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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8_ 철학적 다윈주의/제2부 최초의 시점으로 돌아가서/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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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모든 것이 맹목적으로 굴러가다가

우연히 생각에 떠올랐다는 것이다. .....

_로버트 프로스트


철학적 실용주의(philosophical pragmatism)라 불리는 학파의 핵심 가정은, 만일 생명이 진화한 것이라면 인간의 정신도 진화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모든 인문과학-심리학.교육학.법학.신학-이 거기에 기초해서 다시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홈즈, 신앙을 잃다


다윈의 자연주의를 완전한 세계관으로 진전시켜 전통적 종교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다윈의 자연주의 자체를 하나의 포괄적인 철학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다윈의 새로운 논리


실용주의 중심에는 지식에 대한 다윈주의의 견해(인식론)가 있다. 실용주의자들은, 다윈의 자연주의가 인간의 정신(지성, mind)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물었다. 그러고는 정신은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답을 냈다. 그들은 인간의 정신이 물질을 초월한 것이라는 과거의 견해를 배격하고, 물질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다윈의 견해에 찬동했다.

이런 가정은 단번에 전통적 유신론과 자유주의적 유신론 모두를 뒤엎었다. 두 유신론 모두 정신이 물질에 우선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윈은 이 질서를 뒤집었다. 그의 이론에서 정신은 순전히 자연의 힘의 산물이며 진화의 역사에서 매우 늦게 출현한다. 정신은 우주에서 근본적이고 창조적인 힘이 아니라 진화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요컨대, 다윈은 정신을 "자연으로 귀화시킨"(naturalized) 것이다.

실용주의자들에게 정신의 자연귀화는 다윈이론의 가장 혁명적인 결과였다. 정신적 기능이란 어떤 환경 속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풀기 위한 적응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생각이란, 다윈이 말한 바 자연에서 일어나는 우연한 변이와 같은 의미의 우연한 돌연변이가 뇌에서 일어나는 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견고한 신념의 재료가 되는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환경에 적응하도록 돕는, 일종의 정신적 자연선택인 셈이다. 개념과 확신도 생존을 돕는 도구일 뿐, 사자의 이빨이나 독수리의 발톱과 다를 바 없다.

이 새로운 진화의 논리에서, 생각이란 일을 해내기 위한 정신적 도구에 불과하다. 




생각의 현금 가치


실용주의자들은, 다윈주의를 정신에 적용하려는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던 당시의 실험 심리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새롭게 등장한 실험적 접근법은 행동주의에 기울었다. 즉 정신은 관찰과 측정이 가능한 몸의 외적 행동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실용주의자의 견해, 곧 정신은 독특한 영적 실체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강화시켰다.

진리는 어떤 생각의 "현금 가치"다. 즉 어떤 생각이 보상을 제공할 경우,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는 것이다._윌리엄 제임스

요컨대, 신념은 실재의 반영이 아니라 행동규칙이다.

이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발상인지 이해하려면, 그때까지 지식에 관한 지배적인 이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성경적 교리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이성을 반영하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은 보통 믿을 만한 것으로 신뢰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안에 살 수 있게 우주를 지으셨고, 그 우주에 "맞게" 우리의 정신을 창조하셨다. 우리의 인지적 기능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우리는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실용주의자들은 진화의 함의를 정직하게 직면했다. 만일 맹목적이고 방향 없는 자연적 힘들이 정신을 만들어 냈다면, 우리의 생각이 실재를 반영하는지 여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생각이란 정신적인 생존전략일 뿐이며, 다른 방법에 의한 생존투쟁과 연속선상에 있다. "우리의 사고방식에서 '참된 것'이란 곧 편리한 것이다. 이는 우리의 행동양식에서 '옳은 것'이 편리한 것을 뜻하는 것과 같다."_윌리엄 제임스.


종교는 당신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어떤 종교가 행복이나 의미를 느끼게 해준다면, 그것은 "참되다"는 것이었다. "만일 하나님 가설이 가장 넓은 의미에서 만족스럽게 작동한다면 이는 참된 것이다."_제임스.

적어도 그것을 믿는 개인에게는 참되다. "어느 것이 가장 가치가 있는가"이다. 무엇을 정하든 간에 그것은 당신의 진리다.

