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 서적/다시보는 로마서-박영선 목사

34.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_제한, 복을 이루시는 구체적인 조건 / 4부 그러므로 형제들아(12:1-16:27)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본문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 12:1-3)





구원으로 허락된 가능성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보았으니, 그러므로 이 허락된 구원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곧 삶으로 드리는 제사로 살아 내라는 말씀으로 귀결된 것입니다.

이어서 로마서 12장 2절에는 분별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 믿고 사는 인생이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과 어떻게 다른지를 다만 도덕성이나 기능으로 확인하지 말고 정체성과 명예로 확인해라, 떠밀려 살듯이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하지 말고 영광인 줄 알고 살아 내라고 합니다.

3절에서는 그렇게 사는 우리의 인생이 많은 제한 속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이미 허락된 구원, 이미 허락된 자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받아 광야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어떠한 구원을 받았는지 보았으니 너희는 내 백성이 되어라, 그 영광을 누려라, 내게 순종하고 내 약속을 지켜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소유, 곧 내 보물이 되리고 하십니다. 이루어진 구원과 허락된 은혜를 보전하고 되갚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영광을 누리며 살라고 하십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영광을 사는 것, 세상은 알지 못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책임이나 의무나 명분과 같은 값없는 것으로 이 영광을 가리지 마십시오. 거짓말을 안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정직하여 위로하고 격려하고 유익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과 우리에게 허락된 새로운 인생은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로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의도하신 영광스러운 삶을 예수로 말미암아 비로소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값싼 은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이루어진 것인가는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서 너무나 분명하고 너무나 크고 놀랍고 깊게 증언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거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새 생명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확인시켜 주는 대목입니다. 구원은 예수께서 정말 값비싼 대가를 실제로 치르시고 준 기회입니다. 목적을 기어이 이루시는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열심이 들어 있는 것이 우리가 받은 인생, 새 생명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두렵고 떨림으로’는 공포를 조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에게 준 구원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 얼마나 영광된 것인지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 단어들이 실체가 되어 각자의 인생에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변명하고 설명하고 과장하다가 실제로는 하나도 살아내지 못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예수께서 그렇게 죽어나간 인생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이 묻혀서는 안 됩니다.



구체성으로 주어진 제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예수의 죽음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런 죽음으로도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제한된 존재로 예수의 길을 따라갑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제한 속에서 살아가셨다고 이야기하는데, 예수를 따른다는 우리는 막상 이 제한을 벗어나 쓸모 있고 싶고,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선민일지라도 다른 이방에 비해 편애나 특혜를 입지 않았듯, 하나님은 그들을 시간 속에서 빚어내십니다. 거기에서 하나님 당신이 누구시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역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십니다. 다만 설명하시는 것에 그치지 않으시고 그 속에서 결국 구원도 이루십니다.

구약이 신약을 낳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약은 실패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이, 제사장 나라가 실패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은 구약을 무효로 만드나요? 아닙니다. 신약은 구약을 잇고 있습니다. 구약을 소용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약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자리를 드러냅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이십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의지와 무한한 은혜와 광대한 능력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가지고서도 일하실 수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신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그로 하여금 당할 수 없는 억울함을 경험하게 하시고, 죽음을 겪게 하심으로 목적하신 일을 이루십니다. 여기서 누가 빠져나갈 수 있겠습니까, 도망갈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와 영역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모두를 다 끌어안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시나 당신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순종하는 자리에 오십니다. 순종하는 자리란 제한의 자리를 말합니다. 신자의 가장 큰 병은 자신의 한계나 제한을 방해물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이 가진 모든 조건과 한계, 또한 소원만큼 주어지지 않는 능력과 기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볼 때 이것은 제한이지만, 하나님께는 이것이 제한이 아니라 구체성인 것입니다.

하나님, 여기서 다 죽어버리고 말, 아무것도 아닌 이런 자들을 위하여 왜 그 엄청난 이적을 행하셨습니까, 무엇 하러 열 가지 재앙은 내리셨습니까, 왜 구름기둥을 보내셨습니까, 왜 반석에서 물을 주셨습니까, 왜 사십 년 동안 만나를 주셨습니까, 하나님, 이들이 그토록 귀합니까, 이 바보들이, 이 못난 것들이, 하나님께는 그렇게 소중합니까, 라는 탄식이자 고백입니다.

우리는 총 인구수에는 계수되더라도 한 개인으로는 확인되거나 드러나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오천만 인구에는 들어 있지만, 누가 나를 알겠습니까. 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십 년의 광야 생활 동안 죽어 나간 사람들 중에서 여러분이 아는 사람은 과연 누구입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얼핏 보면, 이들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도매금으로 다루어 구원하신 것 같지만, 사실 하나하나의 인생을 각각 부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발언권을 가지지 못하는 익명의 지위로, 자기 자신도 납득이 안 되는 참으로 억울하고 연약하고 무능한 자로 사는 것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이 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여러분은 예수 믿는다는 말을 아직도 모르는 것입니다. 능력이 있어야 하고, 유용해야 하는 기능적 차원에서 자신을 확인하고자 하면, 하나님은 절대 확인시켜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늘 이야기입니다.



주어진 조건을 감수하는 삶

 

여러분에게 주어진 조건을 갖고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 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름으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재현해 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 우리의 실패, 우리의 무능까지도 다 합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예수 안에서 잘 해석해야 합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이고, 죽음이 부활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입니다. 겁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관계를 위한 독립된 인격’이라는 데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짓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복수로 등장하십니다. 우리의 지각으로는 다 이해하지 못할 굉장히 신비롭고 깊은 내용입니다.

혼자서 자기 할 일 다 하면 그것으로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인간의 정체성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개념이나 추상명사나 인격이 아닌 것에 묶여서 자신을 확인하면 아직 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둘이 갈 수 있느냐, 다른 사람과 함께 갈 수 있느냐를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자기 몫을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유일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 몫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자리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두 사람 몫을 할 수 없습니다. 각각 자기 일의 귀중함을 알고서 자기 짐을 져야 합니다.

힘든 것과 억울한 것은 다릅니다. 합창하면 힘은 듭니다. 그러나 명예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신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구원이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그 믿음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한계, 즉 여러분의 구체성을 감수하십시오. 한계는 결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여 자신의 자리를 지키시고 웃으십시오. 그다음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