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5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6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롬 13:5-7)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하는 권세
우리는 왜 이 꼴이냐고 말할 모든 문제가 우리의 현실, 컨텍스트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상황들이 아무리 억울하고 대책이 없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민을 가는 것으로 도망치지는 마십시오. 이 나라를 지키시고 함께 망신을 당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민도가 높아집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
예수의 성육신은 예수님이 컨텍스트 속에 들어오셨음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나라 역사에서 정말 당황스럽고 부끄럽고 실망스러운 현실 속에 있듯이, 예수는 당시 몹시 나쁜 컨텍스트 속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세계를 호령하던 시대에 예수는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피지배 계급의 한 사람으로 들어오신 것이죠.
예수는 컨텍스트를 취하시지 않고 컨텍스트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 속에서 모두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도록 하는 텍스트이기로 하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을 가지는 방법으로는 이 일을 이루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하십니다. 세상을 얻어야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사탄의 제안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는 세상을 취하시지 않고 세상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이처럼 컨텍스트와 텍스트는 다릅니다.
어찌 보면, 이삭은 어머니를 당황스럽게 하는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사라가 믿지 않았던 아이, 낳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아이인데, 그런 아이가 태어나 웃을 수 없는 집안에 웃음을 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언제 낳습니까?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되어서야 낳습니다. 왜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나이에야 이삭을 주셨을까요? 이삭은 아브라함이 만든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식을 왜 주셨을까요? 아브라함이 만들 수 없는 것, 하나님이 약속하고 하나님이 만드시는 후손을 하늘의 별 같고 바다의 모래 같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이삭 없이 그냥 하시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구체화되지 않습니다. 이삭은 구체화하기 위해서 주신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만들어서 그 자손이 생물학적 차원에서 번성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과 의지로 만들어집니다. 이제 이후 자손들도 같은 방식으로 하늘의 별 같고 바다의 모래 같이 번성할 것입니다.
“잡아라. 이 자식은 없어도 되는 존재다”.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이제 아브라함이 알아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잡습니다. 이삭은 원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삭은 이삭이라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없어도 될 존재의 현현(顯現)이자 텍스트를 담고 있는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텍스트만 있고 컨텍스트가 없으면 텍스트가 담길 데가 없기 때문에 이삭을 컨텍스트, 그릇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컨텍스트도 괜찮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독특한 지위, 그 독특한 컨텍스트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실 컨텍스트는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아무래도 좋다는 것은 컨텍스트가 우리에게 무작위로 주어지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허락한 지위는 하나님의 지혜와 은사에 의해 마련된 다양하고 특별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어떤 자리에 있든 하나님은 공통된 텍스트를 넣으실 수 있습니다. 그 텍스트는 바로 예수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텍스트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자, 더 나은 국가를 만들자, 라고 컨텍스트의 개선만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이렇게 텍스트가 없는 세상에서, 단지 분노하고 비난하고 보복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컨텍스트에 휘둘리지 않을 실력을 가진 사람은 오직 텍스트를 갖고 있는 이들뿐입니다.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도 하나님이 텍스트를 담아내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신자들만이 말이 안 되는 재난과 불행과 위기와 의심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철학은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규명할 숙제가 주어져 있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해 아직까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살아야 하는가, 죽어야 하는가에 대해 맹렬히 고민하고 있다, 는 정도에 이르렀을 뿐 답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답은 기독교 안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보다 더 굉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으로 완성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영광된 것이다, 이 일은 이루어질 수 있다, 창조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루시는 영광을 인간을 향한 목적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신비하게 간섭하실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답, 복음입니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살 이유를 찾지 못하면 죽어야 맞습니다. 사는 건 고난의 연장일 뿐이고, 모두에게 짐이 될 뿐이니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살아야겠다고 답을 찾았으면 살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찾아낸 그 이유, 살아가는 목적을 매일의 삶 속에서 채우며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컨텍스트를 개선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도 텍스트를 담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텍스트를 담으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셨듯이 죽음을 뒤집을 수 있는 기적을 우리도 누리게 하시며,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궁극적 승리를 우리를 통하여 구현하십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좋은 책이란 없습니다. 다 부질없습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하여 그 말씀에 담긴 약속의 명예로움을 알기 바랍니다. 이렇게 살지 않는 인생은 속는 인생입니다. 인생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로 부각되는 구원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유대인들을 욕하고 그들의 역사를 폄하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구약과 기독교 신앙의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진실이란 시간을 초월한 개념이 아닙니다.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반성하고 덧입혀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욕먹고 후회하고 그렇게 죽고 죽어 누적되고 누적되어 우리 다음 세대가 디디고 넘어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우리의 컨텍스트입니다. 우리는 텍스트를 가진 자이므로 이런 컨텍스트를 감수할 수 있습니다. 이를 감수해 내지 못하면 기독교라는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습니다.
컨텍스트를 바꾸어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살아 내어 모두에게 텍스트를 담아야 합니다.
세리 마태의 삶에 텍스트가 담기자, 그의 구원에 담긴 의미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컨텍스트가 훌륭해야 텍스트가 멋있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밭 속에 파묻힌 것이 보물일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밭에 버려져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보석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지위와 현실을 납득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고함밖에 지를 것이 없고 원망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굉장한 시대와 굉장한 일에 묶여 있는지 깨달으십시오. 그 속에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일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인생으로 사십시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의심과 배신과 조롱과 헛된 기대 속에서 자신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인류 모두를 위해 역사의 궁극적 완성을 이루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도 그렇게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아 힘을 내는 여러분의 인생과 존재와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우리가 당한 현실은 우리를 절벽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속에서도 일하실 수 있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니 안심이나 평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책임을 벗어던지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 시대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십자가의 길이고 성육신의 신비입니다. 그 삶을 사는 우리 모든 믿음의 식구들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시대가 싸매고 지고 가는 짐들이 마침내 커다란 승리로 돌아오게 하는 우리 인생과 시대가 되게 하옵소서. 믿음의 힘과 기쁨과 소망을 주셔서 힘써 그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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