그러나 실용주의적 검증을 통과했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주장을 진리로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모든 "주의"가 그렇듯이, 실용주의도 실재의 한 가지 측면을 붙들고 그것을 하나의 체계로 격상시키는데, 그 체계에서는 다른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차원으로 환원된다.


딱딱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


어떤 철학이든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람들이 어떤 질문에 매달려 있는지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 실용주의자들이 풀려고 했던 문제는 서구사상을 수 세기 동안 괴롭혀 온 지식의 분할현상이었다. 그들은 사실과 가치의 간격을 메우고-하층부와 상층부를 병합-지식의 재통합을 이루려고 했다.


이층적 세계관은 대학의 교과과정을 분할해 버렸다


예술 및 인문학 분야

철학적 관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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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분야

철학적 자연주의

 듀이는 이분법을 극복할 "매개체"로 실용주의를 제시했다.


다윈의 제자들


실용주의자들은 서로 상반되는 두 사상의 흐름에서 각각 조금씩 취해서 서로 합치는 방법을 사용했다. 낭만적 관념론(상층부)에서는 역사주의를 취했는데, 이는 관념을 진화하는 관습의 산물로 규정한다. 실재가 절대정신의 자기표출이라면, 모든 것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하는 과정에 있으며 여기에는 생물뿐 아니라 문화와 관습과 개념도 포함된다.

영국의 경험주의(하층부)에서는 도구주의를 취했는데, 이는 관념을 사회적 목표를 이루는 도구로 규정한다. 이 두 가지 접근법을 합침으로써, 실용주의자들은 헤겔의 역사주의를 영적 과정에서 자연주의적 과정으로 완전히 변형시켜 버렸다.

그 결과, 사실가치를 결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니라 자연주의에 새로운 향을 더하게 되었다. 그들의 전략 모델은 다윈이었는데, 다윈도 생물학 내에서 두 종류의 철학 전통을 하나로 묶은 인물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부분적으로 낭만적 역사주의가 생물학에 적용되어 산출된 결과였다(안정된 실체라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에 있다). 하지만 그는 충실한 영국인 경험주의자였기 때문에 진화의 과정에 순전히 유물론적인 메커니즘을 투입했다. 달리 말하면, 역사주의와 자연주의를 합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용주의자들이 생물학을 넘어 다른 영역에서 하려고 하는 작업이다. 즉 헤겔의 문화 진화주의를 취하되 그것을 순전히 자연주의적으로 만들어 훌륭한 과학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실용주의자들의 독특성은 결정론을 철저히 배격하고 역사를 완전히 불확정적인-자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며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불완전하고 불확정적인 세계는 인간들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실재를 창조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미국을 변화시킨 사상


하나님도 진화시키자

신학의 경우, 실용주의자들은 만일 당신에게 하나님 개념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내재적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이 세계 안에서 그리고 이 세계와 더불어 진화하는 유한한 신을 말한다. 

과정신학은 하나님과 세계가 끊임없는 변화와 진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서 그리고 세계와 더불어 진화하는 신적인 영이자 세계의 영혼이며 진화하는 우주적 생명(우리의 생명도 그 일부가 되는)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는, 이는 범신론(pantheism, 모든 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상)이 아니라 범재신론(panentheism,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상)이다. 이는 물리적 세계를 하나님의 본체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방출이라고 본다. 과정신학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의 삶과 경험을 형성하는 선택을 내릴 때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경험까지도 형성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삶이 신의 삶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컨대,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창조하는 공동 창조자(co-creators)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창조하는 공동 창조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죽을 때 개개인으로서 우리의 존재는 끝나지만, 우리가 살았던 인생은 계속되는 하나님의 삶의 과거 단계가 된다. 죽음 이후의 내세란 없다.

과장신학은 하나님을 진화의 맥락 속에 둠으로써 전통적 유신론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그 신학은 하나님을 제한적 존재로 여긴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지도 않으며, 다만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이 세계와 함께 진화하는 존재일 뿐이다.

