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롬 11:13-24)
두려운 은혜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방에까지 퍼져 나갔으며, 이방을 구한 이 은혜가 결국 이스라엘의 실패와 거부까지 끌어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은혜는 우리의 저항과 거부와 무지와 못난 것을 극복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은혜를 값싸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은혜란 혼란이나 방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은혜가 얼마나 두렵고 굉장한 것인지 기억하라, 이런 말씀입니다.
무서운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토록 고단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방치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할 때마다 하나님이 꾸중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을 버리시거나 외면하시지 않고 저들과 타협하시지도 않아서 저들의 역사가 고달팠던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논하려면 하나님의 이 원칙,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거룩함을 목표하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은 이 목적을 타협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대원칙, 곧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칙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고 그 위에 은혜를 더 베푸십니다. 은혜란 이 원칙을 복되게 하고, 영광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실하심과 자비와 긍휼을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가 있으니 아무렇게 살아도 좋다’라는 말은 성경이 말하는 은혜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값싼 것이 아닙니다.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두렵다고 해서 공포심을 가지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담긴 의지와 성실하심을 기억하고 기꺼이 순종하여 복을 누리라고 성경이 이 은혜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야곱, 너는 포기될 수 없다
하나님은 지금 야곱에게 ‘너는 나보다 낫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못 알아들으면 하나님이 야곱의 전 생애에 걸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씨름에도 버티다가 하나님이 그의 환도 뼈를 치자, 무릎을 꿇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아니면 겁이 덜컥 났을까요?
야곱도 자기 생애를 압니다. 야곱의 생애란 허망한 인생입니다. 속이고 빼앗아 쟁취하여 고향을 떠나서 살 수밖에 없는 생애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이제 얍복 나루 앞에 와 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빼앗아도, 아무리 이겨도, 아무 쓸데없다는 것을 깨닫고 여기 서는 것입니다. 답이 없는 인생으로 얍복 나루에 섰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와서 씨름을 거십니다.
야곱은 여기서 어떻게 합니까? 매달려서 씨름하는 것 말고 그에게 무슨 대안이 있습니까? 야곱은 자신의 환도 뼈를 치는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야곱은 자신도 포기한 자기 인생에, 더러움과 허망함이 전부인 자기 몸속에 손을 담그시는 아버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쉽게 포기하고 자기 자신도 쉽게 포기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버리면 그만일 것 같은 인생, 끝까지 남는 궁극적인 자기편은 자기뿐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인생을 삽니다. 세상이 그렇게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버려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버리지 않는 이상 너는 망하지 않는다, 너는 포기될 수 없는 존재다, 라는 사실을 야곱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야곱이 잘한 게 뭐가 있습니까? 그가 잘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야곱을 가리켜 하나님의 약속에서 시작한 자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억울함과 바로의 거부마저도
요셉이 꾼 꿈에는 어떤 가치가 담겨 있던 것일까요? 요셉은 나중에 총리가 되어 세상을 구하게 되었을 때, 이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요셉의 생애에 나타난 은혜는 무엇입니까? 요셉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팔아먹은 놈, 억울한 놈, 이렇게 둘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무엇을 만드는지 보십시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팔아먹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요셉이 총리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고 그의 가족도 구원을 얻습니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팔아먹어서 구원을 얻은 자가 요셉의 형들이라면, 억울해서 위대해지는 인생은 요셉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받는다’는 대원칙을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놀랍게 영광과 승리로 만드는가를 보십시오.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조건과 원칙 위에서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거룩하심과 능력이 우리를 얼마나 깊고 찬란하게 만드시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바로는 자기가 가진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리하여 바로는 본의 아니게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와 이스라엘이 얼마나 굉장한 존재인가를 드러내게 됩니다.
