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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다시보는 로마서-박영선 목사

33.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귄하노니 _산 제물, 삶으로 드리는 제사 / 4부 그러므로 형제들아(12:1-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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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 12:1-3)





구원으로 말미암는 기회


하나님이 인류에 대해서 가지신 목적, 의지, 그리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적 개입,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구원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이런 구원을 받았으니,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처럼 로마서 12장은 우리가 살아야 할 새로운 인생을 열어 줍니다.
앞서 설명한 구원이 이 덕목들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구원은 이미 완료된 것입니다. 이제는 구원을 받은 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기회와 영광으로 누릴 것인가, 아니면 못나게 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신앙적 실천이란, 한 사람의 마음에 신앙이 들어가서 그가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고 거기에 항복하여 스스로 그 길에 들어서야 가능한 것입니다. 강제력으로는 도무지 실천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예수가 너희를 위해 죽었으므로

누구나 멸망과 도망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비극 앞에 서 있음을 확인하고 이제는 죽었구나, 남은 것은 처벌밖에 없구나, 라고 생각하는 현실에서 ‘그러나’로 돌아서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는 죄인에 불과하며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지점에 서게 되는 것이 죄 고백입니다. 3장 21절에 나온 이 ‘그러나 이제는’은 이 비참한 인간 현실 앞에 서 있는 반전의 서막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러므로’입니다. 이 ‘그러므로’는 ‘네가 믿었으므로, 네가 변화되었으므로’가 아니라 ‘예수가 죽었으므로’입니다.

예수가 죽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죽어 네 신분과 운명과 지위를 바꿔 놓으셨다, 예수가 죽으심으로 네 죽음의 운명을 당신의 죽음에 함께 묻으셨다,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네 운명을 부활과 승리로 바꿔 놓으셨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라, 두려워하지 마라,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의 ‘그러나 이제는’으로 반전된 현실은 내가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러므로’ 앞의 조건은 예수입니다.
로마서에 나온 ‘그러므로’는 무엇을 근거로 하며, 무엇을 조건으로 합니까? 예수를 근거로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은 예수를 향합니다. 예수가 역사 속에 등장하셔서, 시간과 공간 속을 살아 우리 죄를 지고 죽으셨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며, 우리의 구원은 거기서 완성된 것이라고 로마서는 말씀합니다.

그때 이미 구원이 완성되었는데도 우리는 왜 이 모양인가, 이에 대한 답은 무엇입니까? 예수는 이미 완성된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데, 이 일은 어떤 공식에 대입하는 것처럼 기계적 작업이 아닙니다. 구원의 적용은 우리의 실존 곧 우리가 처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의 자유 의지로 선택하고 망설이고 외면하고 항복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각 신자들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구원인 것이죠.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받아 주시는 심판자 정도에 머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온 표현으로 하면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용서하시며 돌이키시고 회복하시는 분입니다. 법적인 잣대로 잘잘못을 가려내시는 심판자가 아니십니다. 우리의 거역이나 우리의 무지가 아무래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저항이나 무지에도 포기하시지 않고 이것들을 엮어 직선보다 더 나은 길을 만드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산 제물로 사는 삶

자비는 넘어가 주는 것이라고 쉽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자비하심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의지인 줄 이해하겠습니까? 오래 참으시고,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로 피 흘리게 하사 죽음을 관통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부활 승리가 자비입니다. 성경에 나온 표현으로 하면 ‘피 흘려 구원하셨다’입니다. ‘피 흘려’라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개입이며 놀라운 성의입니까? 가장 지극한 성의와 열정이 담긴 말입니다. 하나님은 피 흘려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자비를 베푸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하라’는 의미로 나온 것이 바로 12장 1절의 ‘그러므로’입니다.

‘산 제물’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이 죄인 된 인생과 신자 된 인생을 어떻게 나누는가를 현실 속에서 누려 보고 증언하고 살아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옳고 저렇게 사는 것은 그르다고 하는 도덕적 비교가 아닙니다. 복음을 구체적인 네 인생에 담아 내는 그 명예로운 길을 걸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합니다.
인생과 세상이 얼마나 헛되고 거짓되고 더러우며 살 가치가 없는가를 확인한 자들만이 이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영광을 사는 것은 보상이나 상대적 우위가 아니라 진정한 명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산 제물은 ‘삶으로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복종하라는 이 느닷없어 보이는 요구는 어떤 명분이거나 무엇을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조건도 아닙니다. 복종해도 좋을 전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려고 너희 둘을 묶었다, 너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내가 그를 태어나게 하고 길러서 네 짝으로 붙여 준 것이다,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복종해라, 너는 마음 놓고 네 아내를 사랑하라, 이런 말씀입니다.
각자를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만들고자 부부로 부르신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를 누리며, 죄악이 관영하는 이 세상 속에서 살아생전에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영광을 누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우리는 세상의 위협과 유혹이 무엇인지 계속 확인해야 합니다. 세상을 이겨야 하기 때문인데 이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 안에서 배운, 새로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따라 사십시오. 그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허락하신 구원으로 말미암는 자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법이든 도덕이든 양심이든 상식이든 예수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영광에 종속된 자의 영광으로 그것들을 씁니다.

기독교 신앙의 영광스러움은 무엇일까요? 물론 기독교에도 당연히 도덕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도덕성보다 더 나아갑니다. 자비와 용서, 희생, 사랑으로까지 갑니다. 이 모든 것은 이를 누리게 된 영광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며, 이해관계나 정죄의 차원에서 사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상대적 우위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준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어서 천국 가면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작하고 지금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라는 말은 굉장한 말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으라고 합니다. 사랑을 받으라. 여러분의 인생에 일어난 모든 일을 가지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유익을 주실 것입니다. 신령한 결과를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존심을 내려놓으신 분입니다. 바벨론 포로 때 하나님의 성전이 훼파되는 것을 허용하시고 예수를 우리 손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십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을 사랑이라는 명분과 도덕성으로 몰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여기 나온 자비하심이 얼마나 대단한 하나님의 성의이며 의지인가를 보셨습니까? 보셨다면 분별하십시오. 세상과 하나님을 따르는 길이 어떻게 다른지 분별하십시오. 어떤 길이 명예롭고 어떤 길이 자랑인가를 보십시오.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웃으세요.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웃으십시오. 성경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 인생과 너희 존재에 이 구원의 진정한 증언을 담고 살아라, 구체적인 인격과 생애 속에 담고 살아 내라, 이는 영광스러운 길이니라, 그것이 구원이니라, 아멘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무엇이며, 우리 현실은 무엇일까요. 감사하는 것이 능력인 줄 깨닫게 하옵소서. 살아 있는 동안 사랑하게 하옵소서. 용서하게 하옵소서. 웃을 수 있게 하옵소서. 살아 있는 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두 손을 벌리고 가슴을 열고 계심을 증언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얼굴에 하나님의 사랑이 영광으로 빛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