열린 유신론. 진화하는 우주를 "열린" 우주라고 묘사하는데, 이런 용어 자체가 실용주의자의 언어를 반영한다. 이 세계는 새로움, 혁신, 출현,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을 특징으로 하며 하나님조차 미리 알 수 있는 세계다.

우리가 진화론적 고학에 도전해야 할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교회와 신학교가 진화론적 신학을 가르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사상가들이 직면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역사주의적 의식(historical consciousness)의 발흥이다. 중세에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정체적 혹은 순환적 세계관을 개발했다. 그 결과, 르네상스 시기에 시작해 낭만주의 운동에서 꽃을 피운, 역사 발전에 대한 새로운 의식에 제대로 반응하기 어려웠다.

19세기 말에 일어나 신앙에 가장 큰 도전을 제기한 것은 독일의 고등비평과 다윈주의였다. 둘 다 새로운 역사주의적 심성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신학에서, 후자는 과학적 영역에서 그러했다. 고등비평은 기독교 자체를 종교적 관념과 관습의 진화의 산물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성경을 신적 계시가 아니라 인간 문화 내부의 신 개념이 진화하여 표출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인런식으로 진화의 도식을 성경에 부과해, 애니미즘에서 토테미즘으로 , 그리고 다신론을 거쳐 결국 일신론으로 나아갔다고 본 것이다. 성경의 기사 가운데 이 도식에 맞지 않는 대목에 대해서는 믿음 수 없다거나 오류가 개입되었다고 치부해 버렸다.

역사주의 문제점은, 다른 모든 "주의들"과 마찬가지로, 창조된 세계의 한 측면을 선택해서 모든 실재를 설명하는 단 하나의 통일된 해석의 원리로 격상시킨다는 점이다. 헤르만 도예베르트가 말하듯이 역사주의는 창조된 실재의 역사적 측면을 "절대시한다". (하나님이 절대적 실재로서 인정되지 않을 때마다, 창조세계의 일부가 절대자로 격상될 것이고 다른 모든 것은 그 하위 범주로 축소될 것이다.) 도예베르트는 또한 역사를 창조에 내장된 잠재성의 "표출"로 보는 기독교적 개념화 작업을 시도했다.


왜 판사들이 법을 만드는가?

법적 실용주의. 법이란 사로 경쟁하는 이익 집단들 간의 "적자생존"의 산물이라고 했다. 실용주의자들은 법이란 "생존투쟁에서 사로 상충되는 욕망을 조정하기 위한 인간적 수단"에 불과하다는 다윈주의 개념을 채택했다. 

올리버 웬델 홈즈 2세는 (독일의 관념론에서 나온) 역사주의 밥학파를 취해서 (영국의 경험주의에서 나온) 분석주의 법학파와 함께 엮었다. 

홈즈는 역사주의 학파로부터 법의 근원이 진화 중에 있는 관습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도입했다. 법을 문화와 전통의 특정한 시대와 문화와 완전히 상관관계 있는 것으로 취급했다. 즉 역사의 경로를 따라 법에 대한 생각을 추적함으로써 그 생각들이 어떤 불변화는 보편적 도덕 질서에 기초하지 않고, 언제나 특정한 지역문화와 그 특유한 역사의 산물임을 우리 스스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법은 실제적인 유용성에 의해 판단되어야 하고, 그 유용성은 사회과학자들의 경험적 연구로 결정되어야 한다. 법이 사회공학을 위한 도구로 환원된 것이다. 기존의 법의 정당성은 그것이 정의와 같은 "영원한 원칙을 대변하는가에 있지 않고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사회적 목적을 이루는 데 유익한가에 있다.

실제적으로 이것은 판사가 바라는 사회적 목적을 의미한다. 홈즈는 판사들이 법을 해석할뿐더러 법을 만든다고 스스럼없이 인정했다.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결(Roe vs. Wade abortion decision, 여성에게 낙태를 선택할 권리가 실질적으로 인정한 판결. 이후 여러 주에서 낙태를 합법화하는 입법이 잇따랐다.)은 법정이 판결을 내릴 때 이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법정이 선호하는 사회적 결과에 근거해 판결했던 것이다. 


