론적 교회관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는 동등하고 자율적인 개개인이 스스로 선택해서 함께 모이는 집합체였다.


자연 상태의 미국


대중적 복음주의자들은, 사회구조란 "자연 상태"에 사는 자율적 개개인의 합의로 만들어진 순전한 선택의 산물이라고 본 초기의 사회계약 이론가들-홉스, 로크, 루소-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있었다. 독립 이후 사회계약론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대단히 타당하다고 인정되었는데, 그 이론은 미국인이 실제 체험하고 있는 것을 잘 묘사해 주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조차 교회를 말할 때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과거 사회계약론이 처음 제안되었을 때만 해도, 자연 상태란 순전히 가상의 시나리오, 곧 희미한 과거에 사회가 그런 식으로 발생했을 것이라는 신화적 이야기에 불과했다. 결국, 자연 상태를 실제로 체험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가정, 교회, 혈족, 마을, 나라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세계의 정착은 그런 규범을 깨뜨렸으며, 실제로 그 가상의 패러다임에 잘 들어맞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는 진정한 자연 상태가 실제로 존재했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에 있다가 독립적인 농부와 기업가들이 함께 모여 심사숙고하고 선택을 내린 끝에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계약론이 규정한 그대로 되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정부의 구조를 만들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권력을 만들어 주었다.

요컨대, 미국에서는 자연 상태가 역사적으로 실재한 듯 보였다. 그곳에는 독립된 개개인들 사이에 진정한 자연적 평등이 있었다. 그곳에서 마침내 인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바닥에서부터 시민사회를 건설할 기회를 얻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미국 독립 의미를 왕을 제거한 것뿐 아니라. 무(無)의 상태에서 신세계를 시작한 데서 찾았다. 마치 그 신세계에서 온 땅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인간의 문명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듯 비교하다니 그야말로 놀라운 발상이었다.

그 결과 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정치철학이 되었다. 결국 많은 미국인이 채택한 원자론적 시민 사회의 이미지는, 원래 "모든 정치체제 바깥에"(말하자면,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고립된 적대적인 개개인"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선택으로 권력을 창출하게 된다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것은 새롭고 흥미로운 사회관이었다. 식민지시대의 지배적인 정치철학은 고전적이고 기독교적인 공화제로서, 매우 공동체적 성격을 띠었다. 그 철학은 개개인에게 창조주가 제정하고 인가한, 선재하는 규범적 사회구조-가정.교회.국가-에 순종할 것을 요구했다. 덕이란 바로 사회적 유기체 안에서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른 책임을 수용하고 공동선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자유주의에 따르면, 사회구조는 하나님이 제정한 게 아니라 개개인이 자기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했다. 자기희생의 윤리는 자기주장과 자기이익의 윤리로 대체되었다.


1800년의 시간을 넘어


원시주의(primitivism).

이것이 현실의 반영이기보다는 수사적 성격을 띠는 것은, 사실은 대다수의 복음주의 진영이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 등에 표현된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유산으로부터 스스로를 열심히 "해방시키고" 있었던 셈인데, 그로 인해 얼마나 빈곤하게 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제퍼슨을 지지하는 그리스도인들


복음주의자들은 주변의 문화에서 일어나고 있던 거대한 변화에 휩쓸렸다. 사람들의 경험에 부합할수록 설득력이 강한데,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일반적인 경험은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민주주의의 확장이었다.

자유주의는 국가를 개인적 선택의 산물로 보았다. 다시 말해, 개인의 행복과 번영의 추구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촉진시키는지에 따라 순전히 기능적인 면에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대중적 복음주의자들은 미덕이 개인의 가슴과 양심 속에 있는 것으로서 사유화했기 때문에, 국가에 어떤 고유한 덕(공평 혹은 정의)도 부여하지 않은 자유주의자와 의견을 같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주의자의 순전히 도구론적 국가관을 수용했다. 즉 정부의 본질은 경제적 진보의 촉진자로 규정하는 기능적 또는 절차적 정의(定義)를 받아들인 것이다. "사유화했다"는 말은 복음주의자들이 공적인 영역에서 후퇴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많은 사회개혁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것은 미덕의 처소가 외적인 사회구조 속에 있지 않고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으며 사회개혁 자체도 개인의 변화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그들이 믿었다는 뜻이다.

