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42: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1-6)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의 연속성
욥기는 우리가 기대하던 속 시원하고 분명한 결론 대신에 창조의 깊이와 넓이, 하나님 통치의 즐거움에 대한 설명으로 답을 대신하고, 42장에서 짧게 욥의 항복과 회개에 대한 묘사로 끝이 납니다. 물론 그 후에 일종의 보상으로 가족의 축복, 재산의 축복 같은 것이 나오지만 우리에게는 조금 미흡해 보이는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셔서 답이 없는 억울한 고통 속에 있습니다’라는 불평에 대한 해답을 욥이 얻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 사이의 혼란, 그 불가해성이 욥기의 가장 중요한 소재일 것입니다.
욥은 ‘나는 하나님을 외면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은 나를 왜 외면하시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들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부재라고 느꼈던 상황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임재였다는 뜻입니다. 욥은 자신이 당한 고난이 하나님의 외면으로 말미암아 생긴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힘껏 축복하시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비운 자리, 내가 외면한 시간은 없다’
엘리야 선지자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보이게도 일하시고 감추고도 일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엘리야 선지자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의 이해할 수 없는 연속성을 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성실함과 기적의 연속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복 받고, 외면하시면 벌 받는다’라는 이분법적 설명보다 더 큰 성경의 주장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의 기이함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고난도 복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의 비밀입니다.
‘우리가 잘하는 때가 없고 못하는 것뿐이지만, 하나님은 복을 주셔야만 되겠습니다’라는 말은 사실 ‘하나님이 형통뿐만 아니라 고난으로도 복을 주신다’라는 말과 같은 원리를 부지중에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 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밭이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밭은 나려고 하는 것도 방해만 했을 뿐이다. 밭이 무엇을 만든 게 아니라, 내가 뿌린 씨가 결실한 것이었다. 좋은 밭이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씨가 떨어져야 한다. 너희는 자갈밭이고, 사람들이 늘 밟고 다니는 굳은 땅이고, 가시밭이다. 내가 씨를 뿌릴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라도록 옥토로 만들지 않는 한 결실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그런데 너희는 씨를 달라고 하거나 씨를 주면 만들어 낼 그런 실력도 안목도 생각도 없단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해도 너희는 알아듣지 못한단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가 씨를 스스로 만들 수도 없고 씨를 키울 실력도 없는 밭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생명과 능력을 가진 이가 여기 왔기 때문이다. ‘너희는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고 아무런 필요도 소원도 생각도 없는데 내가 왔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말씀하실 때도 우리는 몰랐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때도 우리는 몰랐습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욥기로 돌아오면, 욥에게 주신 하나님이 답은 이런 것입니다. ‘네 이해와 네 합의와 네 간절함 같은 것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무지, 너의 한계, 너의 고집 같은 것 위에 모든 것을 초월하는 나의 성실함과 거룩함이 있단다.’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들과 우리가 무력하게 느끼는 일들 전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과 자비하심이 역사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희망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나의 성실함과 자비와 긍휼과 능력으로 일한다는 것을 안다면 네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겁낼 필요가 없단다.’
욥이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까지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하나님의 세계 속에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욥을 하나님이 와서 깨뜨리십니다. 고난으로 깨뜨리고 깨우십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보여 주시자, 한계 안에 있던 욥이 비로소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제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던 모든 순간에도 하나님은 함께하셨고 일하셨습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서, 수치스럽고 절망스러운 자리에 처해 있어도 괜찮습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우리의 가장 못난 자리를 덮으실 수 있고, 구원하실 수 있고, 싸맬 수 있다고 욥은 드디어 항복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에서 도망갈 수 없다
이스라엘의 실패로 말미암아 복음이 이방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순전히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달려 있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그러니 그 긍휼의 무조건적인 성격에 비추어 볼 때 배신한 이스라엘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논리입니다.
불순종하는 자들을 그냥 흘러가 버리게 놔두시지 않고 막아 놓았다는 뜻입니다. 불순종의 자리 끝에 울타리를 하나 더 쳐 두어서 순종의 자리에서 불순종의 자리에 넘어간 자들도 최후의 보루인 불순종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두심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을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울타리 안에 있는 자들에게도 긍휼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어떤 원칙이나 논리가 하나님을 떠밀지 못합니다. 하나님에게 뭐라고 할 자격이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싸고 채우고도 넘치는 분입니다.
이제 욥은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했던 자리, 하나님이 외면했다고 생각했던 경험,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고통까지도 전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능력의 개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잘못했다고 하는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못난 대로 갚지 않으시고 내가 잘못한 것으로도 나를 축복하시는 것을 인정하는 회개를 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안 돌아봤다. 내 편을 안 들어줬다는 말은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재와 티끌 가운데서 살겠습니다. 누가 나를 뭐라고 하겠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온 것입니다.
믿음이 어느 만큼이기에 작다고 하실까요? 잘하면 복 받고 못하면 벌 받는 정도로밖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 안에 다 묶다
그늘이란 나무가 있어야 생기는 것입니다. 사막에는 그늘이 없습니다. 풍성하고 깊어야만 그늘도 있는 것입니다. 녹음이 우거졌다는 것, 그늘이 졌다는 것은 그곳이 외면당하는 자리라는 뜻이 아니라 무성한 생명을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 신비를 말씀으로만 들려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증거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들어도 소용없고 봐도 소용없는 이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알아들은 적이 있느냐? 그래도 나는 찾아왔느니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왔고 너희를 위하여 죽었고 너희를 데리고 부활하였느니라. 너희는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 너희를 위하여 내가 왔노라. 내가 죽었노라. 내가 다시 살아났노라.’ 성육신, 죽음, 부활이 예수 안에 묶여 있습니다. 같이 등장할 수 없을 것 같은 단어들이 한데 묶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죄인을 위하여 찾아오시는 하나님, 영광을 버리고 우리에게 당신을 맡겨 죽음을 맞이하는 하나님, 죽음에서 부활을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이 바로 예수의 생애 속에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찾아오심, 죄인을 위함, 죽음의 자리까지 내어 주심, 실제로 죽으심 그리고 죽음을 뒤집는 기적, 이 모든 것들이 한 존재, 실제 역사상의 한 인생 속에, 예수라는 실존 안에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 속에, 우리 존재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 무지와 실패와 게으름과 비난받을 모든 것까지 통틀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주셨으며 그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허락하신다는 약속을 믿으십시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으로 예수 안에서 증거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거룩하심과 전능하심과 자비하심에 우리가 붙잡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떤 형편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며 인생인 줄 아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를 본다는 것은 창조 세계의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이상과 원칙만이 아니라 실제적 현실을 보는 것이며, 바로 거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해와 상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신비를 보는 은혜를 누리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그저 우리의 못난 것밖에 고백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예수를 믿으라고 선포하는 것인 줄 압니다. ‘너의 이해, 너의 결심, 너의 능력 같은 것은 묻지 않겠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받아라.’ 하나님은 이렇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니 참 감사합니다.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사랑을 받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신실하심과 능력을 믿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일어서게 하여 주옵소서. 스스로를 용서하고 이웃을 용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된 길을 걷는 기쁨과 자랑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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