듀이의 딜레마

존 듀이는 몸속에 영혼이 있듯이, 물질 속에 구현된 내재적 하나님을 제안함으로써 헤겔과 다윈을 합치려고 했다. 이는 과정신학과 비슷한 것이었다. 훗날 듀이는 구원을 사회적 진보로 재정의한 사회 복음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개개인에게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문화 속에 내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만일 문화가 기독교적 가치관을 포용한다면, [거기에 속한] 개인도 구속될 수 있을 것이다.

존 듀이는 지적인 탐구를 정신적 진화의 한 형태로 재조명했으며, 그것은 생물학적 진화와 똑같은 패턴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신념이 한시적이며, 어느 것도 영원하거나 보편적으로 참되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우리의 가치관이 다른 이들에게도 옳다고 확신할 수 없다." 각 개인이 자율적인 결정자가 되어 스스로 자기 나름의 가치를 정해야 한다.

철학적 자연주의. 윤리에 대한 자연주의적 접근은 어떤 초월적 표준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 결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표준이라고는 사실 개인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밖에 없다.  


무력해진 교사들

오늘날의 도덕 교육은, 학생들에게 과거 모든 문명에 영감을 불어넣었던 위대한 도덕적 이상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자기 나름의 주관적인 감정과 가치관을 탐구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을 뜻한다.

미국의 많은 교육자들이 듀이의 사상에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자신의 경험상 그런 방법이 실효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식적 입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당신 스스로 실재를 창안하라

구성주의 교육(constructivist education).

지식이 사회의 구성물이라면 교육의 목표는 학생들에게 자기 나름의 지식 구성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구성주의는 외부에 객관적 실재가 있어 배우는 자에게 알려진다고 보지 않고, 오히려 배우는 자가 자기 나름의 실재를 능동적으로 구성한다고 가정한다.

이는 상당히 거창한 주문이다. 어린이가 길을 건널 만큼 크기도 전에 "자기 나름의 실재를 구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그들의 관념이 옳은지 그른지를 이야기해 주면 안 되며, 다만 학생들이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표현하도록" 격려하는 역할만 할 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대다수의 교육이론이 실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철학이 적용된 결과인데, 구성주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구성주의는 듀이의 진화론적 인식론이 직접 적용된 결과다.  구성주의는 우리를 환경에 적응하는 유기체로 가정하기 때문에, 어떤 생각을 시험하는 유일한 기준은 그 실효성 여부에 있는 것이다.

구성주의 세계관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교육 방법에 불과하지 않고 진리를 사회적 구성물로 보는 관점에 기초한 상대주의적 인식론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다윈과 "믿음을 함께한다"는 것

"다윈과 믿음을 함께 한다는 것"(이 표현 자체가 무척 시사적이다)은 우리의 모든 신념과 확신이 "지각의 표층이나 돌연변이한 바이러스만큼이나 우연의 산물임"을 아는 것을 뜻한다.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다윈의 임의의 변이와 같이, 생각 역시 뇌 속 임의의 변이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상당한 힘을 발휘하며 존속하는 까닭은, 그것이 실제를 반영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을 조직화하고 생존투쟁에서 앞서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종(種)은 "진리(대문자 T를 사용한 Truth임을 주목하라)를 향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번영"을 지향하고 있다. 이 [절대] 질리[Truth]라는 개념은 솔직히 말해 "비(非)다윈주의적"이라고 말한다.


톰 울프와 다윈의 의심

다윈주의에서 진화는 인간의 구성물이 아니라 하나의 객관적 사실로 취급된다. 만일 정신이 다윈의 진화의 산물이라면, 생각과 언어도 타인을 포함한 환경을 통제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언어가 진화한 이유는 "[사람들의] 장래 행위를 예측하고 통제하는 데 유용한 전술적 도구이기 때문"이라고 로티는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따르면 "언어란 한 짐승이 다른 짐승 위에 군림하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하다"_톰 울프.

이 같은 과격한 환원주의에 대항해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논점은, 그것이 자멸하는 관념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만일 생각과 신념들이 참된 것이 아니고 환경을 통제하는 데 유용할 뿐이라면, 모스트모더니즘이란 사상 역시 마찬가지다. 만일 포스트모더니즘이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가 그 사상을 신임할 필요가 있을까?

