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25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27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29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3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32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롬 15:22-33)
바울의 사명과 고민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가 모두 예수 안에서 동등하게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선민과 이방인
선민과 이방인을 구별한 것같이 하나님은 우리 인생도 선인과 악인,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잘난 자와 못난 자로 나누고 계십니다.
선민의 특권이란 무엇일까요? 유대인은 선민이 되어 무슨 복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은 무엇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이방인은 자부심도 없고 편견도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생각 없는 역할을 맡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잘난 척하면, 이방인들은 ‘저게 뭔가’하는 눈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방인들은 “너희가 그렇게 자부심이 있느냐. 우리는 편견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방인에게는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것에 상응하는 다른 자랑은 없었습니다. 그저 살기 바빴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진 선민으로서의 자랑은 하나님이 무엇을 위하여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까?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하고자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방에게는 안 주시고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약속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다 지키심으로 당신이 신실하시다는 것을 선민에게 충분히 증명하셨습니다. 이것이 선민이 누린 혜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구별하여 저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저들에게 약속을 주셔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을 선민으로 택하셔서 하나님의 분명하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고자 했냐 하면, 이방 곧 약속을 받지 않고 특별한 관계 속에 있지 않아 마치 외면당한 것 같은 이들에게도 다 복을 주시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긍휼과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임을 보이시려 했던 것이죠. 선민과 이방의 차별이 우리에게는 옳음과 그름, 잘남과 못남의 구별로 다가오지만, 하나님은 선민에게는 하나님의 분명하심을, 이방에게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분명한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배타적 우월감 속에 있는 것은 그가 못나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한 은혜와 자비로 주신 복을 받은 사람들이 무책임하고 게으르게 된 것도 그들이 못나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과 이방인의 구별을 통하여, 하나로는 다 드러낼 수도 다 담을 수도 없는 당신의 분명하심과 무한하심, 약속에 신실하심과 은혜 베푸심을 인류 역사에 보이셨다는 것을 로마서는 말하고 싶어 합니다.
세잔의 사과
세잔은 자기 아내의 아름다움을 인간이 가진 기술로는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기법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아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상상하게 하여 인간의 기대와 완성의 경계를 넘어가기를 원했던 것이라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시편 8편에서 인간의 모습을 세잔이 그린 초상화처럼, 인간이 상상하는 최고의 모습으로 인간을 그리지 않고, 그것보다 조금 못하게 그림으로써 우리가 소원하는 가장 멋진 것을 넘어서도록 우리를 자극하는 증언인 것입니다.
윤리적 결함이나 기능적 무능력이나 심리적 불안에 절절매는 우리에게 이것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르치십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하지 마시고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기 바랍니다.
배역을 감당하라
유대인이 자기네가 선민이라고 이방을 개로 여겼던 잘못을 되풀이 하지 마시고 이방까지 은혜로 품으셨던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잘났다면 그 잘남을 다른 이들을 위하여 사용할 줄 아는 자리까지 가십시오. 여러분의 잘난 것이 배타적 우월감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이 다른 이들을 먹이기 위해 여러분을 키우셔서 그들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 중에 그 누가 하나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방해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지 않고 당신 혼자서 일하시는 것이 백 번 유리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용하면 하나님은 천천히 걸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한테 다 가르쳐 주고자 하시면 아마 우리의 뇌가 터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강제로 하시면 우리는 비명 지를 것이 뻔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와 일하시겠다고 합니다. 보잘것없는 우리를 갖고서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다 드러내시지 않고 우리만큼만 갖고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매일 확인하게 됩니다.
맡은 배역에 충성하십시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만큼 하십시오. 잘못했을 때는 후회할지언정 거기서 돌이켜 하나씩 더 나아가게 된다면 도리어 그 실수가 우리 인생에게 주신 복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살아보고 해 보십시오. 그래서 나아지십시오. 후회하고, 성찰하는 것 속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못난 짓밖에 한 것이 없는데도 훌륭해지는 것, 이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분명함에서 넉넉함으로
사랑은 하나님께 충성하여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강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넘치는 실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저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셨다, 하나님이 그를 내 옆으로 보내셨다, 그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신다, 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 다물고 사는 것입니다.
아무 쓸모없이 보이는 저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러니 너는 네 일이나 해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놀라운 기적, 가장 극적인 반전은 죽음을 뒤엎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도 포기하지 않고 아무도 저주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분명함을 상대방과 나를 배타적으로 구별하는 데 사용하지 말고, 넉넉해지는 수단으로 그것을 사용하십시오. 그 분명함이 모두를 포용하고 모든 것을 감수하게 하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라는 이 말이 모두를 참아낼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보이십시오.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하면 분명함 속에서도 충성과 헌신, 그리고 관용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현실이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충성할 수밖에 없고 누구와도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현실과 정답 사이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방향도 없고 목적지도 모른 채 다만 명분만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지가 분명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길로 나아가면서 우리가 선택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아직 실력이 없어서 ‘용서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용서하지 못할 때 무슨 결과가 생기는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보복해서는 아무런 답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를 욕하는 것으로는 영혼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인생에서 실컷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우리의 영혼에 답이 되고, 우리의 인격과 인생을 감사하게 합니다. 성경의 요구는 다만 강요나 다만 윤리적 당위가 아니라, 실재하는 진리입니다. 그 때문에 성경이 우리에게 권하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따라야만 합니다.
이 사람만 내 옆에 있으면, 숨을 쉴 것 같다고 여러분의 이웃이 떠올리는 그런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복된 자리를 지켜내고 이 시대를 구원해 내십시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의 억울함과 비참함과 고통과 절망을 말씀으로 위로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로 채워 주실지 성경에 약속이 가득합니다. 이 일을 예수로 증거하셨고 우리 각자의 생애에서 확인하게 하셔서 오늘 우리가 이 길을 걷습니다. 살아가면서 말씀의 위대함을 배워 하루씩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결국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찬송하는 인생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그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와 우리 가족과 이 사회와 이 시대와 이 세상을 구원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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