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풍성함
세상에서는 양심과 도덕이라는 관점에서 죄를 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를 이해합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리고 거부한 것을 말합니다.
구원은 단지 죽음 이후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생전에도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가 크고 깊은 설명을 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
죽음을 극복하는 원인은 자연에게서 제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이 자연법칙이 아니며, 여기에는 원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인간이 예외 없이 죽는 것은 죄의 결과이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고,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류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면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자유를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는 데에, 하나님을 거부하는 데에 씁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망에 이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죠. 쫓겨난 그들은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의 이름이 가인입니다. 그들이 붙여준 가인이라는 이름에는 우리가 아이를 낳았다, 우리가 생산한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 우리가 죽지 않았다, 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인을 보니 인간이 행사한 거부권, 하나님의 뜻에 대해 불순종한 거부권을 그가 DNA로 그대로 가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 가인은 동생을 죽입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는 이 일을 반복합니다. 서로 죽이는 현실 속에서 애를 낳습니다. 곧 생명을 낳는데 이 생명은 죽이는 DNA를 갖고 태어납니다. 일평생 죽이고 또 죽이며 자신 또한 죽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 이 인과법칙의 사실, 태어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주도하는 가장 큰 힘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역사에서 보듯 죽음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죽음을 빚어내는 죄가 가장 힘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죄가 생명을 만들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사망을 만들지, 생명을 만들지 않습니다. 생명은 하나님만 만드십니다.
구원, 하나님의 인격과 의지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렇게 죄와 사망과 생명이라는 세 가지 사실이 담겨 있는 역사라는 세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로마서가 구원을 설명하기 위하여 펼치는 배경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셨다,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셨다, 인간이 선택하고 자초한 멸망을 두고 보지 않기로 하셨다, 그래서 역사 속에 뛰어들어와 실제로 구원을 이루시고 예수로 완성하셨다, 라는 답이 제시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승리와 구원을 우리가 원하듯 보이는 컨텍스트로 주시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 곧 우리의 영혼과 인격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기계적 방법이나 규칙 같은 것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과 의지로 이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하시고 선택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자연주의에서 신앙으로 넘어가는 커다란 문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방법을 택하신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선택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인 우리가 선택한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가능성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어도 된다는 생각이죠. 인류 역사에 면면히 이어지고 반복되는 한탄과 탄식과 거부와 부끄러움은 언제나 우리 인간이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인류 스스로는 아무리 좋은 것으로도 명예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이 역사입니다. 멋있는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는 지켜 낼 능력이 없습니다. 멋있는 말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는 사람을 살리지도 생명을 부여하지도 못합니다. 무능한 인간의 현실을 확인하게 될 뿐이죠. 힘이 되기는 해도, 고함이 되기는 해도, 말을 하는 것으로는 명예롭게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지성은 멋진 것이고 지위는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들이 사람을 진실로 위대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위대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위대한 것은 그 무엇이다’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 그 위대한 것을 만들지는 못한다’며 인간의 현실을 지적합니다. 세상은 위대한 것을 만들 수 없습니다. 모든 위대한 것과 가치 있는 것은 하나님과 결부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고마운 하나님의 사랑
돌로 떡을 만들라고 하는 사탄의 시험에 대하여 예수님은 사람은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 떡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은 그 이상의 존재다, 그것 때문에 내가 왔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해결사가 아니다, 너희의 안목과 수준에서 일을 해결하는 정도에 그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상상하지 못하는 높고 귀하고 크고 위대하고 거룩한 뜻을 갖고 일하신다, 라고 답하십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
보이는 것의 싸움이 전부인 줄 아느냐, 진짜는 거기에 무엇을 담느냐의 싸움이다, 라고 답하십니다.
사랑은 환상이 아니며, 능력이 아니며, 열정이 아니라고 합니다. 환상, 그것이 인간에게 최고의 내용이 아니랍니다. 능력,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인간의 가치는 능력 같은 것으로 쉽게 채울 수 있는 정도가 아니랍니다. 열정, 열정이 인간의 영혼과 인격을 채울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은 이보다 큰 존재라고 합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예수가 이것을 위해 오셨습니다.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이라고 예수님께서 단단히 가르치셨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다니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위대해지는 것입니다.
무가치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죠. 성경은, 네 마음에 안 드는 그 사람을 존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 앞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너, 그 사람을 존중해라, 내가 그를 만들었다, 네가 내 앞에서 귀하듯 그도 내 앞에서 귀하다, 그러니 너는 그 사람에게 잘해라, 너는 멋있게 굴어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이란 세상이 만들어 내는 것들과 다릅니다. 자연주의에서 나온 모든 가치, 우리가 알고 있는 능력, 대의, 유용성, 윤리, 승부, 이런 것들과 얼마나 다릅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으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십니다. 죽으신다고 말로만 약속하거나 각오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피 흘려 죽으십니다. 피 흘려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를 위해서 피 흘렸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 것입니다.
‘나’로 ‘오늘’을 살라
그렇다면 윤리니 도덕이니 노력이니 하는 것들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일이 구체화되고 그렇게 구체화되어야만 비로소 우리가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길을 열어 놓고 기다리십니다. 우리로 그 길을 걷게 하십니다. 그것이 역사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오늘밖에 살지 못합니다. 내일을 당겨서 살 수 없고 어제를 반복하여 살 수 없습니다. 오늘이 없으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는 오늘이라는 구체적인 영역은 시간이 있어서 가능합니다. 오늘은 어제와 내일이 없으면 없어집니다. 어제 한 일이 오늘에 영향을 미치고 오늘이 내일에게 결정타를 가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오늘을 삽니다. 이 시간과 공간 속에 매여서 ‘너’가 아니고 ‘그’도 아닌 ‘나’로 삽니다. 그래서 내 자리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당대의 규칙, 원칙, 시간, 공간과 정황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릇이 없이는 담을 수 없는 것같이 시간과 공간과 정황과 오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자체가 내용은 아닙니다.
담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나는 그때 내가 내몰린 자리, 그때의 정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그 수고를 어디에 어떻게 담아 내실지는 하나님 손에 있다, 나는 오늘을 산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내일 아침에 하나님이 나를 깨우면 살 것이요, 아니면 주 앞에 서리라, 입니다.
보라, 누리라, 사랑하라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이 가진 신앙적 장렬함, 현실적 단단함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단단함 속에 하나님이 무엇을 담으시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 안에 무엇을 담았는가를 보십시오.
성경은 그렇지 않다, 예수 안에서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제일 크시다, 하나님이 죽음을 뒤집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선택한 것이 무엇인지 보라고 그렇게 하십니다. 왜 이 무서운 것을 보게 하실까요? 너희가 선택한 것이 무엇인지 보라, 그리하여 너희에게 준 자유의 진정한 가치와 긍정적 특권을 누려라, 너희가 누려라, 너희가 선택하여 네 것으로 가져라, 그렇게 요구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죽은 후에 천국 가기 전에라도, 지금 당장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어느 부분에서든 달라져야 합니다.
사랑하세요. 그리고 사랑을 받으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넉넉해지기 바랍니다.
기도
못난 자리에 서지 말고, 살리고, 품고, 나누고, 주고, 주의 크신 이름으로 자랑하는 인생 되게 하사 우리를 만나는 이들은 예수 안에 있는 이 생명을 나누는 기쁨과 기적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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