흥미로운 것은 다윈도 이와 똑같은 문제로 씨름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그러했다. 스스로 그것을 "지긋지긋한 의심"이라고 불렀다. 물론 다윈 자신의 이론도 "인간 정신의 확신" 중 하나이므로, 그는 자기가 앉은 나뭇가지를 스스로 잘라내고 잇던 셈이다. 


하층부와 상층부 공생관계


신(新)실용주의

진리란 실용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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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정신은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되었다


* 지붕 벗겨 내기-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에 담긴 위험하고 불안정한 함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세워 놓은 부인(否認)의 보호막-이것이 없으면 걷잡을 수 없는 폭풍에 휘말릴까봐-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불신자와 대화할 때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자연주의의 논리적 결론을 인식할 수 있도록 촉구할 필요가 있다. 만일 그들에게 일관성이 있다면, 자연주의적 전제를 견지하는 이들은 고학과 도덕을 비롯한 다른 모든 분야의 지식에서 포스트모던적 회의주의를 품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포스트모던적 회의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자신의 전제에 따른 결과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뒤로 물러나 자신의 전제들을 재고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총에서 나오는 진리


"실용주의의 문제점은 바로 실용성이 없다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특정 사회가 지지하는 가치관을 무조건 재가하기 쉽다. 흉하게 말하자면, 권력 있는 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찬동하기 쉽다.

실용주의자 가운데 가장 냉소적인 인물인 홈즈는 "어떤 법이 우리를 지옥으로 데려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공동체 지배 세력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면 좋은 법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데 나는 흔쾌히 동의한다." 그리고 "지혜롭든 그렇지 않든, 좋은 정부를 시험하는 기준은 지배 권력이 그 뜻대로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이 원리를 국제관계에 적용해서, 진리를 "다른 모두를 때려눕힐 수 있는 당사국 다수파의 결정"으로 정의한 것으로 유명하다.

요컨대, 실용주의자들의 이른바 "사회적 욕구"에 기초한 지배는 결국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은 권력자의 지배로 판명된다. 만일 실용주의가 군림한다면 "철 장갑과 기관총이 형이상학적 진리를 결정하는 궁극적 권위자임에 틀림없다."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포스트모던적 회의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이 자신의 관점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제시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거기에는 영적인 문제와 비인지적인 감정적 체험뿐 아니라 우리가 몸담은 우주에 관한 객관적 진리의 계시도 포함된다. 

요컨대, 성경의 계시 교리가 사실과 가치, 상층부와 하층부 간의 간격을 메우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가 "다윈과 믿음을 함께해" 포스트모더니즘을 포용하든지, 아니면 침묵하지 않는 인격적 하나님과 믿음을 함께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후자의 로고스가 바로 보편적이고 통일된 진리(Truth)의 근원이다.


인지적 전쟁

도덕이 언제나 파생적이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도덕은 저변에 깔린 세계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문화전쟁에 효과적으로 참여하고 싶다면, 기원의 문제를 둘러싼 인지적 전쟁에 기꺼이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다윈주의가 전환점이 되어, 하층부에 자연주의적 세계관이 확고히 자리잡고 종교와 도덕은 비인지적 범주인 상층부로 밀려나도록 봉인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일된 진리 개념을 회복하는 열쇠는 창조의 개념을 분명하게 회복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한결같은 가르침에 따르면 "단 하나의 실재"가 존재할 뿐인데, 그것은 단 한분의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창조했기 때문이라고 어느 역사가가 설명한다. "이 창조 이야기를 전제로 할 때 지식 또한 당연히 단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진리의 통일성에 대한 확신을 뒷받침한 것이 바로 창조의 교리였던 것이다.  

우리의 신앙에 내포된 위대한 주장에 충실하려면, 기독교가 가치의 영역으로 밀려나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형이상학적 겁쟁이의 옷을 벗어 버리고 승리를 확신하면서 공세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또한 기도와 영적 능력으로 무장하고 오늘날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을 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리더십 아래 발벗고 나서야 한다.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뒤로 돌아가서 우리가 어디서 잘 못 나갔는지 지나간 발걸음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부정적 패턴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다 긍정적인 것으로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