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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다시보는 로마서-박영선 목사

42.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_이웃,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라 / 4부 그러므로 형제들아(12:1-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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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14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6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21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2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롬 14:13-23)





배타적 자기 확인을 넘어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이 배타적 비판과 정죄로 자기 확인을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저건 아닌데’ 싶은 것도 아닌 채로 끝나지 않으며, ‘이렇게 해야 맞는데’라는 답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이 주께 있습니다. 이미 잘된 것을 더 잘되게 하고, 실패했던 것도 역전시킬 수 있는 권능이 주께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아는 것같이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잘못된 것 같다고 해서 그것이 끝장났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강력히 권면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서는 안 됩니다.

너희는 상대방이 오해할 일은 하지 마라, 상대방이 걸려서 넘어지게 하는 시험은 만들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말이 안 되는 세상 속에서

그들을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을 믿고 기다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교회는 그들을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컨텍스트가 계속 이어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이끄실 것입니다. 예후와 하사엘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이었듯 말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텍스트를 담는 일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성도들의 책임입니다. 신자 개인이 컨텍스트에 어떻게 기여하느냐는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신자가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웃 앞에서 텍스트를 담아내는 역할입니다. 즉 남아 있는 칠천 명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면할 수 없는 모든 교인의 책임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배타적으로 확인하여 ‘나는 너와 다르다’로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존재인 우리야말로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예수 믿게 되기를 소원할 만큼 예수 믿는 일에 자신이 있다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들이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하지도 않으면서 예수 믿으라고 고함만 지른다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세우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해야 하며, 그 하나님에게서 세움을 입는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보여야 합니다.

윤리나 도덕으로 하지 마시고 사랑으로 하십시오.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지는 것이며, 상대를 위하여 기다리는 것이며, 양보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랑의 짐을 지는 것 때문에 신자의 인생은 고단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의 인생이 여전히 고통스러운 이유는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웃의 짐을 지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양보하고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못난 자들, 대적하는 자들, 말이 안 되는 사람들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있어서 우리의 이웃이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들도록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말이 안 되는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있어서 누군가는 흙탕물을 밟지 않고 나를 딛고 걸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자녀의 영광의 자유

피조물들이 이처럼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는 단순히 무엇을 선택하는 권리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생명이 마음껏 크는 것, 아름다움이 충만하고 자랑과 기쁨이 가득한 거룩한 자리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조물들은 이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우리는 이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을 자유롭게 시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생긴 자발성으로 예수를 뒤좇아, 기꺼이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간 것처럼, 내가 사는 이 시대의 현장과 이웃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보듬어 안고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경쟁하고 후벼 내고 정죄하고 꺾어 넘어뜨리는 존재가 결코 되지 않으리라, 말이 안 되는 상대방의 원망과 공격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움에서 나오는 넉넉함으로 다 쓸어 담으리라, 하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것이 바로 명예일 것입니다.

기다리시는 하나님, 양보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손해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입니다. 여기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누구에게 떠밀려 할 수 없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랑은 하나님이 그런 성품을 가지신 위대한 인격자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기다려 주실 수 있는 분, 용서하실 수 있는 분, 우리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믿음 안에서 아무래도 좋은 인생

어떤 컨텍스트라도 좋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개혁주의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앙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이해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어제 깨닫고 결심하고 행한 것으로 완료되지 않는다, 매일 다른 하루 속에서 오늘의 신앙으로 사는 이것이 개혁주의입니다. 어제 깨달으셨습니까? 오늘이라는 그릇에 다시 그것을 담아내십시오. 오늘 담으셨습니까? 내일은 내일 또 담아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입니다. 단번에 다 뜯어 고치자는 그런 간단한 구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루를 더 살게 하셨다면, 하루만큼 더 담으십시오. 나는 이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런 훌륭한 일을 했다, 이런 것은 다 잊으시고 오늘 깨달은 것을 오늘 담고, 오늘이 연장되는 내일이라는 시간, 더 나아가 세월이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여러분이 아는 텍스트를 담으십시오.

그러나 이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겪은 모욕과 실수를 감내하고 용서하고 극복하리라고 결심했더라도 그 다음날이 되면 어제의 똑같은 결심을 반복해야 합니다. 내가 용서하고 보복하지 않기로 했다고 해서 컨텍스트가 바뀌지도 않습니다. 어제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철없는 것들의 모욕과 무례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다만 힘만으로 장악한 컨텍스트에 의지하여 세력을 잡은 자들의 말도 안 되는 차별을 다시 감내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일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선을 행할 때에 낙심할 만큼,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 갈 6:9-10절은 시사합니다. 그래도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합니다. 물론 원하는 보상을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체가 위대한 일임을 알지 못한다면 신자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만 참고 다만 희생하는 것이 전부라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라고 합니다. 영광의 자유, 자발적 선택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에게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가를 배우게 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무래도 괜찮다’라고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나에게 편한 이웃만이 내 이웃이 되는 그런 조건은 원하지 않아. 내게는 더 이상 그런 구별이 없어졌어. 나는 어느 누구라도 이웃으로 해서 살 수 있어. 감옥이면 어때? 여기에도 내 이웃은 있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여기 있어. 그러니 나는 여기서 살아도 돼. 이제 나는 어디라도 괜찮아”. 이것이 바로 “아무래도 좋아”입니다.

여러분,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이웃에게 가서 까다롭게 굴지 마십시오.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긴 설명을 늘어놓지 말고, 가서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기 바랍니다. 같은 배를 타고 있음을 알게 하십시오.

“아무 데라도 상관없어. 아무래도 괜찮아”라고 고백하는 이 명예와 자랑이 여러분의 인생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존재와 현실과 우리의 한계에 대하여 우리는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신 것같이 우리를 보내시는 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그 명예로운 인생을 살겠습니다. 그 기적의 자리에 들어가겠습니다. 순종하고 기다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웃고 따뜻한 존재로 서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