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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박영선의 욥기 설교-박영선 목사

29. 하나님_ 너는 내 자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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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2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23 내가 환난 때와 교전과 전쟁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남겨 두었노라 24 광명이 어느 길로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 25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으며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 주었느냐 26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27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28 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29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30 물은 돌 같이 굳어지고 깊은 바다의 수면은 얼어붙느니라 31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32 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 35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36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 37 누가 지혜로 구름의 수를 세겠느냐 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 38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 39 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우겠느냐 40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숲에 앉아 숨어 기다리느니라 41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39:1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2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 5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 9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 13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 19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 26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27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 (욥 38:22-39:30)



폭풍처럼 개입하시는 하나님

자연현상이 그들 나름의 고유한 법칙을 가지거나 질서와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비는 우연히 내리거나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격자의 생각과 계획과 목적과 의지에 의해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비가 오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지혜 속에 있듯이 우리가 만나는 일 중에 하나님이 간섭하시지 않고 생각 없이 주시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너는 내가 없었다는 거지? 내가 네 생각을 안 했다는 거지? 응답을 안 했다고 그러는 거지?”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까지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일하시고 함께하시는 그의 선하심과 그의 붙드심의 한 손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거부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짙은 실망이 자연주의라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자연을 의인화해서 말하자면 자신들의 호불호, 기쁨과 슬픔에 관계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자연의 위대함으로 나타납니다. 크기, 그 말없는 감수, 이것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이것이 자연입니다. 그런데 자연이 그렇게 하도록 자연을 다스리시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원대하심과 궁극적인 승리가 우리의 밀고 당김과 감격과 거부와 분노와 감사를 뛰어넘어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 창조된 자연에 그대로 새겨져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성실함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 듯 모를 듯, 눈으로 확인했다가 놓쳤다가 그러면서 철이 듭니다.

엘리후가 법칙과 인과 보상으로 세계를 붙들어 맬 때 그의 말 끝자락을 붙잡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뛰어들어 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폭풍우 속에서’라고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의 역동성, 열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잠잠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무정하지 않으십니다. 비정하지 않으십니다. 말없는 심판관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이 자연을 만들어 놓고 어떻게 일하는가 지켜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뒷짐 지고감상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뛰어들어 오십니다.

모든 자연인(自然人), 모든 생명체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복 주심과 능력과 선하심 속에서 마음껏 그 생명을 뽐내고 살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창조 세계로 답을 주십니다. 그 핵심은 모든 창조물이 ‘왜’라는 이유와 ‘어떻게’라는 수단과 방법을 넘어 실재하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공의롭고 성실하신 하나님의 통치와 그 궁극적인 약속의 완성이 우리에게 승리로, 복으로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궁극적인 완성, 하나님 통치의 궁극적인 영광을 보여 줍니다. ‘거기에서는 들나귀와 산 염소와 말과 타조와 매와 독수리가 모두 다 창조의 진정한 완성과 영광과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창조 세계의 청지기

하나님은 왜 이런 것들을 욥에게 제시할까요? 하나님은 욥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승리를 약속하시고 그것들의 증거로 모든 생명체를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목적을 주시고 약속하시고 책임을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셔서 답을 주실 때, 욥은 하나님의 동반자로 서 있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라는 것은 너와 나의 간격이 크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는 다른 존재와 다르다. 너는 대장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증언과 계시로 보면 너는 내 자식이다. 너는 다르다. 너는 내가 만들어 놓은 모든 창조물들의 대리자로 청지기로 살도록 되어 있다. 너 하나 먹고 사는 것이 전부인 인생이라고 이야기하지 마라. 고통을 면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등장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쉽게는 못 갑니다.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자기 시대를 감당하는 책임을 면제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시대의 도전 앞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대답을 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모든 창조물에 대하여 책임 있게 주인 노릇을 하시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시대를,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우리의 자리를, 살아서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창조물의 주인으로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당신의 일을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하루하루를 살라고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외면하지 말라고 합니다.





현실을 기꺼이 감수하라

가장 중요한 것, 꼭 필요한 것은 모두에게 주십니다. 꼭 필요한 것은 성실한 것, 순종하는 것,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감춰진 대로 있는 것들입니다.

자연의 경이, 자연의 위엄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무심함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뒤집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이 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이것이라고 합니다. 제한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순종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온 하늘에 울려 퍼지는, 온 땅에 영향을 주는 것 말고 자기 자리에 붙잡히는 그 조건을 감수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 하늘에 울려 퍼지는’ 길이 아니라 한 육체가 되어 시간과 공간에 묶여 그 외길로밖에 갈 수 없는 길을 순종하여 가셨습니다. 반대 받는 길이며 알아주지 않는 길입니다. 숨겨진 모든 사람이 겪는 방식입니다. 그런 인생길을 예수님이 걸으셨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될 자격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순종, 하나님의 일하심의 지혜와 능력에 대한 항복이 경건입니다. 예수님은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해야만 했던 그 제한된 길, 아무것도 아닌 길, 거슬림을 받는 길을 내내 걸으셨습니다.

“너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너는 내 아들이란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육체에 붙잡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자기를 내어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이 됩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그 길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너 네가 누군지 아느냐? 다만 고통을 면하는 것이 다라고? 넌 내 자식이다.”

하나님이 드디어 보이게 나타나셨습니다. 그의 억울함과 비명과 아우성 속에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이 그를 그 길로 미셨던 것입니다. 현실을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억울해하며 감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경이로운 하나님의 일하심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걸으신 바로 그 길이 산 증거입니다.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고 자존심을 확인하는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너는 너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래? 고통을 면하는 것이 다냐? 너는 내 자녀니라.” 이렇게 찾아오십니다. 억울하지 않습니다. ‘힘들지만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유익되게 할 뿐이다’라는 유명한 명언이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들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고 그래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늘 잊습니다. 예수님은 필요 없고 편하게만 해 달라고 떼씁니다. 하나님은 그럴 수 없다고 답하시는데, 우리는 늘 못 알아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운명을 한탄합니다. 못난 짓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가지는 위대함과 명예와 권능 아래에 우리를 붙들어 항복하게 하사 위대한 인생 살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