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롬 12:3-13)
은혜를 받은 자답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란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그 은혜를 가리킵니다. 이런 자비하심 속에서 권면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얼마나 오랜 세월에 걸쳐 이 구원을 이루셨는지 보았다, 또 너희는 하나님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역사하셔서 이 구원을 이루셨는지도 보았다, 너희 인생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이다, 그러니 너희는 그런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이란, 신자답게 살자, 옳은 일을 하자, 쓸모 있게 살자와 같은 구호와 개념에 붙들려 사는 삶이 아닙니다. 이 삶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던 인간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르렀다, 이제는 죄에서 해방되고 의의 종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따라가 보라, 이런 요청인 것입니다.
못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어떻게 대접하셨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시고 기다리시고 달래시고 그들을 놓아두지 않으셨는지, 그러면서도 당신의 거룩하심을 결코 타협하시지 않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 세상이 담아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음의 한복판을 깨고 지나가는 방식으로 당신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을 보았으니, 그분이 목적하시며 우리에게 살아보라고 하시는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여 죽으러 오신 하나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신이 정말 있다고요? 이를 어디서 확인합니까? 우리의 신앙고백 속에서 확인합니다. 우리가 믿어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날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서 은혜를 알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허락하신 각자의 삶
12장 3절이 우리의 한계를 지적하는 동시에 우리 삶의 구체성을 표현해 주는 구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각각 자기 자신의 삶을 살라, 네 인생을 다른 사람의 삶을 구경하듯 살지 마라, 삶이란 각자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각자 살아 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너’가 아니며 ‘내가’ ‘너’일 수 없는 것이 한계가 아니다, ‘나’는 ‘나’일 수밖에 없는 구체성으로 성경의 이 약속을 자신과 자신의 인생에 채우고 경험하고 누리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걷는 길에서 그 영광을 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나열된 것은 전부 어떤 한계를 나타내는 말들입니다. 하나님이 각각에게 주신 구체성을 살아 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구체성 곧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나, 누구의 남편이고, 누구의 아내인 자기 자신의 삶, 바로 이 삶을 살아 내십시오. 이것이 복이고 영광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거대한 명분 같은 것에 걸쳐 두는 바람에 정작 내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자기 자리, 자기 인생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더 우월해 보이는 존재와 자신을 구별하고 경쟁하느라 실제로 살아 내는 일은 뒷전인 그런 길을 가지 마십시오. 모두가 특별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모두가 특별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넉넉하지 않으면 감사는 나올 수 없습니다. 감사는 쥐어짠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넘쳐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만족해야 할 수 있죠.
성경은 “너, 이겨야 해”라고 말하지 않고 “괜찮아, 너, 충분하다”라고 말합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십시오. 그것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은사의 핵심
모두가 똑같은 은사를 받지 않는다, 모두가 똑같은 조건 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괜찮다, 각각 자기의 조건과 은사가 교회에 유익이 되게 하라, 모두에게 유익이 되게 하라, 그리고 너 자신에게 유익이 되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더 큰 은사란 더 큰 능력이 아닙니다. 더 크게 유익이 되라는 뜻입니다.
담담하게 지켜내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를 영어로 하면 ‘Love is long-suffering’입니다. 오래 참는 일, 오랜 고통입니다. 왜 고통스러울까요? 쟤는 왜 저러나, 저 사람은 왜 있나와 같은 생각이 고통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도 하나님이 만드셨으니 하나님 손에 맡기고 내버려두라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내버려둬라, 하나님이 너를 만드셨고 지금 너에게 주신 조건이 너에게 최선이다, 그러니 못났으면 못난 채로 살아내라.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못합니다. 못났으면 경멸을 감수해야 하는데, 이것이 어렵습니다. 나에게 쏟아지는 경멸을 감수하고 스스로의 무지를 감수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모든 은사의 핵심은 하나님이 나 같은 것도 불렀고, 나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아는 데에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한계를 알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으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일이라고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붙잡을 수 없다면, 우리가 원하는 다른 지위, 다른 조건을 가진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 보면, 열등하고 못나서 불행을 겪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없어 불행을 겪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성공도 올무가 됩니다. 여러분도 얼마든지 실컷 보셨을 것입니다.
사랑이란 각각의 한계를 특권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타인의 부러움을 사는 저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아래에 있는 것같이, 항복이 안 되는 조건 속에 있는 나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나를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실제 존재한다, 그러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리라, 이렇게 마음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하려는 이야기입니다.
선택받은 특권을 누리는 삶
그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 견뎌야 합니다. 성공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을 실패를 통해서 얻습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고서 누가 겸손을 배우며, 인내를 배우며, 속이 깊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영광은 다만 고난을 극복하는 삶에 있거나 고난이 없는 무사태평한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영광은 고난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외적 고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한계로 말미암은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못난 것도 우리에게 유익을 끼칠 것입니다. 영광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이 영광은 지금껏 설명한 것같이 명분이나 도덕성이라는 가치가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는 자유입니다. 죄에게 굴복하지 않고 영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이 없이 살면서 세상의 시험과 위협 아래 걸어가는 길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조건, 우리의 상황,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신자 된 영광이고 특권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 삶에도 멋진 내용을 담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자랑은 져도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가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꺼이 죽음의 자리에 자신을 내어놓아서 세상은 예수가 졌다고 판정을 내렸으나 알고 보면 세상이 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 속에 예수님도 지는 인생을 사셨다는 사실이 빠져 있으면 우리는 절대 져주지 못합니다. 질 수 있는 사람이 결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보다 더 악착스러워집니다.
우리만이 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패배 속에서 부활 승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도 우리입니다.
이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세상이 행하는 모든 야비함과 더러움을 다만 기독교라는 명분으로 덮어씌워 진실을 가리게 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재난이 닥칠까요? 믿는 당사자의 영혼과 인격에 재난이 닥칩니다. 자기 자신에게 영광이 없으며 거기에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것을 빼앗아 우리의 필요를 채워야 할 만큼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필요는 하나님이 채워 주신다, 필요한 것을 이웃에게서 빼앗아 올 필요가 없다, 그러니 너는 더러운 말, 악의에 찬 말을 하지 마라, 너는 덕을 세우며 살아라, 은혜를 끼쳐라, 너는 가진 자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미치지 못하는 데서 멈추는 그런 타협은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는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 내가 원래 목적한 것으로 너희를 채울 것이다, 내가 내 아들 안에서 이룬 것으로 너희의 존재와 삶과 운명을 채울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러니 용서하는 자로 살고 은혜를 끼치고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된 특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