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36:26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 27 그가 물방울을 가늘게 하시며 빗방울이 증발하여 안개가 되게 하시도다 28 그것이 구름에서 내려 많은 사람에게 쏟아지느니라 29 겹겹이 쌓인 구름과 그의 장막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깨달으랴 30 보라 그가 번갯불을 자기의 사면에 펼치시며 바다 밑까지 비치시고 31 이런 것들로 만민을 심판하시며 음식을 풍성하게 주시느니라 32 그가 번갯불을 손바닥 안에 넣으시고 그가 번갯불을 명령하사 과녁을 치시도다 33 그의 우레가 다가오는 풍우를 알려 주니 가축들도 그 다가옴을 아느니라 37:1 이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떨며 그 자리에서 흔들렸도다 2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3 그 소리를 천하에 펼치시며 번갯불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4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그의 위엄 찬 소리로 천둥을 치시며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를 멈추게 아니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6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내리게 명하시느니라 7 그가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시어 모든 사람이 그가 지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8 그러나 짐승들은 땅 속에 들어가 그 처소에 머무느니라 9 폭풍우는 그 밀실에서 나오고 추위는 북풍을 타고 오느니라 10 하나님의 입김이 얼음을 얼게 하고 물의 너비를 줄어들게 하느니라 11 또한 그는 구름에 습기를 실으시고 그의 번개로 구름을 흩어지게 하시느니라 12 그는 감싸고 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 13 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 (욥 36:26-37:13)
보상을 끊으신 하나님
욥의 잘잘못 때문에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욥이 한 일에 대해 보상을 안 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엘리후가 맡은 역할은 무엇입니까? 확인 사살을 하는 것입니다.
사탄과 하나님 사이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욥에게 보상을 중단해도 그가 과연 신앙을 지키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욥이 찾은 단 하나의 해결책은 ‘죽자’였습니다. 우리가 늘 하는 것입니다. ‘죽자!’ 그런데 단서가 붙어 있었던 것 기억납니까? 시작할 때 하나님이 ‘죽일 수는 없다!’라고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죽을 수도 없는 욥
하나님이 보상을 중단했다는 사실과 욥이 죽을 수 없다는 두 가지 조건을 놓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명예를 욥에게 맡겼다.’ 욥의 고난은 그저 한 사람을 시험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탄의 거부와 불만 앞에 하나님이 공정하게 꺼내 놓은 하나의 내기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겪는 신앙 현실 속에서 단지 자신의 인생만을 책임지면 되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를 위탁받은 자로 존재합니다. 대단한 명예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욥기를 읽어야 합니다.
욥은 자신이 옳다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겠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답을 듣고 싶다. 이것은 분명히 내가 이전에 이해하던 것과는 다른 경험이다. 나는 잘못한 것 없다. 만일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얼버무리고 싶지 않다. 내가 걸어온 길에서 책임질 일이 있어서 꾸중을 들어야 한다면 그 꾸중도 받겠다’ 하는 자리까지 나온 것입니다. 죽을 수도 없으니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열려 있는 창조의 틀
37장에서 창조 세계를 가지고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하는 엘리후가 보여 주는 치명적인 약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인과율로 질서를 잡는 분이라고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인과율이 전부인 하나님이니, 그 앞에 항복하라고 소리 높이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은 잘못을 고백하는 자리가 아니라 잘못을 몰랐을 때, 죄인일 때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나를 받아 주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눈물입니다. 회개란 언제나 그렇습니다. 회개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짐에 대한 감동이 눈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흔히 이 순서를 오해하는데, 회개의 감격은 받아 준 것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누가 와서 꺼내 준 것입니다. 보상도 아니고 심사도 아닙니다. 잘해서 상 받은 것이 아닙니다. 시작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러 오십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동일하게 예수는 죄인을 위하여 옵니다.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위하여 옵니다. 용서하러 오십니다. 우리를 섬기러 오십니다. 심판하러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십니다. 이렇게 높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와 능력으로 얼마든지 부르시는 것입니다.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 철없는 놈아, 내 것이 다 네 것 아니냐”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창조 세계는 이처럼 성실한 조건과 그것을 만족시키는 보상으로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깨우치시기 위해 더 큰 자리로 열어 놓고 부르시는, 모험과 선택이 허락되어 있는 열린 세계입니다.
영광으로 초대된 인생
창조는 인과관계와 같은 틀 속에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무대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무한한 자유 속에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유한함과 무지와 나태함과 무력함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하는 나날들에 대한 회한과 분노와 체념과 간절함 때문에 우리 안에 생기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엘리후처럼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가,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가’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서 ‘범상하고 평범하고 내세울 것 없고 아무것도 아닌 우리 인생이 예수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실 만큼 하나님에게 필요한 존재란 말인가’라는 물음으로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잘못을 범하지 않고 틀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나가고 더 나가고 끝없이 더 나가는, 무한하게 열려 있는 영광과 축복으로의 초대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능력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부르십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늘 조마조마해하고 미안해하고 민망해하면서 하는 기도의 대상입니다.
자신을 가지십시오. 우리의 실수와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못난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기로 작정하셨고 그 뜻을 멈추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나 욕먹을 수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아니기 때문에 이 신앙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를 ‘모두’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 모두라는 말에 제한을 두지 마십시오. 모두에게 열 수 있다면 우리 자신에게도 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욥의 자리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주인이신 우리 아버지가 누구신지를 기억하여 삶을 기쁘고 자신 있게 사는 담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기도
지고 틀리고 후회하고 울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 갖고 견디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권능과 기적과 복을 내리신다는 것을 알게 하사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을 주옵소서. 우리의 못난 것을 감내할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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