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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다시보는 로마서-박영선 목사

37.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_권세, 본문이 펼쳐지는 무대 / 4부 그러므로 형제들아(12:1-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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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5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롬 13:1-5)



이 말씀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에 이어서 등장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선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행할 것인가, 하는 맥락에서 ‘권세에 대한 복종’이 등장한 것입니다.

성경은 권세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선을 구체적으로 행할 것인가’의 일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갈 4:4)



‘때가 차매’란 무엇일까요? 전후(前後)가 있고, 선후(先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맥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성육신도 구약 역사를 염두에 두어야 그 의미가 정확해집니다. 예수의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 문맥이 없이 다만 ‘예수가 오셨다’라고만 말하면 이 말에 어떤 의미가 담긴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건의 맥락은 시간의 전후 관계뿐만 아니라 공간적 틀에 따라서도 형성됩니다. 공간적 틀이란 무대나 그릇에 비유할 수 있는데, 구조, 체제, 조직, 관계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로마서 13장에서 말하는 권세입니다. 그래서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며, 권세를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말은 이렇게 이해됩니다. 모든 컨텍스트는 내가 만들었다, 그러니 이 안에서 너희가 텍스트를 담아내라, 이런 말씀 말입니다.



컨텍스트의 의미

제가 말하는 컨텍스트는 문맥일 뿐만 아니라 그릇이기도 하고 무대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습니다.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성전에서 뛰어 내려라, 내게 절하라와 같은 시험들이었는데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시험들은 모두 ‘컨텍스트 속으로 들어오지 말고 컨텍스트 밖으로 나가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요구에 대해 ‘그리하지 않겠다’는 것이 예수의 대답입니다. 마귀는 지금 예수의 성육신을 무위(無爲)로 돌리고자 합니다. 컨텍스트 밖으로 나가라, 곧 한계를 벗어나라는 유혹도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성육신이란 무한(無限)이 유한(有限)속에, 제한된 컨텍스트 속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신앙생활을 하라는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산 제물은 삶으로 드리는 제사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것이지, 특정한 임무가 삶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삶이라는 컨텍스트 속에 우리가 믿고 고백한 텍스트를 담아 구체적인 것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컨텍스트를 바꾸는 것으로 텍스트가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컨텍스트는 그릇일 뿐, 여기에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내용은 우리입니다.

우리의 무엇이 내용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생명, 이제 알게 된 진리, 예수 안에 있는 자유가 내용입니다.

네가 한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라, 네가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라, 너는 역할을 맡은 배우다, 너는 네 길을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네 앞에 분명하게 주어진 네 길을 걸어라, 네 자리를 지키고 네 삶을 살아라, 그 삶은 단지 한계와 제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서 분명하고 구체적인 존재가 빚어진다는 것입니다.

각 개인이 겪는 이런 일들은 어디에서 벌어질까요? 우리가 태어나서 맞이하는 사회,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시대, 관계, 지위 속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들어 있는 이 컨텍스트 말입니다.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같은 것들은 그 자체로 정의나 진리의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담아내기 위하여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고 그분의 지혜로 허락하시는 컨텍스트인 것입니다.



텍스트를 담기 위한 컨텍스트

 

서구가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자랑하여 다른 나라나 민족들을 폄하하지 않겠다는 반성 속에 ‘문화’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화’라는 단어에는 어느 나라를 다른 나라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겸손한 자세가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문화라는 단어를 만들어서 문명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류와 현실을 담아냈다면, 이제는 나아가 이 단어를 사용해 문장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문장을 만들어야 드디어 사상(思想)이 담깁니다. 사상은 사랑, 진심과 같은 말을 쓴다고 해서 담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컨텍스트가 없이는 텍스트를 담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컨텍스트가 없으면 삶이 구체화 될 수도 없고 텍스트를 담을 수도 없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라는 컨텍스트

 

돌아보면 지나온 과거가 우리 마음에 흡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를 통해 배우게 된 것이 있습니다. 지도자나 백성이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빨리 답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들이지 않고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유능함이란, 행운과 불운에 좌우되지 않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분별을 의미합니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느냐,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아는 것이 바로 유능함입니다. 옳은 말을 하는 것으로 전부가 아닙니다.

뒤집을 수 없는 과거와 지금 우리의 현실을 감수해야 극복이란 것도 할 수 있습니다. 뒤집는 것으로 다가 아닙니다. 한 면이 익어야 다른 면으로 뒤집을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준 컨텍스트 속에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또 무슨 변화를 겪을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의 짧은 인생 속에서도 남의 나라의 지배 속에 있다가, 해방을 맞고, 6.25를 겪고, 4.19를 겪고, 5.16을 겪고, 군정을 겪고, 10.26을 겪고, 12.12를 겪고, 5.18을 겪었습니다. 이제는 달력에 아무것도 아닌 날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컨텍스트입니다. 그 속에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바랍니다.



깨어 있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는 그날까지, 주께서 오시는 것을 완성하거나 주께서 오시는 것을 예비하는 컨텍스트는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는 본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본문입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밭 갈고, 맷돌질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런 컨텍스트 속에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이 컨텍스트를 끝내실 것입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고 나아지는 것 없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을 잘하면 더 나은 세상이 되고 더 좋은 인간이 되고 인류와 역사가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장담할 수 있는지 묻고 싶으십니까? 아무리 예수를 잘 믿는 부모에게서도 자식은 여전히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부모보다 나은 아이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 자녀도 자기 인생에서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도 나중에 “결국 이거였어”라고 깨닫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예순 일곱 정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인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한 채 컨텍스트를 바꾸어 자기 편안하고자 하는 싸움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생은 이런 식으로는 답을 얻지 못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깨어 있으라, 무엇이 텍스트인지 알라, 너희에게 주어진 컨텍스트와 텍스트를 혼동하지 마라, 컨텍스트 때문에 네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 컨텍스트만 고치려 들다가 끝날 인생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이 텍스트인지 아는 것을 말합니다. 텍스트를 어디에 담는다고 했습니까? 컨텍스트에 담습니다. 컨텍스트를 무시하지 마시고, 컨텍스트를 텍스트와 혼동하지도 마십시오. 그래서 이런 권면이 나옵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합니다. 세월은 넘어가면 끝이 아닙니다. 그릇에 무엇을 담듯이 지나가는 세월에 채워 보내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저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는 것으로, 허송세월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술 취하면 의식을 잃습니다. 필름이 끊긴다고들 하죠. 하나님은 여러분더러 삶의 모든 순간에 정답만을 말하고 언제나 유능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전지전능한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사람이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경우에서 여러분의 실력으로 부딪쳐 살아내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은혜를 받으십시오. 우리가 누구인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거기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은 거기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조건도 우리로 실패하게 하거나 절망하게 하여 우리를 끝장낼 수 없습니다. 그런 컨텍스트는 없습니다.

기도



우리에게 주신 조건 속에서 걱정하며 염려하며 탄식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산 오늘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위대한 하나님의 증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