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40:15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16 그것의 힘은 허리에 있고 그 뚝심은 배의 힘줄에 있고 17 그것이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얽혀 있으며 18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뼈대는 쇠 막대기 같으니 19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 20 모든 들 짐승들이 뛰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내느니라 21 그것이 연 잎 아래에나 갈대 그늘에서나 늪 속에 엎드리니 22 연 잎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그를 감싸는도다 23 강물이 소용돌이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 물이 쏟아져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하니 24 그것이 눈을 뜨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것의 코를 꿸 수 있겠느냐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2 너는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3 그것이 어찌 네게 계속하여 간청하겠느냐 부드럽게 네게 말하겠느냐 4 어찌 그것이 너와 계약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5 네가 어찌 그것을 새를 가지고 놀 듯 하겠으며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두겠느냐 6 어찌 장사꾼들이 그것을 놓고 거래하겠으며 상인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지겠느냐 7 네가 능히 많은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꽂을 수 있겠느냐 8 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 9 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 10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욥 40:15-41:11)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난 일은 있을 수 없는데, 말이 안되는 일이 왜 현실에 일어나는가 하는 욥기의 설정을 분명히 하고 읽어야 합니다.
‘너에게 일어난 고난을 네가 물리칠 수 있느냐? 이유 없는 재난을 네가 해결할 수 있겠느냐? 없지 않느냐?’ 그렇게 묻고 있습니다.
‘너에게 일어난 재앙도 나만이 다룰 수 있지 너는 해결할 수 없다’라고 답하십니다.
하마와 악어가 없었다면, 괴물이 없었다면 놀랄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욥에게 재난이 없었다면 불평할 일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마와 악어도 만드셨고 욥에게 재난도 주셨습니다. 그것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존귀합니까? 하나님 다음으로 존귀합니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습니다. 조금 못하다는 것은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대등하지는 않지만 너무 높아서 다른 피조물과 구별됩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큰 짐승, 큰 괴물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인간에게 다스리게 했습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답이 나옵니다. ‘너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너희와 동일한 수평적 차원에서 맞서야 할 대상이 아니다. 너희는 그것들을 다스릴, 그 위에 있는 존재다. 악어와 하마보다 너희가 더 세서 그것들을 물어뜯고 물리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그것들 위에 있단다. 그것들이 너희 발아래 있단다. 너희에게 일어나는 모든 재난은 너희가 상대하고 해결해야 하는 수평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를 그 위에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것으로 너희를 떠받쳐 속을 채우는 일들이란다.’ 이것이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우리는 억울함이나 버거움 같은 것들을 해결해야 하고 없애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욥기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그것들과 부딪히고 충돌하는 차원에서 올라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씌우신 존귀와 관, 즉 통치자의 입장에서 그 모든 것의 존재 가치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부여한 특권과 지위입니다.
하나님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자리
욥이 처음에 친구들과 싸우고 불평한 것은, 자신을 그저 죽어 없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존재로 이해하고, 살아 있는 동안이나 하나님이 평탄하게 해 주시면 된다고 생각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위로 올라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기대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큰 목적과 권세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의 결론입니다.
욥이 생각하는 것같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해결해 버리고 없애 버리는 것이 인간의 영광이거나 인간이 가야 할 궁극적인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손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위에 있는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높은 자리로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주십니다. 하나님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들을 경험하는 자리로 자신도 모르게 승격되는 인생을 살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반항적인 자기 연민의 상태에서 돌아서기를 하나님이 촉구하시는 장면'
반항적인 자기 연민 상태에 빠져서 ‘나는 억울하다. 하나님은 너무하신다’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너무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절대 타협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니 시편 8편에 나오는 것같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다는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만물을 다스리려면 권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서야 합니다. 모든 다른 피조물들 위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방불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성모독적인 비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존귀, 청지기로 세우신 우리의 직분에 대한 하나님의 훈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육이 있습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인생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더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욥같이 말입니다.
섬기는 자리로 부름받은 인간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는 오해받고 억울하게 죽으신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떠나서는 기독교 신앙을 논할 수도 없고 비켜 갈 수도 없고 타협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힘입어 죽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받는 고난을 대신할 수 있느냐? 너희는 결단코 못한다’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막 10:39). 주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과 주께서 하신 일로 모두가 동참해야 하는 그 잔과 그 세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섬기는 일입니다.
고난을 당하면 지는 자 같고 약한 자 같고 망하는 자 같으나 하나님의 통치는 그런 방법으로 세워집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다만 사탄의 시험 앞에 욥이 누구 편을 드는지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탄의 도전을 받아 그것으로 욥을 채우시고 높이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 우리를 손해 보게 하거나 망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욥은 억울하지 않습니다.
제자도는 권능의 문제도 헌신의 문제도 아닌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을까요? 섬기는 것에 있습니다. 나이 들면 젊었을 때와 확연히 구별되는 능력이 하나 있는데, 바로 감수하는 능력입니다. 억울함을 삼키는 것을 감수합니다. 그것은 나이가 들지 않으면 하지 못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다만 힘이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쇠퇴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그는 것입니다. 드디어 숨은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당하는 고난과 네가 한 모든 불평들은 내가 진정성을 가지고 개입한 폭풍우 같은 간섭이었다. 성의를 다하고 진심과 모든 노력을 기울여 개입한 내 손길이었다. 너 그것을 아느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배우는 자리까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요구됩니다. 그러니 쉽게 충고하지 말고 쉽게 정죄하지 마십시오. 쉬운 길이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분 아닙니까? 우리는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안 들면 뭐라고 한마디 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우리 대신 죽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이런 분을 믿는 것이니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무시무시한 표현인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소원이 다 이루어지고 어려운 일은 없어진다는 식의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으면 이 길은 못 갑니다. 다른 것으로 보상되거나 확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유일하고 전부인 이유가 되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할 힘을 다른 데서는 쥐어짤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욥이 배웁니다. 자신이 당한 모든 일은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셔서 타협하지 않는 그분의 신실하심 때문이라는 것을 배우는 자리까지 옵니다. 내가 당한 모든 고난이 나를 괴롭히는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요, 내가 소원하는 것과는 하나님이 타협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배우는 자리입니다.
신앙생활의 명예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명예요 자랑이 아니라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평안을 믿는 것도 안심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기억하여 욥기의 증언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기억하고 사는 명예와 믿음의 담력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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