부흥운동의 지지자들은 제퍼슨이 이신론자(deist, 신이 세계를 창조한 뒤로는 세계에 직접 간섭하지 않는다고 보는 계몽주의의 견해)이며, 그가 신약성경에서 초자연적인 요소를 모두 잘라 버리고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만 남겨 놓은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188년 제퍼슨의 대통령 출마를 지지했다.

교회의 권위는 더 이상 직분을 통해 하나님이 부여하는 영적 은사가 아니라,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기능적 차이로 여겨졌다.


교통경찰은 필요 없다


정치철학에서 일어난 평등주의 혁명은 같은 시기에 일어난 경제적 혁명의 지원을 받았다.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엘리트주의와 권위를 배격하는 종교 메시지에 더욱 마음을 열게 되었고, 보통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주장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릴 권리를 옹호하게 되었다. 대중적인 복음주의자들은 당시에 등장한 근대적인 문화에 비판적 자세로 도전하기보다는 기독교를 근대적 경험의 밤주에 맞추려고 개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력으로 사는 사람들


대중적 복음주의가 옛날부터 내려오던 죄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했지만, 동시에 그 영성과 교회론은 철저히 근대적 성격-반역사적.반권위주의적.개인주의적.자발적(개인의 결심에 따라 좌우되는)-을 띠고 있었다. 


설교자, 공연가, 이야기꾼


유명인사 스타일


우리는 홍보를 믿는다


기독교 단체들이 최신의 세속적 마케팅과 홍보 기법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내부에 커다란 홍보기구를 세우고 있다. 당시나 지금이나 이 같은 기계적 의식 구조의 자연스런 결과는, 복음에 대한 신실한 태도와 사역자 개인의 덕이 아니라 숫자의 영향력으로 성공을 측정하려는 경향이다.


민중 선동가?


범죄자의 회랑이 아니다


미국이 정착민과 농부와 소도시 위주의 국가 단계를 넘어서게 되자, "마음의 종교"로는 19세기에 부상한 지적인 도전들-특히 다윈주의와 고등비평-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열정은 깨지기 쉬운 방어적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뜨거운 감정에서 신앙의 버팀목을 찾으려 할수록, 신앙은 사적인 경험이 자리한 상층부에 속하는 비이성적 신념으로 더욱 비치게 되었다.

당대의 거대한 지적 의문에 답할 수 없었던 많은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주류문화에 등을 돌리고 요새와 같이 수세적인 의식구조를 개발했다. 이로 인해 20세기 초반 근본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분리주의가 적극적인 전략으로 채택되었고, 기독교는 독특한 하위문화 집단의 용어로 전락했다. "그 결과, 과거 어느 때보다도 유대-기독교적 유신론의 지적 토대가 의심을 받던 상황에서, [기독교는] 학문세계에서 거의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근본주의 지도자들은 자연의 역사[다윈주의]나 성경연구[고등비평] 어느쪽이든 과학적 자연주의의 비판에 발목을 잡혔으나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근본주의의 특징은 주류문화에 대해 계속 반항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향에 있었다.

역사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비춰 주는 거울과 같다.




자아가 다스리는 시대가 열리다


대중적 복음주의.

오순절 은사주의 운동이란 대중적이고 반신조적이며 체험 중심의 운동을 의미한다.

"개인화와 개인주의는 강화되고, 교리와 경건은 약화된 패턴"을 일컫는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인들의 종교생활에 일어난 일은 바로 새로운 자아가 최고의 권좌에 오른 것으로, 자아가 신성의 의미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_ 사회학자 웨이드 클락 루프(Wade Clark Roof).

복음주의가 자율적 자아라는 근대 자유주의의 개념에 도전하기는커녕 오히려 같은 개념을 종교적 언어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복음주의는, 종교란 거의 또는 전혀 인지적 내용이 없는 개인의 체험문제로 전락시키는 이층적 구분에 굴복해 버렸다.

만일 우리가 복음주의의 유산 가운데 최상의 것을 보존하기 원한다면, 냉정하게 그 약점까지 검토하고 개혁을 일으킬 지혜와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자리는 바로 복음주의 내부에 잇는 다른 자원, 곧 복음주의의 보다 학문적인 분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