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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박영선의 욥기 설교-박영선 목사

27. 하나님_너는 이것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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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8: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8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9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10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11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욥 38:1-11)



너는 내 말에 대답하라

여태껏 일어난 일들이 어떤 결론으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의도되고 인도되고 결말지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내 말에 대답하라’라는 말은 한마디로 ‘너는 누구냐’입니다. “너 내가 이런 것, 저런 것 할 때 보았느냐? 너 그것 아느냐?”라는 말은 하나님이 혼자 하셨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네가 당연히 알아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를 전문용어로는 수사적 반어법이라 하는데, 욥에게 ‘너는 여기까지는 올 수 없다’고 한계를 지적하는 말일 수도 있고, 당연히 알아야 하는데 뭐하고 있느냐고 꾸짖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알아야 하고, 너는 더욱 용감해야 하고 더욱더 발을 내디뎌야 한다’라는 뜻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창조의 주인공

‘너는 대장부로 부름을 받았느니라. 꼬리 내리고 도망가지 마라’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은 것을 알아야 하는 존재이다. 내가 이런저런 일을 하는 하나님인 줄 너는 알아야 한다. 욥아, 이것을 보았느냐? 욥아, 이것을 아느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이 이 무대의 배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따로 구별해 놓은 주인공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았느냐? 이것을 아느냐? 이것을 네가 했느냐?’ 하는 말로 욥을 구별해 놓고 있습니다. 욥을 창조 세계 안에 두시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의 대화자로 구별해서 친히 설명하시고 설득하십니다. 그를 대단한 존재로 취급하시는 것입니다. 욥이 당한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느냐에 대한 대답으로, 그는 다만 자연 질서의 한 부분이거나 거기에 속한 조그마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욥은 그것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땅의 주춧돌을 놓듯이 욥을 이 자리까지 오도록 허락하고 인도하셨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러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의 은혜와 성실하심과 능력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깨고 우리를 꺼내셨고 약속의 땅에 불러들여 축복하사 오늘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종이 아니라 아들

‘너는 다시는 야곱이 아니다. 너는 이스라엘이다. 너는 내게 빌고 내게서 빼앗아 가고 내게 구걸해야 하는 자가 아니다. 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씨름한 자다. 그 대접을 받은 자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씨름할 수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게 대답하라. 너는 야곱이 아니다. 너 하나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다. 너는 그것보다 크다. 너는 대장부니라. 너는 아버지가 한 일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야 한다. 너는 내 아들이다. 와서 빌지 마라. 가슴을 펴라. 머리를 들어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신앙이란 결국 이런 싸움입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의 싸움니다.

현세에서 소원을 다 이루길 원한다면 예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만들려고 하시는 것을 놓치게 되면 ‘다 그만두시고 살아생전에 이 조그마한 부탁 하나 들어주십시오’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이란 것은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엘리후는 바로 그 문제에서 틀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높고 그분이 만드신 세상은 이렇게 크고 너는 거기서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런데 뭐라고? 하나님을 만나 보자고? 이해할 수 없다고? 네 주제를 알라’라는 것이 엘리후의 발언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내 종이 아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을 다 알려 주러 온 너희의 친구다.’

욥기 38장에서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너, 이거 알아야 한다. 너, 이것도 알아야 한다.’ 아버지가 아들한테 하는 말입니다. 종한테 하는 것과 아들에게 하는 것은 다릅니다. 종에게는 시킬 일을 이야기하고 아들에게는 알아야 할 일을 가르칩니다.




하나님 아버지로 충분한 신앙

욥은 ‘내가 이제 아버지를 뵈옵니다’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주인을 뵙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뵙는다고 합니다. 이 말이 성경 말씀으로 설명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것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존재와 인생과 세계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3-14). 권력과 강요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대등해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반대말로는 증오도 있고 무관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사랑의 반대말을 동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정을 받고 결혼할 수는 없습니다. 대등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려야 하는 삶은 그런 삶이 아니고 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세상, 아버지의 뜻에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사람을 성격, 능력, 취향에 따라 취급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입니다.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모든 덕목이 여기서 나옵니다. ‘용서해라. 기다려라. 믿음을 가져라.’ 하나님이 아버지시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이 세상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고난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지는 것도 감수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최종 심판자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길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각자의 생각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과 형편을 하나님에게 믿고 맡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주신 하나님입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언제나 세상보다 더 많은 것을 손에 가져야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것들을 놓고는 못 살게 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은 얼마나 큽니까? 당연히 세상보다 큽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그 큰 것을 가지게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부르시고 붙드십니다. 도망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타협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순종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더 큰 세상을 살아 내겠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 혹은 우리가 욕심내는 것 모두 다 주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그리하여 위대하고 놀랍고 경이롭고 감사한 인생을 살아 내겠습니다. 그 삶을 살아 내는 우리 모두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