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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박영선의 욥기 설교-박영선 목사

28. 하나님_나는 폭풍같이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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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8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9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10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11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12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13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 14 땅이 변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었고 그들은 옷 같이 나타나되 15 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16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17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18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19 어느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20 너는 그의 지경으로 그를 데려갈 수 있느냐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21 네가 아마도 알리라 네가 그 때에 태어났으리니 너의 햇수가 많음이니라 (욥 38:4-21)




거친 바다도 깜깜한 밤도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 안 계신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나는 어디에나 있다’라고 답하십니다. ‘네가 나를 없다고 할 때도 나는 없을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이다. 폭풍 속에서 맹렬하게 있었다’라고 하십니다.

‘막아서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바다가 으르렁거리는 난폭한 존재가 아니라 갓난아이와 같고, 하나님은 아이를 강보로 안은 것같이 바다를 감싸 안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이 드러났느냐 하면 ‘내가 없다고 네가 아우성쳤던 그때도 나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침과 새벽은 밤을 지나야 오는 자리입니다. 밤을 전제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광명한 시간만 의롭고 의미 있는 자리이고 어둡고 캄캄한 것은 차단된, 억압된 혹은 버려진 시간이라고 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다를 막았다고 말하지 않고 바다를 싸안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낮에는 다들 보는 것을 볼 뿐이지만, 밤에는 상상력이나 시상(詩想)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낮과 밤, 둘이 대등하게 자리를 허락받고 있습니다. 낮만이 아니라 밤도, 형통만이 아니라 고난도, 자랑만이 아니라 억울함도 말입니다. 낮과 밤이 하나는 옳고 하나는 그른 것이 아니라 피아노의 건반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이 있듯이 낮과 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의 창조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성실하심을 벗어난 것이 있을 수가 있느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아는 최고의 절망과 실패가 승리로 가는 문과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변덕과 배신과 모든 것을 가지고 우리를 생명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 안에서 부활과 영광의 승리를 주십니다. ‘너희의 존재와 너희의 경험 속에서 만나는 어떤 일도 나의 성실과 능력과 선한 것을 방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우리 마음에는 썩 내키지 않을 것입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시작부터 함께 계셨던 하나님

“너는 대장부같이 허리를 동이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는 피고도 아니고 심사의 대상도 아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대장부다’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야곱일 뿐입니다”라고 답한 야곱에게 “아니다. 너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은 승패의 개념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이기지 못하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낫네”라는 말에는 모든 부모가 만족합니다. 자기보다 잘난 자식을 둔 부모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그 영광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부모를 이긴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자식 칭찬 듣는 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욥이 부르짖었던, 거부했던 모든 고난과 억울함 속에서 하나님은 계속 일하고 계셨습니다. 지금까지 욥의 생애가 하나님이 폭풍같이 일하고 계셨던 나날들이었다고 욥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듯이, 야곱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 자기 혼자 힘으로 살아야 하는 줄 알고 외삼촌 집에서 외롭고 어렵게 목숨을 연명하며 재산을 만들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 모든 나날들이 사실은 하나님이 함께하신 날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얍복 나루터에서 야곱을 만나 씨름하셨듯이 야곱의 인생 내내 그의 선택과 결정과 욕심에도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위에 세우라

하나님이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날이란 없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요셉의 뜻과 전혀 무관하게 진행됩니다. 여기서 ‘그가’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그가 기근을 부르고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십니다. 그가 요셉을 감옥에 보내고 그의 손발을 족쇄에 묶고 그의 몸을 쇠사슬로 묶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의 말씀이 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단련이란 천 번 만 번 굽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외면하고 돌아보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엘리후가 ‘하나님은 인과법칙에 따라서만 일하신다’라는 말로 닫아 버리려는 세상을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라는 대답으로 날려 버리십니다. 인과법칙이 무효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은 그것보다 크시다는 것입니다. 질서가 필요하고 법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보다 크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과 현실과 희망과 잣대와 근거도 하나님 위에 세워야 합니다.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용서하시고 전능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 위에 세우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겪는 어떤 경우도 우리를 손해나게 할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의 나날들을 살고 있는 기독교 신앙인이 가지는 힘이고 현실입니다. 그 감사와 기적을 누리는 인생과 믿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겪는 나날들 속에서 자랑과 수치, 증명과 묻힘이라는 이분법밖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라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깊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축복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겪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축복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절대 흔들릴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의 믿음 없는 것을 주 앞에 고백하오니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인하여 모든 경우를 이기는 우리의 인생이 되도록 주 앞에 무릎 꿇는 신앙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영선의 욥기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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