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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다시보는 로마서-박영선 목사

32.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_신비, 불순종조차 감싸 안으심 / 3부 그럴 수 없느니라(9:1-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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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5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28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25-36)





거부로도 막을 수 없는 은혜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은 어디까지 미치는가, 하고 구원의 범위를 물을 때, 이스라엘은 중요한 시금석이 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 백성이며 베냐민 지파이다, 이런 나도 사도가 되었다면 어찌 이스라엘이 완전히 끝났겠느냐, 저들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 것인가, 이방처럼 아무 조건도 없는 곳에서도 구원이 허락되었으니 이스라엘의 거부도 하나님의 은혜를 막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스라엘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에서 바울이 내리는 결론입니다.

성경은 모르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모르는 것도 큰 죄입니다.
이방인들이여, 너희가 얻은 구원은 이스라엘의 배반으로 얻은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이스라엘보다 더 나은 조건에 있다는 말이냐, 그렇지 않다, 너희의 구원은 은혜 위에 서 있다, 너희가 전적으로 은혜 위에 서 있는 것같이 이스라엘도 은혜 위에 서 있다, 이스라엘의 거부가 하나님의 은혜를 방해할 수 없다, 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31절이 등장합니다.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가두어 두심의 의미

하나님이 강보에 싸듯 바다를 감싸 안으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불순종도 그렇게 감싸 안으신 것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감싸 안았다’

바다가 넘친다고 해도 지구 밖으로 쏟아질 수 없듯이, 인간의 어떤 불순종도 하나님의 감싸 안으심을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창조주인 나와 피조물인 세계 사이에는 결코 대등한 충돌을 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차원이 다른 차이다, 나는 불순종 가운데 있는 너희 모두를 안고 있는 자다, 나는 이 모두를 감싸 안고 있는 저 위의 존재다, 너희가 순종했느냐 불순종했느냐의 여부는 내 창조와 의지와 목적을 막을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어떤 선택도 창조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선택이란 이것인가 저것인가,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좋은가 싫은가를 고르듯 무엇인가 택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서처럼 무엇을 만들어 낼 능력은 인간의 선택에 없습니다.
사실 인간이 선택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선택은 창조가 아닙니다.
이 모든 선택은 기껏해야 하나님의 창조 내에서 무엇인가를 다만 고르는 행위일 뿐입니다.



순종과 연결된 자유


성경에서 인간의 자유나 선택은 순종과 연결됩니다. 자유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라고 합니다.

예수가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 자신을 의에 내줄 수 있는 자유입니다.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와 부르심에 나를 맡길 수 있는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전에는 없던 자유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복음의 중요한 선언은 이 자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영광의 길을 살 자유, 죄의 종에서 벗어나 우리의 의지와 전인격을 동원하여 기꺼이 하나님의 영광에 순종하는 자유, 바로 이것이 자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의 궁극적 영광입니다. 인간에게는 창조 세계 속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 주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과 영광과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언제나 강조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이 순종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굴복이 아닙니다. 선택의 여유가 없는 굴종이 아닙니다. 숙명이 아니고 기꺼이 자원하는 기쁜 의지입니다.

순종은 누구를 따라갈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순종이란 그 자체로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열심이라는 말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무엇에 대한 열심, 무엇에 대한 진심이 있는 것이지, 열심이나 순종과 같은 추상명사가 홀로 돌아다닐 수는 없습니다. 순종도 무엇에 대한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순종은 예수에 대한 순종을 말합니다. 예수에 대한 순종이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따라가는 것, 거기에 나를 내주는 것을 말합니다. 기쁜 헌신입니다.

‘자기 의’에다가 예수님의 인정까지 덧칠하려 했던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그렇게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서 있는 터전, 너를 지탱하고 있는 것, 너를 근거하고 있는 것을 다 내려놓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로 그 근거를 삼고 예수에 지탱하여 있지 않다면 우리도 부자 청년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순종은 대상이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당연히 마릅니다. 순종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순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강요하시지는 않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과 기회를 주어서 선택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런데 인류는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인류는 언제나 불순종의 길을 택했습니다. 가지인데도 나무에 붙어 있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예수 안에 붙들어 매십시오. 만일 내가 예수에게 붙어 있지 않다면, 해가 비추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일들이 모두 나를 썩게 할 뿐입니다. 내가 예수에게 붙어 있어 그로부터 참된 생명을 공급받는다면,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무럭무럭 자라게 합니다. 이때 생명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예수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를 죽인 의(義), 이것이 세상이 만든 의입니다. 생명도, 진리도, 능력도, 거룩도, 영광도 없는 것, 그런 의가 예수로 말미암는 진정한 영광과 승리와 명예를 거부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자기 의를 내세워 예수를 거부하고 말았으니 이제 이것으로 끝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말씀은 여러분에게 선택권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실수할 시간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마음껏 어리석게 구는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게 하십니다.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 문으로 그것을 막으신 이가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시편 103편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처지대로 갚지 않으실 것입니다.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예수, 곧 복음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가지는 무게와 깊이와 크기를 한번 헤아려보십시오.
못난 우리의 선택, 실력, 행위,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감싸 안으셔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풀려날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의지야말로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는 바울의 근거이자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매주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는 불순종하는 자들을 감싸 안아서 그것을 이겨내어 승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를 넘어서 있는 영역이란 없습니다. 그렇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에 속하지 않는 영역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목적하신 것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이 예수다, 다른 방법이나 다른 경우란 없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것이 아니고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 이런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나는 네 인생을 네가 이 세상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끝나게 하지 않겠다, 이것이 예수가 하신 말씀의 참된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이 이만하면 됐다, 하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아직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란 없습니다.

우리 시대 복음주의 내에 만연한 감격이나 구원의 확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너무 낮아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논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함부로 생각해도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닌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높고 깊고 거룩하고 무서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무섭다는 것은 공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지하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열심이 우리 모두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3)



왜 헤아리지 못하며 왜 찾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까?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이해가 안 될까요? 우리 생각보다 너무 높고 깊어서 그렇습니다.

욥기 42장에서 주께 대하여는 이미 귀로 듣고 있었는데, 왜 또 눈으로 보아야 했을까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듣고도 납득이 안 되어 말이 되지, 안 되지를 고민하고 있었지만, 보고 나니 그 고민은 이제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는 이야기가 말이 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대답은 ‘보라’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우리의 역사입니다. 너희가 얻은 구원에 대해 너희에게 무슨 티끌만한 근거라도 있느냐, 있으면 어디 자랑해 봐라, 하고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그때 우리는 욥처럼, 바울처럼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제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아무 조건도 충족되지 않은 곳, 내가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창조의 역사를 펼치시는 줄 믿고 회개합니다. 주 앞에 나를 바칩니다. 내 이해와 내 능력 안에 안주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높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