바로의 모든 저항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이스라엘의 존귀함이 드러나게 됩니다. 바로의 패배로 그가 어떤 존재인지가 드러납니다. 바로는 결코 세상의 통치자도 주인도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붙잡고 있던 애굽이 더 이상 인류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세우려는 의지를 가지신 하나님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더 나아가 바로의 실패로 모든 인류가 복음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온 인류를 위해 이스라엘이 준비된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거역했으나, 그 일로 자기 후손을 구원하게 됩니다. 모든 인류 속에 애굽까지 포함되니 말입니다. 바로는 자신의 실패로 일이 이렇게 될지 알았을까요? 당연히 몰랐을 것입니다. 몰랐는데 왜 이 일이 생겼냐고 묻고 싶습니까? 이것이 은혜의 힘입니다.
구원이 돈 주고 사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라, 피 흘려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손을 들이미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피 흘려 죽으십니다. 보잘것없는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 더러운 우리 인생 속에 손을 넣어 샅바를 잡고 씨름하고 그 살과 뼈를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참모습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습니다. 경이롭고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 같이 보잘것없는 인생을 위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들이미시는 우리의 인생 속 현실 하나하나는 얼마나 굉장한 것일까요. 우리 인생의 매 순간은 은혜를 드러내시기 위해 하나님이 당신의 성의로 마련하신 소품이요 섬세하게 준비하신 장치입니다.
인생의 모든 막막한 자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당신 곁으로 미는 자리입니다. 어떻게 밉니까? 세상이 거짓되었다는 것을 깨달아라, 네가 가진 것으로는 너에게 답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아라, 이것이 탕자의 비유가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그 긴 세월에 걸쳐 우리와 씨름하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데, 우리는 우리가 좋으면 하나님도 좋고, 우리가 나쁘면 하나님도 나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루하루를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자비와 은혜로 일하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이 모든 기적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거룩하심과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의 의지의 결국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외면한 날에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하나님이기를 멈추신 적이 없습니다. 은혜는 그렇게 일하고 있습니다.
없는 존재인 이삭
아브라함은 이삭을 잡은 것이니 이제 이삭은 없는 존재입니다.
백 살에 낳았다는 것은 그가 낳을 수 없는 아이를 낳았다는 말입니다. 백 살에 이르러, 곧 애를 낳을 수 없는 나이에 이르자 그에게 이삭을 주심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손은 생물학적 번식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십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이삭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신 이삭을 이제 다시 잡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확인하게 하십니까? 이 아이는 원래 없는 존재다, 너는 이 일을 기억하고 있느냐, 라고 묻는 시험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자식을 잡아 이렇게 답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이삭은 없습니다, 내가 자녀를 잘 길러야 후손이 번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손의 번성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면 일어날 결과입니다, 그러니 기꺼이 이삭을 잡겠습니다, 라고 하자 하나님이 “됐다.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바로 나 하나님이다, 그러니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 잘못된 자리에서도 승리로 뒤집을 수 있다, 죽음도 뒤집는다, 예수의 부활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보아라, 이런 하나님의 자기 증언이 바로 성경의 핵심 내용입니다.
내가 은혜로 어떻게 일하는지 보아라, 예수를 믿는 고백이 갖는 힘을 기억하라, 하루도 나 하나님이 손을 놓고 있는 날은 없다, 네가 지금 얍복 나루에 서 있느냐, 네가 감옥에 갇혀 있느냐, 네가 묶여 모리아 산에 있느냐, 괜찮다, 내 은혜는 쉼 없이 모든 것 속에서 일하고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죽음을 부활로 바꾸는 나는 하나님이니라, 이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은혜가 혼란과 방치와 우연에 맡겨져 있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한 손길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 존재의 한계를 하나님 앞에 기꺼이 내맡겨 ‘아멘’으로 응답할 수 있고 기꺼이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늘 몸부림치고 고함지를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못난 현실도 괜찮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와 붙드심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담대히 걸으라고 하십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고 도망가도 그만인 그런 인생이 아니라, 순종하고 충성하고 인내하고 힘을 다하여 노력해야 하는 삶인 줄 압니다. 결과가 우리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결국 이루실 것을 알고 순종하는 믿음이 우리로 세상이 만들지 못하는 명예를 갖게 합니다. 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걷는 우리 모두 되게 하사, 성경에서 본 것같이 우리 인생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