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42: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15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욥 42:7-17)
욥의 중재가 필요한 까닭
욥기는 인과응보의 법칙과 합리성의 틀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창조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세 친구의 말이 그 자체로 틀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폭 좁은 이해로 보다 큰 틀을 닫아 버렸기 때문에 틀린 것입니다. 욥이 그들을 수용해서 더 큰 틀 안에 가져다 놓아야 했기 때문에 욥으로 하여금 중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은 세 친구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욥이라는 더 큰 이해 범주 안으로, 욥의 경험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셋이 주장한 것이 전부가 아니고 욥이 경험한 세계, 더 큰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합리성과 인과율보다 더 큰 법칙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마음대로’라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존재하게 하신 창조 세계는 그것을 지으신 분의 궁극적인 목적, 그의 선하심과 복 주심과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인도되고 있다는 것이 욥기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옳을 의’(義)가 아니라 ‘착할 선’(善)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지, 긍정적인 목적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욥기가 제시하는 결말입니다.
뛰어들어 오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주시는 결말이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이나 성공보다는 예술성을 지닌 깊은 만족과 감사와 찬송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깊고 찬란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폭풍우 속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모든 과정을 만드시고 개입하신다는 것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게 불타올랐다는 표현입니다.
사람에게는 인과관계를 초월하는 다른 수단이 없습니다. 인간은 잘못된 것을 돌이킬 능력이 없습니다. 죽으면 끝날 뿐인데,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그것을 뒤집으셨습니다. 사망을 뒤집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절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지는 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모든 역사와 개인의 인생에 개입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뛰어들어 오셔서 우리와 씨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삭을 잡으려고 하자 여호와의 천사가 나타나서 못하게 말립니다. 거기까지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시는 데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기까지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을 잡을 만큼 깊이 들어오지 못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시려는 일들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여기서 부활이 암시되고 후에 예수 안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 드러납니다. 하나님도 자기 아들을 잡지 않습니까? 그런데 잡은 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이레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이삭을 바치기로 하니까 하나님이 살려 줬다고 결말을 뒤집는데, 사실은 죽여도 살아난다는 의미입니다. 죽이고 죽으십시오. 그런데 죽이고 죽으려니까 쉽지 않습니다. 죽이는 것도 어렵고 죽는 것도 어렵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늘 아들 보고 자기보다 낫다고 합니다. 아들이 성공하니까 찾아와서 자기가 아버지라고 밝히는 것이 아니라, 씨름하고 씨름해서 아들을 만들어 놓고는 “너 잘났다. 너는 뛰어나다. 네가 내 아들이어서 고맙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경만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되나 두고 보시지 않습니다. 함께 계십니다. 필요한 시간만큼 기다리시고 필요한 시간만큼 말씀하시고 필요한 시간만큼 지켜보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호 11:8)라고 하십니다. 놓아두었을 때에도 지켜보시는 중입니다. 고난을 당하게 놔두는 것도 욥이 어떻게 하나 보자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불붙듯 그를 붙들고 계셔서, 이제 막 불 위에서 익기 시작한 음식의 뚜껑을 여러 번 열어 보듯이 폭풍 속에서 욥에게 뛰어들어 오시는 것이 욥기의 결말입니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서 봐주었다는 것이 욥기의 주제가 아닙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여 낮은 자리에 처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낮은 자리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영광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감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는 최고의 적, 신앙인이 가지는 최고의 적은 자폭과 타협입니다. 자폭과 타협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능력과 깊이를 내가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자폭하거나 타협합니다. 자폭의 한 형태는 계속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했다는 것으로 안심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고난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끝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어디까지 울어야 하는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가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그가 폭풍 속에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인과율을 품는 하나님의 일하심
은사를 이야기하면서 사랑 이야기를 통해 시기와 경쟁과 자랑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은사란 누군가의 우월함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은사는 모두에게 유익하게 하려고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잘났으면 주변 사람 모두에게 유익이 돌아가야
합니다.
욥기 결말에서 재미있는 점은, 욥이 옳고 세 친구는 틀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옳음이 세 친구들을 부둥켜안는 데로 간다는 점입니다. 최고의 의, 하나님의 의는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적으로 옳으면 더 많은 사람과 기쁨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을 가진 것이 우월함을 드러내는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인정받기 위한 유능은 필요 없습니다. 유능하려면 유익을 주기 위한 유능함이 되어야 합니다.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 이유는 더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이 은사라는 것이 아니라, 은사는 유익을 위한 것이고 그 유익한 길을 사랑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사랑은 상대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상대를 위한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우리가 모든 것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확인입니다.
“욥, 네가 맞다. 그러나 네가 저 세 친구를 품어야 한다. 인과율과 합리를 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인과율과 합리보다 더 큽니다. 그것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저것이 수평적으로 대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큰 틀, 열려 있는 틀 속에 인과율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질서를 드러내기 위하여 그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용서와 일하심과 궁극적인 승리를 믿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영광으로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위대합니다. 믿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믿음의 관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기독교의 위대함입니다.
신앙은 묶고 감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욥기의 결말도 묶고 감싸는 것으로 맺어집니다.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고난당하고 억울한 것을 보상해 주는 것이 결론이 아니라 고난으로만 이 자리에 갈 수 있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욥은 억울함을 경험했고, 세 친구들은 분명한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누가 더 큽니까? 억울한 것을 경험한 욥이 분명한 것을 이야기한 그들보다 더 큽니다. 누가 누구를 감쌀 수 있습니까? 억울한 자가 분명한 자를 감쌀 수 있습니다. 욥은 두 배, 갑절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이 고난의 자리를 통과함으로써 그들을 다 끌어안을 만큼 깊고 넓어지셨다고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우고 온전하게 되어 그 감싸 안은 보자기가 튼튼해지고 무한히 넓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욥기의 결론입니다.
자기를 내어 줌으로써만 싸매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상대방을 무릎 꿇려 자기 소유로 삼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 줌으로써 감싸 안는 방식으로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음의 자리에 가기까지 요구하시고 그를 부활시키심으로 우리가 영광을 얻게 되는 종교입니다. 여기까지 와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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