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 15:1-7)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는 인생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는 권면에 이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윤리는 독립되어 존재하는 가치가 아닙니다. 남을 비난하지 않고 그 사람의 약점을 짊어지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진리에 근거하여 주어지는 권면입니다. 우리가 이런 고급한 윤리를 따르는 것은 윤리 자체의 가치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윤리적 행동은 우리가 가진 신앙을 표현한 것으로, 믿는 바를 드러내는 순종의 행위인 것입니다.
은혜를 구체적으로 누리는 인생이라는 것은 우리가 선택한 타락에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 없는 세상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예수를 만나, 이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여,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구원을 누리는 데에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구원은 이미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는데 태어나기는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거기서부터 출발하십니다. 역사 속에서 이미 완성하신 구원이 각 개인에게 구체화되도록 현실화시키십니다. 사람마다 죄인으로 태어나 하나님 없이 살다가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것과 세상이 만들어 내는 것의 분명한 차이를 보며,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의 영광과 궁극적 목적을 예수 안에서 확인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인생은 내가 선택한 만큼 책임을 지거나 보상을 받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비참한 삶에서 빠져나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된 것을 누리는 영광의 삶이며,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계속해서 인류를 부르시는 구원의 역사(役事)를 펼치고 계십니다. 이 일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계속될 텐데 여기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짐을 서로 지라
매사를 잘한 사람과 잘못한 사람, 옳고 그름, 유익함과 무익함 등으로 쉽게 둘로 나누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런 구별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대할 때에는, 저 사람이 지금은 틀렸지만 그 잘못으로 끝은 아니다, 내가 이번에는 옳았지만 이 옳음이 전부가 아니다, 이런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달으라고 합니다.
옳고 그름이 전부가 아니며,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전에 그리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인류가 하나님 앞에 거역하고 멸망을 자초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기다려 주시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일하고 계시니 지체 중 누가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그 짐을 나눠서 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짐을 서로 지라’는 말씀은 동료가 되라, 이웃이 되라, 가족이 되라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과 달라요”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감수하십시오. “저 사람은 우리 형제입니다. 우리 친구입니다. 우리 교인입니다”. 이렇게 짐을 함께 지라고 합니다. 짐을 함께 지는 자리로, 그들의 동료로 보냄을 받은 것이니 비판하지 마라, 정죄하지 마라, 그들의 약점을 담당하라는 말씀입니다.
연약한 자를 세우시는 권능은 하나님께 있다, 용서와 기적과 구원은 하나님께 있지 않느냐, 그러니 네가 심판하려 하지 마라, 너를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 옆에 보내신 줄 알고 들어가라, 그 옆에 서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갈라디아서 6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우심과 고쳐주심, 그리고 하나님의 베푸심을 위하여 서 있고 또 이 일에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자랑을 말합니다.
처한 현실과 상황 바깥에서 서서 심사위원이나 해설자 역할을 하지 마시고 들어가 그 팀의 일원이 되십시오. 한국 축구가 지거든 같이 우십시오. 내 그럴 줄 알았어, 이런 말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신자가 현실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성경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명령에 담긴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을 보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
세월을 아끼는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는 문제 곧 날마다 ‘오늘’을 사는 문제입니다. 오늘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어떤 날입니까? 반복되는 일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별별 일이 다 생기는 인생의 무대입니다. 신자의 인생이든 불신자의 인생이든 다를 바 없는 먹고 살기에 바쁜 일상, 그것이 바로 오늘입니다. 이 오늘에 별의별 일이 다 생깁니다. 가정에도 끊임없이 일이 터지고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간혹 뜻밖의 행운이 생기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또한 오늘은 내가 준비하지 않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곳으로 나를 보내시는 날입니다. 어느 나라에 태어나고 어떤 신분과 처지 속에 사는가는 하나님이 정하셨고 우리를 그리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감수하지 못한 채 왜 이런 현실이 벌어졌는가, 왜 이런 조건과 정황을 주시는가, 라고 답답해 하기 때문에 술에 취하여 시간을 흘려보내게 됩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에베소서의 말씀은 시간을 헛되게 흘려보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허송세월하지 말고 고민하라는 것입니다. 고민하면 지혜를 얻게 되고 답을 얻게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고민하여 죽어나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도망가지 않고 거기서 죽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지금 있는 자리가 성령이 이끄시는 자리, 성령이 함께하여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그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우리나라에 쓸 만한 사람이 없더라도 여러분 하나 있으면 되는, 그런 괜찮은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보냄 받은 우리 자리
그런 이웃과 함께 있는 그곳이 하나님이 일하시기 위해 여러분을 보내신 자리입니다. 여러분과 이웃을 그렇게 묶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서 그 짐을 감수하십시오. 어떻게 감수할 수 있을까요? 답이 없는 인생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는 정말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을 겪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일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피차 복종하라는 것은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어려워졌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 인생으로 여기고 살라는 것입니다.
묶으심에 붙들려
늘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하지만 그 속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먼저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로서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허락하셨기에 그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보았고, 그 은혜를 입었고, 그 명예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로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나를 묶겠다는 순종을 하십시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기를 다짐하십시오. 못 참겠으면 한강에 가서 고함 한 번 지르고 오십시오. 그리고 돌아와 다시 그 짐을 짊어지십시오.
할 수 있는 만큼 하십시오. 할 수 있는 만큼도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오늘 하루를 제대로 살아 내지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때만 밀고 결벽만 떨다가는 실제로 멋지게 살아 내는 일은 못하게 됩니다. 우선 여러분 옆에 있는 이웃에게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일, 따뜻한 눈으로 이웃을 격려하는 일부터 하십시오.
왔다 갔다가 전부인 인생, 그것이 아브라함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사람들이 그런 아브라함을 보고서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삶에도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무엇만 하면 됩니까? 왔다 갔다만 하면 됩니다. 예수가 보이신 길로,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지는 것 같고 망하는 것 같은 십자가의 길로 하나님이 은혜를 담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다행한 말씀입니까? 어느 수준 이상이 되어야만 이 은혜를 담을 수 있다고 기준을 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그러니 마음 놓고 사십시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감사하며 피차 복종하십시오. 여러분 삶의 모든 조건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주도권에, 예수로 말미암아 인류와 역사의 운명을 자신에게 묶으신 능력에 붙들려 있음을 기억하시고 이를 살아내는 기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신비이며 능력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으니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며 자랑하고 찬송하는 영광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